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장’ 고흥곤 씨는 부단한 노력과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전통 현악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

 ‘땅따다당∼’
청아하고 맑은 가야금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마치 한 마리의 학이 너울너울 춤을 추는 우아한 자태를 떠올리게 한다. 그 단아한 가락이 전하는 파장으로 가슴속에 동그란 물결이 일어나는 듯하다. 잔잔한 떨림처럼.      
맑고 우아한 음색을 간직한 가야금을 만드는 고흥곤(53,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씨. 그의 손끝을 거치면 심금을 울리는 천상의 소리가 탄생한다. 그는 가야금 뿐 아니라 거문고, 아쟁, 양금 등 전통 현악기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고 있는 장인이다. 언제나 악기 한 대를 만들더라도 그 안에 정성과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 붓고 있다.
   

직접 만든 악기 소리 들으려 연주회도 참석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고흥곤국악기연구원. 고흥곤 씨가 가야금에 쓰일 명주실을 꼰다. 그는 언제나 국악기를 만드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항상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그렇게 각고의 노력 끝에 1년 동안 만드는 국악기는 20∼30대 정도. 유일하게 일찍 손을 터는 날은 국악 연주회가 있을 때다. 그가 만든 국악기로 연주하는 곳을 찾아가는 일에도 열심이다. 이런 노력 때문인지 그의 악기를 사용하는 국악가들의 칭찬이 자자하다.
그는 종종 연주회에 찾아가 연주자들과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이 또한 국악기를 만드는 작업의 연속이다. 개인에게 맞는 악기를 만들기 위한 노력 중 하나인 것이다. 연주자들의 손의 힘이나 성격 등을 고려해 그들에게 맞는 악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의 세심한 배려인 셈이다.
“내가 만든 악기로 연주를 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즐거워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뻐요. 연주회가 끝날 무렵 관람객들의 박수 소리를 들을 때면 제가 더 뿌듯하고 감격스러워요. 그러다 보니 1년에만 해도 연주회를 수십번씩 찾아가요. 거의 제가 만든 악기로 하는 국악 연주회는 빠짐없이 가고 있어요. 연주를 많이 들어야지 좋은 악기를 만들 수 있거든요.”
안타까운 건 전통 국악기가 점점 외면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요즘에는 기계로 만든 악기들이 많이 나와 전통 국악기는 그나마도 더 설자리를 잃고 있는 실정이다. 전통 국악기의 경우 가격이 무척 비싸 수요도 많지 않다.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국악보다는 서양음악에 더 관심이 많고 좋아한다.
그가 국악기를 만드는 과정을 배울 때도 관심을 기울이고 배우려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수작업으로 모든 것을 하다 보니 거의 막노동이었던 터라 이 길에 뛰어드는 이들이 적었다. 실제 그때는 기계가 없어 일일이 대패질, 톱질 등 모든 과정을 해야 했단다.
게다가 국악기를 만드는 과정은 험난한 산과 같다. 재료 구입에서부터 대패질 등 200가지의 공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 하나의 과정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어느 하나의 과정이라도 잘못돼도 소리가 달라지기 일쑤다.   
“악기 한대를 만들기 위해서도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재료를 구입해서 삭히는 데만 해도 5∼10년 정도 걸려요. 그 과정을 지나 악기를 완성하는 데 적어도 한달 정도의 시간이 걸려요.”
재료를 구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요즘에는 울림통의 재료인 오동나무를 구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막상 재료를 구입해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처음 나무 1000장을 구입한다고 해도 10년 정도를 삭히고 나면 뒤틀리거나 갈라져서 못쓰는 경우가 많아 구입한 것 중 70∼80% 정도만 사용할 수 있다.
“국악기를 만드는 재료도 외국산이 아닌 우리 것을 사용하고 있어요.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우리 정서에 딱 맞는 단아한 소리가 나거든요. 그러다 보니 재료 또한 수입산이 아닌 우리 것을 고집하고 있어요.”
악기제작 과정은 고도의 감각이 필요하다. 음향학자들이 그 소리를 분석해서 만들어도 똑같이 흉내낼 수 없을 정도다. 소름끼칠 정도로 섬세하고 감각적인 손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흥곤 씨 역시 이론적인 교육이 아닌 감각으로 터득한 것이다. 그렇게 익힌 감각으로 진정한 소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국악기의 소리 중 가장 좋은 건 맑고 투명한 음색을 가진 거예요. 여운이 길고 거의 물이나 새 등 자연에 가까운 소리가 훌륭한 음색이에요.”
일례로 가야금 연주를 하면 주위에서 시끄럽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만큼 국악기의 소리는 맑고 은은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가 악기 제조의 길에 발을 들여놓은 건 고 김광주 선생에 의해서다. 고 김광주 선생은 최초로 중요무형문화재 악기장으로 지정된 분이다. 그의 수제자로 국악기와 인연을 맺은 것이다. 전주 지역이 고향인 그는 전주시 완산구 태평동에 이웃해 살던 선생의 집에 자주 놀러갔다. 자연스럽게 친분이 쌓이면서 고등학교 졸업 후 선생의 권유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정악가야금인 법금을 잘 만들기로 유명하다. 가야금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정악가야금과 산조 가야금이 있다. 그 중 정악가야금은 궁중음악이나 풍류계통의 음악을 연주하던 현악기이다.
“정악가야금은 명주실을 꼬아서 만든 12줄의 현악기예요. 삼국사기에 의하면 가야국의 가실왕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가얏고’라고도 했어요. 통일 신라 때에 일본으로 전해졌는데 일본에서는 이것을 ‘신라금’이라 불렀다고 해요. 정악가야금은 손가락으로 밀거나 퉁겨 소리를 내요. 여민락, 평조회상 등의 대편성 관현합주곡과 영산회상, 천년만세, 보허사 등의 세악편성에 사용되었어요.” 
그는 사라져 가던 정악가야금의 보존 작업에 매진했던 것이다. 고문헌을 뒤지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는 등 피나는 노력 끝에 잃어버린 소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정악가야금을 만드는데 성공해 85년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그것을 출품해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그 후 90년에는 전수 조교로 지정되고 97년에 악기장이 된 것이다. 

고흥곤 씨의 섬세하고 감각적인 손길에 의해 탄생한 가야금.

“전통 국악기에 대한 관심과 애정 필요해요”
고흥곤 씨는 세상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묵묵히 전통을 이어가다 보니 고충이 많다. 한번은 대학교에서 국악기 제작과를 만들려고 했는데 무산된 적이 있다. 그에게 그 과정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들어왔지만 거절했다. 그 학과를 만들어도 졸업한 후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꼿꼿한 대나무처럼 한 길을 가는 고흥곤 씨. 그는 매번 국악기를 만들 때마다 ‘다음 번에는 더 좋은 것을 만들어야지’ 하는 각오를 하게 된단다.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항상 노력하는 모습을 잃지 않는 이 시대의 진정한 장인이다. 그래서 더욱 그의 모습에서 강인한 힘이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닐까.

이지현 기자  

<저작권자 © 복지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