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8일. 칠판 한 귀퉁이에 큼지막하게 쓰여진 숫자.

수능 몇 일 남은 거 누가 모르나. 아무리 경각심을 준다지만 뭐 저렇게까지 꼭 써 놔야 하나. 차라리 눈에 안보이면 그나마도 덤덤히 지낼 수 있으련만…. 은영(19;가명)이는 100일 전부터 매일 하루씩 줄어드는 칠판의 커다란 숫자를 보는 게 너무 끔찍했다. 이제 어느 정도 눈에 익어 적응될 만할 때도 됐지만, 은영이에게 칠판의 숫자는 여전히 큰 압박이었다. 처음 숫자를 적어 놨을 때에는 심리적 부담감에 악몽까지 꿨을 정도다.

꿈에서 교실에 앉아 있는데, 하루는 수험생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시간개념이 바뀌었다면서, 칠판의 숫자들이 하루에 5번씩 달라지는 거예요. 그런데 꿈에서도 아직도 안 본 문제집들이 가득한데…라는 걱정에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이제까지 고생했는데 수능 망치면 어쩌나 싶어서요. 그때 꿈이 너무 생생해서 아직도 가끔씩 칠판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려요.

비단 입시문제로 압박감을 당하고 있는 아이는 은영이 뿐만이 아니다. 우리사회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학벌주의로 인해 수험생 대부분이 크고 작은 고충을 겪고 있다. 심리적 부담감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아이도 있는 한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수험생도 많아졌다. 인생의 준비단계로 밝은 꿈을 꿔야할 청소년기. 하지만 과열된 입시제도로 아이들은 지쳐가고 있었다. 
 
빽빽한 수업과 자율학습, 주말엔 학원까지

형,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어째 살이 더 빠진 것 같네.
수능 얼마 안 남았잖아. 죽을 맛이다. 중간고사도 끝나고 답답해서 머리 좀 식히려고 들렀어. 잘 보든 못 보든 어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고3 수험생인 강만석 군. 모처럼만에 문화센터에 얼굴을 내밀었다. 성격이 활발해 지난해까지만 해도 다양한 청소년활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지금은 공부 외에 다른 것은 돌아볼 정신이 없다. 그 역시 과열된 입시제도에 불만이 크지만, 부모님 기대도 있고, 내심 가고싶은 대학도 있기 때문에 다른 고3들과 같은 배를 탔다. 올해 2월부터는 그동안 해왔던 활동을 대부분 접었다.

현재 입시체제를 보면 학생들의 사회활동은 다 시간낭비로 보고 있어요. 공부 외는 인정을 안 해요. 그러다 보니 학생들도 입시문제에만 온 신경이 팔려 있어요. 사고 폭이 짧고 이기적이라는 이유도 다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감성을 키운다던가, 자기를 발견하는 등 다른 것에 곁눈질 할 시간적, 심적 여유를 전혀 안 주잖아요.

인천에 있는 모 고등학교 3학년인 혜진(가명)이. 그의 하루를 보면 꼭 철인을 떠올리게 할만큼 빡빡한 일정이다. 매일 아침 5시면 떠지지도 않는 눈을 뜨느라 곤욕을 치루는 혜진이. 최근 0교시 없애기 운동이 한 TV에 보도되면서 이 학교에서는 0교시를 없앴다. 대신 1교시 수업이 다른 학교에 비해 일찍 시작된다. 그 덕에 7시까지 등교를 해야한다.

정규수업은 6교시까지 예요. 그런데 요즘은 진도를 다 나가서  수업은 안하고 대부분 자습을 해요. 6교시 이후 두 시간은 특기적성시간인데, 국영수과를 중심으로 과목을 선택해서 수업을 들어요. 거의 자율학습의 연장선이죠.

저녁을 먹고 난 뒤 10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이 있다. 전에는 10시까지 의무이고 11시까지는 선택이었는데, 최근 인천교육청 방침상 10시까지 하고 있다. 그렇다고 조금 더 편해진 것은 아니다. 학교가 끝나면 바로 독서실로 향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독서실에서 보통 새벽 1시30분에서 2시 정도까지 공부를 하다 가요. 워낙 늦게까지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다보니 독서실에서 집까지 차량을 운행해 줘요.

그렇게 집에 가면 혜진이는 파김치가 되기 일쑤다. 고3 초기에는 너무 힘들어서 수업시간에 많이 졸았다. 반 친구들 중에는 자습시간 중 한 시간 정도는 아예 엎드려서 잘 정도다.   

그나마 주말에는 조금 나을까. 하지만 고3에게는 주말도 자유롭지 않다. 토요일에도 자율학습은 5시까지 이어진다. 물론 선택이긴 하지만, 자율학습을 하지 않은 경우 대부분 학원에 다닌다. 혜진이 역시 학원을 택했다. 집이 인천이지만, 서울 노량진까지 다닌다. 잘 가르친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한 반에 약 3분의 2 정도가 학원에 다녀요. 어떤 친구들은 토요일에 학원에 갔다가 시간이 안 나니까 새벽과외까지 한다고 해요. 주변에서 이런 얘기 들으면 뒤쳐지는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서글퍼져요.

혜진이가 가장 기다리는 시간은 바로 토요일 밤. 일주일 중 이때가 가장 여유롭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는 일주일 내내 밀어뒀던 여유를 잠시 꺼낸다. 

평소에는 시간도 없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교실에서 자습을 하는데, 다른 친구들이 내가 모르는 문제집을 보고 있으면 괜히 불안해져요. 왠지 나도 저걸 안보면 성적이 떨어질 것 같거든요. 친구들하고 떠들고 잡담한 지가 언제인지도 몰라요. 친한 애들 몇몇 빼고는 정보도 잘 안 나누고요. 같이 공부하는 친구가 아니라 적이라는 느낌이 종종 들어요. 몸이 힘든 것보다 이렇게 일상에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전혀 없어서 더 힘든 것 같아요.

설사, 복통, 강박증 등 호소하는 학생 많아

이런 일상은 비단 혜진이 뿐만이 아니다. 고3이라는 한 배를 탄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겪고 있는 고충이다. 그나마 혜진이는 고3 이니까 라는 심정으로 무덤덤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기대치가 너무 높거나, 학업에 자신이 없다는 부담감에 짓눌려 주저앉는 아이들도 제법 많았다.

혜진 양은 3학년이 되면 온갖 병에 다 걸려요. 없던 병도 만들어 내는 게 바로 고3 딱지인 것 같아요. 고3증후군도 있어요. 일단 시간만 나면 자는 습관이 생겨요. 쉬는 시간에 4~5명만 빼고는 다 자요. 피부과에 다니는 친구, 정신과 치료를 받는 친구 등 병원 치료를 받는 아이들도 많고요라고 말한다.

실제 동서심리상담연구소에는 입시에 대한 압박감으로 시험 불안증을 겪는 학생들이 상담을 받기 위해 꽤 많이 찾았다.

동서심리 상담연구소 신혜린 상담교수는 시험기간만 되면 부담이 돼서 복통, 설사, 식은땀을 흘리고 몇 일 전부터 불면증에 시달린다고 호소하는 학생이 꽤 많아요. 그러다 보니 시험 전날에는 밤을 꼴딱 세고 정작 시험 때는 힘들어서 망치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상담을 받으러 온 학생 중에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학생도 있었다. 한 고3 학생은 숫자 4에 집착을 하는 경우였다.

지나가다 숫자 4가 써 있는 차를 보면 그 날 내내 불안해한단다. 특히 4시 44분이 되면 초조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특이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고.
물론 전에도 조금씩 가지고 있던 행동이지만, 고3이 되니까 심리적인 영향으로 더 심한 증상을 보이는 거예요. 고등학생의 경우, 자기정체성을 한참 고민하는 시기인데, 입시 때문에 나를 발견하거나 마음을 풀 기회가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우울증으로 발전하거나 무기력해지기도 하고. 자살까지도 시도하는 거예요.

그는 또한 입시자체가 나쁜 거라고는 생각 안하지만 우리사회에서는 극단적인 경쟁으로 붙여 놓잖아요. 대학에 못 가면 절망이다, 끝이다라고 생각하게끔 만들고,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인정을 못 받는다고 여기게 하는 것 같아요. 학생들을 생각한다면 학생중심에서 바람직한 입시문화를 만들어 가야 할 것 같아요라고 주장한다.  

청소년의회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동초아. 고등학교 2때부터 청소년문제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참여했다. 지난해 가을에 의장에 선출됐을 정도다. 고3이라 활동하기 힘들었지만 의장이기 때문에 올해 9월까지는 나름대로 시간을 쪼갰다. 

아무리 수험생이지만, 다양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교에만 있다 보면 정말 사고의 폭이 좁아져요. 청소년들이 여러 가지 활동을 해보면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더 알 수 있거든요. 그러다 보면 자신이 정말 어떤 일에 재능이 있는지, 대학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 욕구들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겨요.

현재 그는 이과 계열이다. 그러다 보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학진학을 공대쪽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서 사회문제에 관심도 있고, 적성에도 잘 맞는 것 같아 문과로 전과했다. 진학방향도 언론방송분야 로 바꿨다.

청량고등학교 이방희 군 역시 공부위주의 입시제도는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1차 수시에 붙어 그나마 지금은 여유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그 역시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끔찍한 홍역을 겪었다. 고3 들어서 체중이 10kg이나 빠졌을 정도로 말이다.

청소년 시기가 제일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이 시기에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동아리도 공부위주로 하거나 아니면 학교에서 폐지시키기 일쑤거든요. 공부 빼고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렇게 죽자고 공부해서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면 좋은데, 우리나라는 일단 대학만 붙고 나면 끝이다는 생각이 완연하게 퍼져 있잖아요. 너무 비효율적이에요. 외국처럼 배우고 싶은 것을 어려서부터 배우게 하고, 소질을 살려서 특별활동도 할 수 있는 그런 입시시스템이 됐으면 좋겠어요.

대학만이 전부 아니다!

중화고 3학년인 노수현 군. 직업반에 재학 중으로 제빵을 전공하고 있다. 그 역시 처음에는 대학에 진학하려고 했다. 물론 나름대로 욕심도 있었지만, 어떤 일이든 대학 나와야 취업도 잘되고, 내세울 간판도 생긴다는 주위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내신관리며 관련 학과가 있는 대학도 열심히 찾았다. 하지만 기술을 배우면서 공부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달 전까지만 해도 이런 저런 고민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을 정도다. 그러다 하루는 문득 대학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빵을 만드는 기술이에요. 그런데 대학에 가면 이론을 중심으로 배우더라고요. 물론 이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내가 빵을 잘 만드는 기술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일단은 취업을 해서 실전에도 임해보고 돈을 모아서 유학을 가려고 해요.

마음을 그렇게 먹고 나니까 한결 일상이 즐거워졌다. 그동안 공부하랴 제빵기술 배우랴 지쳤던 몸과 마음의 피로도 절로 스스르 풀리는 것 같았다.

대학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하지만, 꼭 대학에 목맬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굳이 대학을 진학하지 않아도 나한테 필요한 것, 나의 재능에 따라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환경이면 좋은데 아직은 그렇지 않아서 안타까워요. 조금씩 이런 환경으로 변했으면 좋겠어요.

일 년만 죽은 듯 꾹 참고 견뎌라. 그러면 인생이 달라질 것이다! 고3들이 되면 누구나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다. 우리사회에서 경쟁력 있는 사람으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로 치기에는 청소년들에게 너무도 과중한 압박이다. 게다가 지옥같은 일년을 보내고 해방감에 놀기 바쁜 대학생들을 볼 때면 고등학생들은 이런 입시제도가 과연 무슨 의미일까라는 회의감까지 들게 한다.
인생에 있어 뿌리를 다지는 귀한 시기인 청소년기. 그만큼 지식과 더불어 마음 소양까지 커나갈 수 있는 교육환경이 중요하다.

과열된 입시제도에서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바른 교육을 펴가려는 사회적 합의가 절실히 필요할 때이다.

김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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