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도입된 산업연수생제도를 시작으로 지난 10년간 40만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우리 이웃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고 있다. 사진은 외국인 노동

거리마다 활기가 넘쳐난다.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마무리하고 오는 해를 기대하는 탓일까. 사람들의 얼굴에 기대와 설레임이 가득하다. 한해를 보내는 이런 마음이 어디 얼굴색이 다르다고, 언어가 다르다고 틀릴까. 고국을 떠나 ‘코리아 드림’의 꿈을 안고 온 이들. 저마다 낯선 이국땅에 터를 잡고 미래를 설계해 나가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역시 우리와 같은 마음이다. 이들의 연말 풍경은 어떨까.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눈을 봤어요. 맞으면 아플 줄 알았다니까요.”

순간 온 집안은 웃음바다가 됐다. 눈이 없는 나라 필리핀에서 태어나고 자란 레온 씨. 한국에 온 지 벌써 13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춥디 추운 한국의 겨울은 그에게 힘들기만 하다. 강제단속이 있은 뒤로 더욱 스산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도 그는 한국을 떠날 수 없다. 꿈을 이루려면 아직 몇 년이나 더 걸리기 때문이란다. 비단 레온 씨만이 아니다. 아직도 못 이룬 꿈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이들이 시흥시 은행동 일대 필리핀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만 족히 40명이나 된다.

“우리 이웃은 국경 없어요”

매주 토요일 오후가 되면 시흥시 은행동 일대 필리핀 노동자 마을이 시끌벅적해진다. 타국 땅에서 고충을 느끼며 살아오는 필리핀인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날이기 때문이다.

“자주 모이는데 주말엔 거의 새벽까지 함께해요.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엔 서로 챙겨주고요. 어려운 친구가 있으면 조금씩 돈을 거둬서 도와줘요. 필리핀에 가야 하면 보태주고, 또 다음에 도움받고요.”

한껏 솜씨를 발휘 한 앨리(가명)씨가 국적불명의 음식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다섯 평 남짓한 방안에 열 명이 넘는 인원이 앉아 음식을 먹다 보니 정신이 없다. 이들은 마을을 이루고 살다 보니 자연스레 모이게 됐고, 또 같은 나라 같은 처지다 보니 서로 돕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모두 하나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비단 이곳만이 아니다.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일대는 중국 조선족 출신들이 자리 잡고 있고, 러시아인들은 을지로 한 모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은 주민의 70%가 중국 국적일 정도로 집단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공업단지, 제조업체 등 일자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보금자리를 마련해 제2의 고향을 이루고 있었다. 이처럼 한국에 거주하는 상당수 외국인 노동자들이 국경 없는 마을을 이루며 우리 곁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한국 땅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마을이 있고, 집이 있고, 친구가 있어도 불법체류자 신세는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국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바깥 출입이 많지도 않았는데, 그나마 강제 단속으로 몸을 숨기는 노동자들이 더 늘었다.

인천 만수동에서 만난 토야 씨. 6년 전 몽골에서 한국으로 건너 한국 땅을 밟았지만, 지금은 불법체류 신세라 일자리마저 마음 놓고 구할 수 없게 됐다.

토야 씨는 “비자가 없어 지금 불법 체류 중이에요. 단속에 걸리면 바로 한국을 떠나야 해서  불안해요. 아직 한국에서 못다 이룬 일이 많으니까요. 솔직히 내 나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있죠. 몽골에 있는 아들도 보고 싶고, 한국 온 지 6년이 넘었는데, 한 번도 못가 봤으니까요.”라며 하소연했다.

그런데 토야 씨처럼 비자가 없는 데도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가 18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93년 도입된 산업연수생제도를 시작으로 근 10년 동안 40만 명이라는 외국노동자가 한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15일부터 불법체류자에게 대대적인 강제 출국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에 항의 한 외국인 노동자들도 있다. 지난해 150여 명이 명동성당에 천막을 치고, 철야농성에 들어간것. 그렇게 천막에서 보낸 1년동안 대대적인 단속에 뿔뿔이 흩어지고 지금은 30여명만 남아 외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 불법체류 신세라 마땅히 돈을 벌 수 조차 없는 그들. 시민단체에서 제공하는 먹거리가 전부인 그들에게 엉성한 천막에서 맞이해야 하는 한국의 겨울은 춥기만 하다. 이들이 원하는 건 세간의 관심도 동정도 아니다. 강제출국을 중단하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는 것뿐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입장은 강경하다.

“꿈의 땅, 한국 떠나기엔 일러요”

안산역과 마주보는 대로를 건너 골목으로 직진하다 보면 외국인 마을이 나온다. 경기도 전체인구의 6%에 해당한다는 이곳에는 6만 5천여 명의 다국적 외국인들이 밀집해 살고 있다. 그런데 이곳도 강제단속의 풍랑은 피해가지 못한 듯 했다.

“사람이요? 지금 대부분 공장 나갔지요. 단속 있은 후에 자기 나라로 많이 돌아갔어요. 그리고 단속 피해 안 나오는 사람도 많아요. 이 일대가 모두 중국, 인도, 파키스탄 사람들이 사는 집이에요. 그중에서도 조선족이 제일 많아요.”

중국식품점에서 직원으로 일한다는 조선여(26)씨. 언니네 가족과 함께 한국 땅에 발을 들여 놓은 지 1년 째 됐다는 조선족이다. 원곡동 사정을 빤히 꿰뚫고 있는 그의 말처럼 단속의 여파가 불어 닥친 원곡동 거리는 한겨울바람만큼이나 휑했다. 하지만 아직 남아서 못다 이룬 꿈을 향해 전진하는 이들도 꽤 된다.

1997년 산업연수생으로 베트남에서 온 선씨. 집으로 가야 하는 시기가 지났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꿈을 완성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단다.

“한국에서 돈 모아서 작년에 베트남에다 집을 지었어요. 집을 지었으니 이제 가게를 살 돈을 모아야 해요. 아직 몇 년간은 한국에서 고생해야지요. 가게 마련할 돈하고, 가서 얼마간 생활할 돈만 모으게 되면 떠날 생각이에요. 한국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는 이곳에서 꿈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 한국말도 잘하고, 일하는 공장에서 직책을 맡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월급도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보다 훨씬 나아졌다. 꿈을 향해 서서히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같이 일하는 동료 중에 한 사람은 강제 출국 당했어요. 얼마 전 통화를 했는데, 베트남과 한국에서 하루 버는 돈의 차이가 많이 나서 일할 맛이 안 난데요. 다시 한국으로 오고 싶다고 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한국에 온 지 3년째 된 신디(필리핀)씨는 “필리핀 간호사 월급이 한달에 한 20만원도 안돼요. 그리고 일도 없어요. 한국엔 일이 많잖아요. 필리핀엔 지금 당장은 가고 싶지 않고 여기서 일하며 살고 싶어요. 불법체류자가 되더라도 그때까진 한국에 머물고 싶어요”라며 일할 수 있는 한국이 좋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간호학과를 전공하고, 병원에서 근무하던 그가 제조업체에서 하루 12시간, 월 70만원의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월세를 내고, 고국에 돈을 보내고 나면 생활하기도 빠듯하고, 똑같이 일해도 한국 사람보다 임금은 적게 받지만쉽게 떠날 수 없는건 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라고.
꼭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기에 강제단속은 그들에게 두려움의 존재가 아닌 듯 했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온 이들. 이들을 위해 우리 정부에서는 지난 8월부터 외국인 고용허가제를 실시했다. 제도상 올해 배정된 외국인 근로자는 제조업 1만7천, 건설업 6천, 농·축산업 2천명으로 총 2만5천명이다. 그런데 업종별 불균형으로 계약 인원 6천528명 가운데 제조업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농·축산업은 1백 명이 채 안된다. 게다가 건설업은 단 한명도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사랑마을 교회 김철수 목사는 “제도가 있다고 해도 절차가 복잡한데다 기존에 있던 외국인들을 내보내면 당장 처음부터 일을 가르쳐야 하잖아요. 그렇다면 기업인 입장에서는 불법체류자라고 하더라도 오랜 기간 숙련된 외국인이 일하는 게 훨씬 낫죠. 일부 업체에서는 벌금을 감행하면서까지 불법체류자를 고용하기도 해요”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퇴직금 대체 명목인 출국만기보험과 임금체불을 대비해 보증보험에 가입해야 하는 등 고용자의 의무강화와 외국인 고용인원 제한도 한몫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들이 근무하는 제조업체의 경우 소규모로 운영되는 영세업체가 많은데 외국인 고용 쿼터제도 즉, 일정비율 이상의 외국인을 고용하게 하는 제도의 실시는 현실에 불합리하다는 여론이 분분하다. 말하자면 고용 쿼터제에 따라 내국인 근로자가 10명 이하인 사업장은 내국인의 50%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고용할 수 있지만, 10명이 넘으면 고용 비율이 점점 줄어든다. 즉, 11명 이상, 50명 이하는 10명 이내로, 51명 이상 100명 이하는 15명 이내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국인이 꺼려하는 영세 제조업체에서 이를 맞추기란 쉽지 않다. 결국 불법체류자를 단속한다던 정부의 방침이 오히려 더 늘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나오고 있을 정도다. 때문에 현행 시행되고 있는 고용허가제의 올바른 정착과 더불어 효율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내년에는 떳떳하게 일할까
아무리 매서운 강제단속의 바람이 불어와도 쉽게 발을 뗄 수 없는 나라 한국. 낯선 땅에서 국경 없는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 외국인 노동자들. 그들은 우리 땅에서 한국을 배우고,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꿈이 있기에, 그리고 희망이 있기에 그들의 국경 없는 마을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또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바람처럼 새해에는 강제단속의 불안감을 벗어나 떳떳하게 일하고, 더불어 원하는 ‘코리아 드림’의 꿈들이 이루어지길 소망해 본다.

표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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