헬렌켈러에게 셜리반 선생님은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게 도와준 인생의 나침반과 같은 존재였다. 시각중복장애인 교육과 복지에 있어 불모지였던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25년간을 시각중복장애인들에게 삶의 길잡이 역할을 해 온 이가 있었으니 바로 여주 라파엘의 집 정지훈(55, 시각1급) 원장이다.
그는 시각장애인으로서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시각중복장애인 복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제 32회 장애인의 날’ 기념식에서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는 “시각중복장애 교육 분야를 개척해 온 점을 인정해 주신 것 같다”며 소감을 밝혔다.
시각청각장애연구회를 통해 시각청각장애재활센터를 건립하고 시각중복장애인들로 구성된 라파엘예술단을 결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그는 이제 한걸음 나아가 시각중복장애인들의 교육·복지·재활을 위한 종합복지센터 건립을 꿈꾸고 있다. 정지훈 원장의 삶의 이야기와 앞으로 비전 등을 들었다.
실명의 절망 딛고 선지자적 역할 꿈꾸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눈을 찔리는 사고를 당해 두 차례의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13살 때 실명에 이르게 됐습니다.
어린 나이에 절망이란 걸 경험하며 참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만 당시 수술을 맡았던 명동성모병원의 구본술 선생님의“시각장애인이 되더라도 대학도 갈 수 있고 교육도 받을 수 있다. 사회에서 일도 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항상 새기며 이겨냈습니다.
서울맹학교 고등부를 졸업했지만 안마나 침술 등 시각장애인들에게 있어 평범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는 싫었습니다.
저와 같이 시각장애로 인해 힘들고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교육의 온기를 불어 넣어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3수 끝에 대학에 입학, 특수교육을 전공하게 됐습니다.
허름한 주택, 10명의 시각중복장애인들의 교육을 시작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특수교사 자리를 기다리던 1987년 선배의 제안으로 시각중복장애인 복지시설인 서울 라파엘의 집에서 봉사 차원에서 교사직으로 근무를 하게 됐습니다.
당시 시각장애인에 대한 교육조차 활성화돼 있지 못한 시대여서 시각중복장애인들에 대한 교육시스템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
그곳 역시 복지시설이라고는 하나 교육 및 복지 관련된 아무런 부대시설도 없는 허름한 집일 뿐이었고 특수교육에서조차 소외된 시각중복장애인 10명이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수준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시각중복장애인에게 체계적이고 개별화된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당시로서‘교육’은 그야말로 바람일 뿐이었고, 교육을 책임져야 할 저로서는 암담하고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시각중복장애인들 중 시·청각 중복장애를 가진 신영식 군과 이관주 군에게 필화, 점자글자판 등을 활용해 점자교육의 장을 열었지만 교육시스템이 너무 열악한 터라 좌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인천혜광학교 교사임용통보를 받기도 했으나 교육의 사각지대에 있던 시각중복장애인들을 위해 투신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됐습니다.
여주 라파엘의 집, 시각중복장애인의 희망의 보금자리 만들다
여주 라파엘의 집 초대원장 제안을 받고 1991년 부임한 이래, 선진국의 체계적으로 잘 갖추어진 장애인복지 및 교육시스템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WBU(세계시각장애인연맹)가 주최한 일본 총회에 참석하게 됐고 일본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생에 걸쳐 체계적으로 잘 갖추어진 교육과 복지, 문화와 재활시스템에 큰 자극을 받고 돌아와 라파엘의 집을 시각중복장애인들의 희망의 보금자리로서, 제대로 된 기관으로 운영해 나가야겠다는 비전을 갖게 됐습니다. 이에 중·장기 비전을 수립, 구체적 방안을 모색해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각청각장애인의 전문교육을 위해 시각청각 전문가들로 구성된 시각청각장애연구회를 발족해 방향정위, 의사소통, 일상생활 등 분야로 나누어 연구를 실시했으며 연구결과를 토대로 2008년 시각중복장애인의 교육용 장비, 촉각자료, 확대자료 등 보조공학기기를 갖춘 시각청각장애재활센터를 개소했습니다.
라파엘의 집 질적인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을 모색할 즘, 일본의 시각장애인시설 라이트하우스의 시각중복장애인밴드팀의 공연에 감명을 받아 시각중복장애인의 음악적 잔존가능성을 개발하는 프로그램을 구상하게 됐습니다.
사물놀이팀를 시작으로 밴드교육, 기악교육 등의 음악프로그램을 확대 운영했고 마침내 2009년 이를 모두 통합한 라파엘예술단을 창단해 학교, 기업체, 공공기관 등 활발한 대내외 공연을 펼쳐 장애인에 대한 인식개선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2010년 라파엘문화예술센터를 개원해 공연활동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됏습니다.
이에 앞서 2002년에는 시각중복장애인들의 작업활동, 교육활동, 사회적응훈련을 통해 잔존능력을 개발하고 사회참여의 성취감을 심어주기 위해 목적사업의 일환으로 직업재활센터를 개원하게 됐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특수교육 뿐 아니라 사회복지 분야에 대해서도 지식을 갖추어야 장애인들에 대한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 대학원에 진학해 사회복지 1급자격증과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교육과 복지를 한 곳에서’종합복지센터를 꿈꾸다
현재 여주 라파엘의 집은 160명의 장애인들의 터전으로서 미흡하게나마 모양새를 갖추게 됐습니다만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각중복장애인들의 치료와 교육, 훈련, 복지까지 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종합복지센터의 꿈은 멀기만 합니다.
시각중복장애인들은 시각과 청각 중복 뿐 아니라 지체, 지적장애 등과 중복되는 등 더욱 다양한 유형이 있기 때문에 이들 각각에 대한 체계적이고 개별화된 교육을 위한 전문적 프로그램을 연구, 개발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센터 건립 뿐 아니라 시각중복장애인들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 개선 노력 또한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시각중복장애인들도 제도적, 정책적 뒷받침이 있다면 헬렌켈러와 같은 역사적 인물이 나올 수 있습니다.
약 25년 전, 허름한 주택에 맡겨진 10명의 시각중복장애인들과의 만남을 시발점이 돼 이들의 교육, 복지, 재활을 위한 산실을 마련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살아왔고 이제 더욱 분발해서 그 결실을 거둘 것입니다.
시각중복장애인들이 장애를 딛고 우리 사회에 기여하고 공헌하는 인물이 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적어도 그들이 세상에 눈을 뜨고 인생의 가치를 실현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제 발걸음은 계속될 것입니다.
약력
1990.12 대통령표창
1991.1~현재 사회복지법인하상복지회 여주라파엘의 집 시설장
2007.3 대구대학교 특수교육학과 박사과정 수료
2010.2 한국장애인복지시설협회 서울특별시협회 이사
박영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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