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가 성폭력관련법의 모법이 되는 형법상의 친고죄 폐지 등 근본적인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표명하고 나섰다.

인권위는 성폭력범죄 피해자의 성적자기결정권 보호를 위해 입법적 조치, 궁극적으로는 기본법인 형법에 대한 개선이 필요함에 따라 국회와 법무부 등 관련기관에 관렵법 개정을 권고했다고 1일 밝혔다.

인권위는 “폭력범죄에 대한 사회적 공분과 강력한 대응 여론에 힘입어 처벌 강화 및 다양한 정책이 도입돼 왔으나, 이는 기본법인 형법이 아니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등 특별법을 여러 차례 제개정하는 형식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고 지적했다.

이어 인권위는 “특례법은 모법인 형법의 범위를 벗어나기 어려워 성폭력범죄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하거나, 처벌규정의 체계와 적용범위가 복잡해지는 등 기본적인 범죄인 성폭력범죄를 형법이 아닌 특별법을 통해 해결하고자 해 야기된 법 체계의 이원화문제가 논란이 돼 왔다”고 강조했다.

이어 “현실적으로도 여러 차례의 특례법 제개정 이후에도 성폭력범죄는 줄어들지 않고 기소율이나 유죄선고율도 낮아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형법은 성폭력법제의 기본법임에도 불구하고 1953년 제정 이후 강간죄의 구성요건에 대한 개정은 이루어지지 않은 반면, 성폭력범죄의 처벌과 관련해 쟁점이 된 핵심사항 대부분이 형법 규정과 관련돼 있다”며 “이에 성폭력 피해자의 성적자기결정권 보호를 위해 형법을 중심으로 성폭력법제에서 개정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 검토, 권고했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우선 국회의장에게는  ‘형법’, ‘군형법’, ‘성폭력특례법’,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에서 성폭력범죄에 대한 친고죄 관련 조항을 삭제토록 했으며 강간죄의 보호객체를 ‘부녀’에서 ‘사람’으로 변경토록 권고했다.

또한 강간죄 성립을 위해 요구되는 폭행.협박의 정도 요건을 ‘피해자의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서 ‘피해자의 반항을 곤란하게 할 정도’ 등 이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형법’ 규정을 개정토록 했다.

아울러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의 장애인 준강간죄 관련 규정에서 형법 규정을 직접 인용하는 문구를 삭제하고 입법 취지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개정하고 성폭력특례법의 친족성폭력 규정상 친족 범위에 동거하는 친족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한편 법무부장관에게는 위와 같은 내용의 형법과 성폭력특례법을 개정할 것을 권고했다.

인권위에 따르면 현행법상 비장애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범죄의 경우 피해자의 명예와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여전히 친고죄가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고소여부를 기준으로 고소된 사건만 법적인 처벌이 가능하도록 하는 친고죄 규정이 ▲기소율에 영향을 미쳐 낮은 처벌율을 초래하고 결과적으로 성폭력범죄에 대한 처벌에 중대한 공백을 발생시키고 ▲고소 취하 또는 고소 포기를 목적으로 가해자 측이 피해자에게 과도한 합의종용이나 협박을 하고, 합의를 위해 피해자의 가족이나 직장 등에까지 접촉을 시도해 2차 피해를 야기하고 있으며 ▲성폭력이라는 중대 범죄를 개인 간의 범죄로 인식케 하는 등의 문제가 지적돼 왔다.

인권위는 “친고죄의 취지인 성폭력 피해자의 사생활보호는 형사절차상의 보호조치를 두텁게 해 해결해야 할 문제”라며 “형법과 성폭력특례법상 친고죄 조항, 그리고 청소년성보호법상 반의사불벌죄 규정을 삭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인권위는 현행 형법이 유사성교행위에 대해 규정하지 않고 있는 반면 성폭력특례법과 청소년성보호법은 유사성교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을 두고 있는 점도 주목했다. 

이에 따라 현행법상 유사성교행위의 경우 미성년자와 장애인에 대해서는 특별법으로 처벌할 수 있지만 비장애성인에 대해서는 법정형이 매우 낮은 추행죄로만 처벌할 수 있는 것이다.

인권위는 “성폭력범죄의 보호법익이 성적자기결정권이라 할 때, 피해자 의사에 반한 성적행위로 인한 피해는 강간 피해와 다르지 않다”며 “따라서 현행법과 같이 유사성교행위를 아동․청소년 등 특정 대상에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형법에서 성폭력범죄의 행위유형으로 규정하여 성폭력 피해자를 보다 두텁게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인권위는 현행 형법의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를 처벌토록 한 데 대해 판례상 ‘피해자의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 이른바 최협의의 폭행 및 협박설에 근거해 강간죄로 인정하는 데 대해서도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러한 기준에 의하게 되면, 피해자가 생명이나 신체의 안전에 대한 위협을 무릅쓰고라도 강간행위에 저항할 것을 요건으로 하게 돼 피해자에게 불리한 해석이 되고 피해자에게 강하게 저항하였음을 입증할 책임을 부담시키게 된다.

또한 저항이 가능한 상황에서는 강간이 성립할 수 없고 자신을 지키려는 피해자는 죽을 힘을 다해 저항하는 것이 도리’라는 왜곡된 통념도 반영돼 있다.

인권위는 “많은 경우 두려움이나 공포, 당황으로 인해 그 상황을 포기하는 경우 등 강간행위에 대응하는 피해자의 태도나 경험의 차이를 간과하고 일률적인 반항의 정도를 요구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며 “강간죄의 성립요건에서 폭행ㆍ협박의 정도요건을 완화해 ‘피해자의 반항을 곤란하게 할 정도’로 하는 등 그동안 전문가들이 제시해 온 방안을 검토해 형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현행 성폭력특례법은 장애인 성폭력과 관련해 ‘신체적인 또는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해 형법상의 준강간, 준강제추행의 죄를 범한 경우를 처벌하도록 정하고 있다.

그런데 형법상 준강간죄는 심신상실에 준하는 ‘항거불능’을 요건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장애인이면서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임을 입증토록 요구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장애인의 경우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인하여 자신의 의사를 형성하거나 외부에의 표현이 어렵거나 그 실행이 곤란․불가능하거나, 자신의 의사에 반한 성적접촉을 거절하는 방법을 모르고 가벼운 위력에 대항하기 어려운 경우 등이 있는데, 이들에게 ‘항거불능의 상태’라는 요건을 요구하는 것은 장애인의 특성과 구체적인 사회적 조건 등을 간과한 것이다.

인권위는 “문제 해결을 위해 근본적으로는 형법상 강간죄에 대한 최협의 폭행․협박설을 개선해야 한다”며 “형법 개정 이전에라도 성폭력특례법의 준강간죄 규정에서 형법상 준강간죄 규정을 직접 인용한 문구를 삭제하고 장애인 준강간죄 규정을 도입한 취지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성폭력특례법은 친족에 의한 강간죄 등을 가중하여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는데 이때 친족의 범위는 4촌 이내의 혈족 및 인척으로 하고 있다.

실제로 현실에서 친족에 의한 성폭력범죄가 상당수 발생하고 있는데, 동거하는 친족에 의한 성폭력의 경우 피해자나 그 가족의 피해경험은 4촌 이내의 혈족 및 인척에 의한 것과 동일하거나 ‘동거’한다는 점에서 동거하지 않는 친족에 의한 것보다 오히려 더 심각할 수 있다.

인권위는 “성폭력특례법에 동거하는 친족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박영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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