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남자형제보다 학교 성적이 좋았음에도 '여자는 국민학교만 나오면 되지', '네오빠가 잘돼야 우리 집안이 일어 선다'등 비장한 교리(?)가 오랫동안 세뇌되었다. 마침내 국민학교 졸업이후 조그만 보따리가 안겨지고 영등포를 향하는 완행열차에 그 가련한 몸이 실려져 어린 소녀의 신앙적 고행은 시작되었다. 구로공단의 가발공장, 섬유공장. 어린 소녀의 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번 돈으로 이제 정신 차리고 열심히 공부할 우리 오빠를 기대하며, 그 오빠가 대학만 졸업만 하면 내 고생도 끝이라는 순진한 신앙으로 졸음을 쫓아가며 잔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산성동복지회관 이계존 관장(수원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60년대 산업화가 본격화된 이래 자본가의 무한정 착취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여공(女工)들은 남자형제가 보상해줄 복된 가나안(?)을 기약하며 모진 근로조건도 희망적 연단으로 감내하였다. 내 기억에 자본가의 착취에 대한 여공의 절규가 시작된 것이 70년대 말(YH사건 등)이었으니 거의 이십여년 가량 이들은 당연한 목소리마저도 속으로 삼키며, 그저 묵묵히 일만하는 산업역군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의 희생에 기생하여 그 잘난 메시아(남자형제)들도 저 위대한 우골탑을 거친 후 산업사회의 중견일꾼이 됨으로써 이후 우리의 산업화는 더욱 가속될 수 있었다.

최근 산업화의 주역으로 P모씨가 유력하게 논의된다. 그러나 난 이런 논의의 전개에 반대한다. 우리의 산업화는 특정인의 영도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수많은 여공(女工)들의 슬픈 자기희생에서 비롯하여 우리의 산업화가 가능했음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21세기에 들어서며 지식기반산업이 새로운 산업 주류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는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하여, 정보화 기초 투자가 빈약하고 지식기반사회란 그저 가능성만으로 언급되었을 뿐이다. 대다수 서구 열강이 지식기반사회에 대비하기 위해 정보화에 주력하던 그 즈음, 우리는 그저 어떻게 하면 국가 위난을 극복할까 하는 기본 생존의 모색에 여념이 없었다.

이 시기에 우리의 무식한(?) 엄마들이 무모한 투자를 했다. 사실 컴퓨터라곤 '컴'자도 모르는 그 엄마들이 자기 아이가 정보화 사회에서 소외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남편 월급보다 훨씬 더 비싼 고가의 컴퓨터를 과감하게 사주었다. 게다가 한가하게 채팅만 할 뿐인데도 꼬박꼬박 월정액을 내가며 전용선도 깔아주었다. 허리띠를 졸라매던 상황에서 고작 오락이나 하고 아님 한가한 잡담에나 쓰일 컴퓨터의 구입 그리고 전용선의 설치는 그 효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한심한 투자였던 것이다.
당시 서구 열강이 정보화시대에 요구되는 인프라 구축에 수많은 예산을 쏟아 부었음에도 그 진척이 부진하였던 반면, 우리는 별다른 노력도 없이 이 무식한 엄마들의 무모한 투자로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선 정보 인프라를 구축하였으니, 이후 정보화의 진전에 의해 상상 이상의 성과가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었다. 디지털 관련 제품, 인터넷 산업, 심지어 한류까지도.

산업화 시기 남자 형제를 위한 가족 부흥의 헌신이 다소 변모하여 내 자식의 교육에 대한 무한정 투자로 이어졌는데, 특히 시대를 선도하는 혜안까지 겸비하여, 우리는 지식정보화의 선도주자가 될 수 있었고 그 어렵다는 IMF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감한 투자로 정보화의 초석을 다진 이들에게 과연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졌을까? 유명 전자회사에서 최신형 휴대폰을 공짜로 제공하고, 유명 사이트에서 특별회원으로 우대하고 또 최신 한국영화를 무료 관람케 하는 등 여러 가지를 기대해 볼만도 하지만 도통 그런 얘기는 들려오지 않는다. 전혀 보상이 없지만 그렇다고 볼멘소리 마저 없었던 우리 엄마들 무한정 퍼주기였을 뿐이다.

근래 우리 사회의 최대 위기는 도덕성의 상실이다. 정치와 경제에 대해선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교원임용에 거액의 돈이 오고가는 교육현장, 취직을 미끼로 돈을 거래하는 노동현장, 친인척에게 수장자리를 양위하는 종교현장 등등. 비록 일부일지라도 도덕성이 강조되는 곳에서 백년대계를 책임지지 못하고, 다수의 권익을 지켜내지 못하고, 신앙적 양심으로 일관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안에 분명 양심과 도덕의 소리는 있지만 그 소리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자본과 권력에 매여 자기 안의 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도덕적 불감증은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이다. 그러나 이전 산업화 과정에서 여공(女工)들의 헌신 그리고 정보화 사회 및 IMF 극복과정에서의 모성애 등을 반추할 때, 그 과제의 극복이 비록 어렵겠지만 불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자신한다. 왜냐하면 자본과 권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우리 여성들이 또 한번 우리 안의 소리로서 우리를 정결케 해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미 이러한 소리는 여기저기에서 들려오고 있어 매우 고무적이기도 하다.

사회복지 현장에서도 우리 안의 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질 것을 기대한다. 사실 사회복지 전문직 종사자들은 힘든 근무환경 그리고 열등한 처우에 힘들어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우리 모두의 ‘우리 됨’을 위해 누군가의 삶의 질을 위해 묵묵히 매진하여 왔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사회복지 전문직의 모습은 이전 산업화 과정에서 여공이 가졌던 ‘우리 모두를 위한 헌신적 배려’ 그리고 IMF 국가위기 극복 과정에서 엄마가 지녔던 ‘보상을 생각지 않는 무한정 투자’ 등과 결코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또한 사회복지는 우리 안의 진정한 소리가 드러남이며 그에 따른 실천이기에 마침내 우리 사회의 도덕적 재무장에도 일정 기여를 하여왔던 것이다.
과거 우리사회가 직면했던 여러 위기를 여성의 힘에 의해 극복해 왔듯이 지금 우리가 직면한 도덕성 상실의 위기도 배려와 사랑을 본질로 하는 여성적 사회복지가 더욱 활성화되어 극복해 나갈 수 있음은 결코 나의 자만은 아닐 것이다.

 

 

 

 

 

 

서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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