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니까 같이 자자고 조르는 남자친구와, 그저 대화하는 것만으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여자친구. 결국 둘의 관계는 조용히 정리되든가 혹은 데이트 강간으로 치달아 끝장이 나고 맙니다.
중년 남성들이 바람을 피우는 이유 아세요? 여자가 필요해서라기 보단 친구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남성들은 이렇게 다 늙어서야 비로소 여자와 친구되는 법을 배웁니다.
남성들이 남성 또는 여성과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해, 여성들은 늘 이렇게 서툴고도 폭력적이라고 말해 왔다. 왜 일까. 성폭력 근절을 위한 남성 서포터즈 컨퍼런스에서 남성들이 자신의 관계 맺기 방식과 성에 대한 인식을 자신들의 입으로 낱낱이 털어놨다.

일상 언어와 포르노 속 폭력성 한몫

남성들이 관계 맺기에 서툴고 폭력적인 까닭은 이랬다. 남성들에게는 상대방(남성이나 여성 모두)에게 자신의 정서를 표현할 언어가 없었다. 우리도 억압 받아 왔기 때문에!ꡓ
남성들은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방식(언어)을 잘 모릅니다. 정서를 교류하는 어떤 교육도, 연습도 없었으니까요. 이 때문에 남성이 꿈꾸는 낭만적 사랑에서는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극단의 관계만이 존재합니다.

차우진(29, 대중음악 비평웹진 웨이브 편집장)씨는 남성들의 이런 언어 부재의 원인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어릴 때는 권위적인 아버지, 학창시절엔 폭력적 교사와 친구들, 더 커서는 상명하복의 군대회사 등의 조직으로부터 수직적 관계만을 배워온 남성이 정서적 친밀감을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회사원 김모 씨. 직장 상사를 모시고 1차, 2차 식사와 음주를 마친 뒤 원하지는 않지만 여성 접대부가 나오는 룸살롱으로 향한다. 상사들에게 접대부를 붙여준 뒤 몰래 빠져나와 혼자만 가는 재즈바에 들러 여성바텐더와 일대일의 은밀한 교감의 시간을 즐긴다.
남성들을 성폭력의 잠재적 가해자로 이끄는 데에는 소통과 교감의 언어 부재와 함께 일상적 언어와 포르노 속의 폭력성도 한몫을 한다.

남녀간 소통이 배제된 폭력적 팬터지인 포르노가 남성에겐 어릴 적 성교육 교사나 다름없습니다. 섹스보단 정서 교류를 주로 담은 하이틴로맨스를 읽으며 사랑을 꿈꿔온 여성들과 관계 맺기가 제대로 될 리가 없죠.

토론자로 나온 강김정임(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과정)씨는 남성의 포르노 문화를 남성성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관계 맺기에 서툰 남성들이 인터넷 포르노를 보고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자위행위를 하며 만족해야 하는 것은 일종의 남성성의 위기입니다.

강김 씨는 성폭력은 피해 여성이 죄의식을, 가해 남성이 피해의식을 갖는 매우 특이한 범죄이다. 성폭력 가해자의 피해의식과 여성 지위 향상에 따른 남성의 분노는 같은 기원을 갖는다. 수천 년 동안 남성의 당연한 권리, 역사와 문화의 일부였던 성폭력이 여성들의 치열한 저항으로 범죄가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현행 성폭력특별법을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권리 침해라고 주장하는 남성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성희롱을 처벌하면 직장 분위기가 경직된다,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아내는 뭔가 잘못을 했을 것 등이 대표적인 언설이다. 성폭력 가해자로 고소당한 남성이 억울한 또 다른 이유는, (남들도 다 하는데) 나만 걸렸다는 심리다. 가해자가 처벌받는 경우가 워낙 드물기 때문에, 처벌받는 가해자는 억울할 수밖에 없다. 남성 문화는 강간범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재수 없이 잡힌 남성이 남성의 위엄을 훼손한다고 본다.

여성에게는, 일상이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두들겨 맞고, 직장을 잃고, 강간당하고,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다. 하지만 피해자가 사건을 신고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현재 우리나라 성폭력 신고율은 2% 내외.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02년 접수된 성폭력 범죄는 1만 1580건이다. 한해 발생 건수는 약 100만 건 정도다는 것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여성이 신고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신고하면 더 큰 피해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를 보호하는데 더 적극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법 제정 이후 많은 개선 노력이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도 대다수 법 운용자들은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성의 시각에서 성폭력 사건을 처리한다고 지적했다.

2차 피해 두려워 가해자 신고 안 해

성폭력 가해자의 대부분이 평소에 알고 지내는 남성인 것도 여성들의 신고를 주저하게 만든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해 성폭력 상담사례를 분석한 결과, 가해자의 전체 19%가 직장상사였으며 그 뒤로 모르는 사람(12.3%), 데이트 상대(10.3%), 친아버지(8.1%) 등의 순이었다.

피해유형별로는 성폭력이 전체의 30%로 가장 많았고 그 뒤로 성추행(20.8%), 성매매(15.8%), 강간치상(9.7%) 순이었다. 피해장소는 피해자의 집이 28.4%로 가장 많았고 숙박업소(14.8%), 유흥업소(14.3%) 순이었고 가해자의 집과 직장도 각각 6.7%와 4.7%로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 피해연령으로는 미혼성인이 54.8%로 절반이상을 차지했으나 청소년과 기혼성인도 각각 27.6%, 11.4% 등으로 나타났고 어린이와 유아도 각각 3.5%와 2.4%에 달했다.

한편, 얼마 전 성 관계를 거부한 아내를 폭력으로 강제 추행한 남편에 대해 법원이 형법상 강제 추행 치상죄를 적용하여 유죄로 인정,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존중한 의미 있는 판결이 있었다.

부부간의 성폭력은 1970년 부부강간에 대한 대법원의 무죄 판결 이후 30년이 지난 이 시점까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폭력상담의 현장에서 아내 성폭력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으나, 아내에 대한 성폭력을 혼인관계에서의 성관계로 암묵적으로 묵인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번 판결은 부부간의 성폭력(아내 강간을 포함)이 범죄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하지만 강간의 부분에 있어서 형법상의 폭행협박 미비를 들어 무혐의 처분된 점은 역시 법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이미 아내 강간을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한 범죄행위로 인정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별거 명령을 받은 남편의 아내 강간사건에서 84년 뉴욕주 항소심은 혼인증명서가 아내 강간의 자격이 될 수 없으며, 기혼여성도 미혼여성과 같이 자신의 몸에 대한 신체 통제권을 갖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영국에서도 94년 부부 강간을 처음 인정했고, 독일에서도 97년 형법을 개정하면서 법률상 아내가 강간죄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처럼 명문화하지 않았지만 혼인이 실질적으로 파탄난 경우 아내에 대한 남편의 강간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단체들은 이번 판결이 부부간 성폭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현행 가정폭력방지법을 개정하는 데 힘을 실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이미경 소장은 때늦은 판결이지만, 결혼했다는 사실만으로 남편에 의한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성관계에 동의한 것은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사법부에서 비로소 인정한 것이다. 이번 판결은 부부관계의 사생활 보호라는 명목으로 남편에게 아내 성폭력 면허를 줬던 그 동안의 법 해석과 관행을 바로잡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여성의전화연합도 올 들어 지금까지 여성의 전화에서 상담한 사례 가운데 남편이 아내를 때릴 때 강제적 성행위를 동반한 경우가 11.4%였고, 구타 직후 성관계를 요구한 경우도 12.8%에 이르렀다며 이번 판결은 동의하지 않은 부부간 성관계가 명백한 성폭력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판례라고 밝혔다.

신연숙 인권국장은 현재 여성단체들이 추진하고 있는 가정폭력방지법 개정안은 성적학대를 처벌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며 이번 판결이 아내에 대한 성폭력을 처벌하고 방지할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부부간에 일어나는 폭력적인 행위의 근간에는 여성에 대한 소유의식을 갖고 있는 남성 위주의 사고가 자리잡고 있다. 무엇보다 부부간의 폭력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인지가 필요하다. 

한국여성민우회 가족과 성상담소 유경희 소장은 가족 내의 가부장적인 사고는 절대 평등한 부부관계를 가져올 수 없다. 폭력 없는 부부관계를 위해서는 아내를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하는 성 평등한 사고가 전제되어야 한다. 남편이 지배하는 가부장적 구조의 성역할이 완전히 분리된 가정 내에서는 사소한 문제마저 폭력으로 이어진다. 성차별적 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경제력도 나누고 가사분담도 가능하며 부부관계 또한 의미 있는 것이다ꡓ고 말했다.

부부간에 갈등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갈등상황에서 신뢰와 애써 풀어가려는 의지가 있을 때, 서로의 욕구에 대해 이해하고자 할 때 부부 각각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서도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여성계에서는 법안 개정을 위한 논의를 지속하고 있다. 성폭력특별법의 개정안에 아내 강간 등 부부간의 성폭력 행위에 대한 규정을 내용으로 담고 있으며, 피해자 보호 및 권리에 관한 조항을 신설하는 등 보완을 통해 국회에 제출하고자 법안 개정 작업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정부, 가해자 처벌 의지 더욱 강해야

성폭력은 도처에서 일어나지만 숨겨져 있는 범죄다. 가해자를 처벌하는 법적 근거가 있지만 당사자들이 나서서 내가 피해자라고 외치는 순간, 또 다른 의심과 편견의 눈길이 쏠리게 마련이다.
왜 너는 그처럼 부주의했느냐, 조심하지 않았느냐라는 질책에, 혹시 너도 그 상황을 즐긴 건 아니냐는 어처구니 없는 의혹까지 따라붙는다.

때문에 피해자들은 사건 뒤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며 대인관계의 어려움뿐 아니라 필요 이상의 경계심과 두려움, 집중력 장애, 무력감을 겪게 되는 것이다. 성폭력이 미치는 영향과 성폭력 관련 법에 대한 사회 차원의 지속적인 홍보와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상처는, 사회가 성폭력 생존자를 존중하느냐, 가해자 처벌 의지가 있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국가가 성폭력 가해에 일조하고 있다는 여성들의 절망과 불신을 잠재울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석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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