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순 진(대전여민회장,대전대 교수)

 
지금은 대전 지역의 진보적 여성단체인 대전여민회의 회장을 맡고 있지만 나는 진보나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70년대에 대학을 이미 졸업했고, 중학교 국어선생으로 10.26이나 5.18을 맞고 겪어내면서 추호의 의심없이 언론이 보도하는 대로 믿으며 살았었다.
지방대학을 졸업한 여성으로 겪는 갖가지 차별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방은 물론이고 서울에서 공부한 남성보다 월등한 실력을 갖추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뿐, 그 차별의 체험에서 다른 힘을 끌어낼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페미니즘을 접하기 전까지는......
학위과정을 거의 끝낼 즈음에 읽게 된 페미니즘 관련 책들은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었다.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던 세계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이론을 끌어내고, 세상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걸 보면서 비로소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일상생활과 학문이 따로 놀던 삶에서 비로소 일상이 곧 학문이 되는 삶으로 바뀌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가치의 차별로 간주하고, 권력을 차별적으로 배분해왔던 가부장제의 구조를 인식하자 계급차별, 지역차별 등 모든 차별의 권력구조와 그 모순이 한눈에 들어온 것이다.
모든 차별은 차별당하는 사람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차별받지 않는 사람은 그런 일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성차별적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고 있는 많은 문제는 여성이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성이라고 해서 다 같은 지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 내에서도 계급과 인종에 따라 차별이 존재하는 것이다. 연전에 미국  여군들이 이라크 남성포로에게 성폭력을 가했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당한 차별은 민감하게 의식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받고 있는 차별에는 둔감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당하는 차별에는 민감하면서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가 당하는 차별에는 눈감는 경우가 많다. 여성으로서 자기가 받고 있는 차별에 민감한 어머니도 자신보다 더 힘없는 아이에게 자신이 휘두르는 폭력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한 것이다.
차별 받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다른 사람이 받는 차별의 고통을 헤아려 이 땅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차별을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운동의 바람직한 모습이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추악한 권력싸움의 모습,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채 차별을 무의식적으로 재생산하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운동의 속성은 남성적이어서 초기에는 분노와 고발, 투쟁으로 시작되지만 운동의 주체가 성숙해지면 겉으로 요란하지 않으면서 안을 변화시키는 여성주의적 실천으로 바뀌어야 한다. 소리를 크게 내고 맞서 싸우는 방식은 작은 소리-말조차 하지 못하는 존재들의 침묵을 들을 수 없게 하고, 운동의 주체마저 공격적이고 폭력적으로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이념을 향해 운동해온 사람들이 일상에서 비민주적인 행태를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앞에 나서고, 소리 지르고, 이름 내는 일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 일이 뒤에서 이름 없이 묵묵히 치다꺼리하는 사람들 덕분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모른다면, 그들에게 감사할 줄 모른다면 애써서 그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모든 차이가 우주 삼라만상의 존재 근거임을 깨닫고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 그것이 여성운동이 꿈꾸는 세상이다.

 

서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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