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은 어쩌면 정신적인 부분에만 해당되는 말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 젊은이보다 체력과 힘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세계시각장애인경기대회에는 다르다. 정신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부분에서도 젊은이 못지 않은 선수가 있다. 대한민국 육상국가대표 문광식(64) 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데드리프트 훈련에 열중하고 있는 문광식 씨.

갑자기 찾아온 암흑…세상과의 단절

올해 64세의 문광식 씨는 처음부터 시각장애인은 아니었다. 한 지상파 방송국의 전기기사였던 문 씨는 아들 하나, 딸 하나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던 평범하고 소박한 가족의 가장이었다. 하지만 불행은 갑자기 찾아온다고 했던가. 48세부터 눈이 침침하기 시작하더니 점점 앞이 안보이기 시작했다. 가족 내력이 있던 것도 아니고, 병원에서도 이렇다 할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문 씨는 절망했다. 그렇게 문 씨는 발병 3년 만에 전맹(시각장애 1급)이 됐다.

전기기사는 매 순간 긴장해야하는 위험한 직업이었기에 문 씨는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보다 열정과 힘이 넘쳤던 문 씨는 갑작스레 찾아온 암흑에 당황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돈도 벌 수 없는 자신은 더 이상 가족에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문 씨는 가족들과의 인연을 끊고자 했다. 당시 성인이었던 자녀들은 ‘괜찮다. 함께 이겨나가자’고 설득했지만 문 씨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함께 도우며 살아가자고 애원했던 아내와도 이혼하고 문 씨는 세상과 단절되는 것을 택했다. 이후에도 가족들의 연락이 끊이지 않았지만 문 씨는 자신이 가족들에게 짐이 될까 염려돼 고집스레 연락을 피했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삶을 살았던 문 씨였기에 장애가 주는 상실감과 세상에 대한 배신감이 더 컸을 것이다.

운동으로 세상과 통(通)하다

세상과의 단절을 택한 문 씨는 자살 시도만 수차례였다. 순식간에 ‘쓸모없는 사람’이 됐다는 자괴감을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문 씨에게 세상으로 연결되는 문을 열어준 것이 바로 운동이다. 비장애인 시절부터 힘이 넘치고 체력이 좋았던 문 씨는 우연히 알게 된 장애인전국체전이 열린다는 소식은 단비와 같았다.

워낙에 체력이 좋았던 문 씨였기에 처음엔 달리기로 시작했다. 뛰면서 느끼는 상쾌함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이드와 함께 달려야 하는 시각장애인육상은 문 씨와 맞지 않았다. 역도팀 박근영 감독에 따르면 문 씨가 워낙에 빨라서 어떠한 가이드도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빨리 뛰어야 하는 육상이지만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해낼 수 없는 것이 바로 시각장애인육상이다. 때문에 문 씨는 육상을 그만두게 된다. 누구의 도움 없이 자기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운동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역도다. ‘누군가’ 때문이 아니라 오롯이 자기 자신 때문에 성패가 나뉘는 역도에 문 씨는 순식간에 매료됐다. 문 씨는 “(앞이)보이지 않아 더 열심히 듣고 연습했다. 지적 받는 사항을 매순간 고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려움이 올 때마다 ‘이건 내가 해내겠다!’라는 생각에 더욱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50이 넘은 적지 않은 나이에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힘을 내야 하는 역도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 씨는 “그래서 더 좋았다”고 말한다. 무거운 중량을 각고의 노력 끝에 들어 올렸을 때 ‘내가 이걸 해냈다!’라는 성취감과 함께 느껴지는 쾌감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문 씨는 2008년 경기도 대표로 첫 출전한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이듬해 58세의 나이에 3관왕(스쿼트, 데드리프트, 종합)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에도 매년 메달권에 진입한 문 씨는 지난 4월 2015서울시각장애인경기대회 국가대표선발전에서 젊은 사람들을 제치고 당당히 태극마크를 차지했다.

문 씨가 비로소 역도로 인해 세상과 통(通)하게 된 것이다.

문광식 씨가 세계무대에서 힘내기 위해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문 씨가 당당히 태극마크를 쥐게 되자 박 감독은 ‘이번 대회에 자녀들을 초청해보라‘고 제안했다. 후천적 시각장애라는 절망 속에서 꽃피워진 문 씨의 모습은 자녀들에게 큰 감동이 될 것이라며 문 씨를 설득했다. 이미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세상과 단절을 택한 아버지의 모습이 세계무대라면 자녀들도 마음의 앙금을 털어버리고 다시 행복한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 씨는 단호했다. “이미 아이들도 각자의 인생을 살며 결혼을 해서 자신들만의 가족을 꾸렸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라는 존재는 아이들에게 짐입니다. 이제까지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한두 번 연락을 하기 시작하면 왕래가 이어질 거고, 그러면 언젠가 저는 애들에게 짐이 되겠죠. 나 혼자 살아갈 수 있는 만큼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문 씨가 이기적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집스레 연락을 끊고 천륜을 끊어내는 것이 자녀들에게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 씨의 입장에서는 나이 들고, 앞이 안 보이는 아버지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자녀들과 인연을 끊은 문 씨도 ‘아버지’다. 아들딸을 보고 싶고, 손자손녀의 재롱을 보고 싶은 문 씨의 소원은 소박했다. 문 씨는 “그저 이번 경기 때 국가대표 옷을 입고 있는 사진은 자식들에게 한 장 보내주고 싶다”고 말했다. 훗날 자녀들을 만나게 되더라도 ‘나는 이렇게 잘 살았다’라고 말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국가대표 문광식의 모습은 오는 5월 11일, 서울 올림픽공원 내 우리금융아트홀 올림픽역도경기장에서 열리는 역도 남자 67.5kg급 경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차은희 기자  cidmsl@bok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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