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빈곤문제연구소 류정순 소장

이르쿠츠시와 바이칼 호수 안에 있는 알혼섬을 러시아어로 ‘길’이라는 이름의 여객선이 왕래하고 있다. ‘길’은 사람뿐만 아니라 자동차까지 태우는 큰 배로서 섬주민들이 육지로 드나들고, 섬특산품인 오물(민물고기)과 생활용품이 교역되고, 관광객이 드나드는 유일한 통로이다. 자본주의 시장논리를 적용한다면 이와 같은 독점적 지위의‘길’의 요금은 당연히 비싸게 책정될 것이다.

그러나 ‘길’은 주민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 관광객들에게도 무료로 운행된다. 알혼섬은 세계 담수의 20%를 품고 있는 바이칼 호수 안에 있기 때문에 약간의 배관시설만 해도 카스피해의 물을 끌어들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혼섬의 지자체는 예산부족으로 배관시설을 못하고, 주민들은 아직도 상하수도 없이 푸세식 화장실을 이용하면서 불편하게 살고 있다.

만약 이 섬이 한국에 있다면 지방자치단체장 후보는 여객선 요금을 주민들에게는 염가로, 관광객들에게는 비싸게 책정한 후, 관광객들로부터 걷어 들인 돈으로 배관시설을 하고, 관광시설을 지어서 주민들의 생활수준을 높이겠다는 공약을 내걸 것이고, 주민들은 그에게 투표할 것이며, 따라서 주민들의 경제생활은 개선될 것이다.

하지만 알혼섬 지자체는 자국민은 물론 외국관광객들에게도 뱃삯을 받지 않고있는데, 그 배경에는 길은 공공재로서 구매력이 있는 사람은 갈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은 못 가는 시장재로 취급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의식과 공공재는 자국민뿐만 아니라 지구촌사회의 전 구성원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범인류애적 도덕적 규범의식이 있다.  

만약 세계 최강국인 미국 정부가 FTA 협상의 추진에 있어서 알혼섬 주민과 같이 지구촌사회 구성원들 - 그 중에서도 시장경쟁력이 미약하여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빈국과 빈민 - 에 대한 범인류애적 도덕적 규범의식을 가지고 협상에 임한다면, 시장경쟁력 취약국가들과 취약빈민의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을 위한 생명줄인 직업을 빼앗지 않고, 범지구적 차원의 공공재와 사회적 안전망의 구축을 지향한다면, 그리고 부국과 빈국, 부자와 빈자, 거대공룡 다국적 기업과 열악한 개도국의 중소기업의 공존을 통한 화합의 인류문명사회를 건설해 보자는 인도주의적 규범의식에 기초하여 FTA를 추진한다면 누가 한미FTA를 반대하겠는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에도 영미형, 북구형 등 여러 유형이 있는데, 그 중 미국형은 지구촌 공동체적인 규범의식이 결여된 정글자본주의식 경쟁체제를 지향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유형이다. 미국은 관세장벽 철폐와 같은 상품에 대한 자유경쟁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체제를 미국식으로 이행시키고자 한다. 미국식 자유경쟁은 150 킬로그램의 선수와 60 킬로그램의 선수가 체급구별 없이 싸우자는 것으로서 시장경쟁력 미약국이나 미약자에게 너무 가혹하다. 한국의 농업과 같은 경쟁력 미약산업은 초토화되고 불쌍한 농부들은 일감을 잃고 노숙자로 전락되고, 물을 품고 있는 논이 사라져 장마철에 홍수를 막기 어려워질 것이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 한미FTA 체결 후 한국의 모습이다.

진정으로 공정한 자유경쟁을 원한다면 개발도상국이 비교우위에 있는 사람(노동)FTA협상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양국의 노동시장이 아무런 장벽 없이 하나로 통합되어,‘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시스템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동일노동-동일임금이 형성될 때 비로소 공정하고 자유로운 FTA가 작동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노동임금이 더 저렴하여 경쟁우위에 있는 노동은 비자제도로서 묶어둔 채, 단지 자국이 유리한 위치에 있는 금융, 제약, 지적 서비스, 농산물, 다국적 기업활동 등의 영역의 자유경쟁만을 요구하고 있다.
 
금융, 교육, 의료 등은 공공성이 높은 분야로서 개방되면 사회복지계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열악하나마 한국사회가 구축해 놓은 공공성이 크게 훼손될 것이다. 더구나 미국은 협정 체결 뒤 추가로 규제를 완화하거나 개방 폭을 넓히는 조처는 가능해도 거꾸로 가기는 어렵게 하는 ‘역진 방지’시스템을 작동시키고, 포괄주의(네가티브) 방식을 채택해 예외로 명시하지 않는 모든 분야를 다 개방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97년의 IMF가 태풍이었다면 한미FTA는 쓰나미라고 할 정도로 한국사회를 크게 뒤흔들어 놓을 것으로 우려된다.

117명의 경제학자들은 한미FTA 중단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법·제도·관행이 미국식 정글자본주의형으로 바뀌고, 공공성이 훼손되고 복지가 축소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면, 농업이 초토화되고 농민이 노숙자로 전락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면, 사회복지계도 한미FTA 중단을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할 것이다. 

 

서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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