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추워!”
한 겨울 온 몸에 무섭게 찾아든 추위는 아무리 두터운 솜이불도 소용없다. 언 듯 고개를 쏙 내미니 엄마가 환하게 웃으신다. 달달 떨면서도 찬바람 들이치는 휑한 방에서 떠날 줄을 모르던 우리들. 흙벽돌로 빚은 집에서 십년살이를 한 엄마와 우리 남매는 옥상 있는 새 집에 공사 마감도 전에 자러왔다.
“불 피울까?”
엄마가 슬그머니 일어나신다. 그러면서 봉긋하게 솟아오른 이불 사이가 서늘해져 또 한번 몸서리쳐졌다.
‘끼익’, 뒤안 문 여셨구나. ‘덜컹’, 연탄보일러 두껑 여네. ‘치익’, 번개탄 불 붙네.
‘호오’, 옆에 누운 누나 입김.
언 귀로 아련한 소리 들으며 연탄불 붙이는 엄마 모습과 따뜻해질 방바닥을 그리며 은근하게 지펴지는 기분 좋은 마음이란. 
“아~ 따뜻해.”
동 파이프 놓인 자리 따라 금세 온기가 돈다. 새 집에 누운 첫날 밤, 작은 연탄불로 인해  우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졌다. 그렇게 우리 남매는 엄마 품에 서로 더 가까이 붙으려 토닥거리다 잠이 들었다.

“아이 참! 불 왜 켰어?”
야간자습을 마치고 자취방에 오면 늘 자정이 넘었다. 잠이 아쉬워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누웠는데 누나가 불을 켰다. 고3인 누나 피로야 나와는 비교할 바 아닐 텐데. 밥, 청소, 빨래까지 맡기면서, 새벽에 전등 켠 걸 짜증냈다. 뒤척이다 정신이 나니 바닥이 썰렁하다. 그때서야 연탄불이 꺼졌나 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는 밖에서 불 가느라 분주하다. 문득 얼굴 찌푸리는 것이 미안하고 염치없어졌다.
이렇게 새벽에 전등불을 본 날은 매번 수업시간에 졸기 일쑤지만, 연탄 갈고 젖은 수건 널어놓은 누나가 있으니 감기는 걱정 없다. 내심 고마운 마음이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위치 내리고 눈 감으니, 아쉬운 만큼 달콤한 게 잠이다.

 철암에 간다하니 부모님 걱정이 크다.
“발걸음 내딛을 때 마다 석탄가루 푹푹 날리는 곳일 텐데 진폐증 걸리면 어쩌려느냐.”
“네 할아버지가 거기서 탄 캐다가 규폐로 돌아가셨다.”
“자취 하면서 연탄가스를 지겹도록 마신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광산촌 가는지.”
어디 내 부모 마음만 그럴까. 세상 모든 부모 마음이 하나 일 테지.
5월 15일 스승의 날. 세상을 스승 삼겠다 다짐하고 철암 역에 내렸다. 대합실에 커다란 폐석이 마중 하듯 앉아 있었다. 한 발 다가서니 오돌토돌한 표면이 마치 짐승 털을 조각한 듯 하고, 한발 물러서니 웅크린 모양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 같다.
‘내가 눈을 떴나? 감았나?’
그믐밤 돌구지 언덕길은 분명히 눈을 뜨고 있건만 손조차 뵈지 않는다. 숨 막힐 만큼 어두운데, 묘한 긴장이 가슴을 펑 뚫는다. 사회생활 첫 걸음은 그믐처럼 막막하다. 어디로 어떻게 내딛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눈을 뜨고 있건만 감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불붙지 못하고 길에 뒹구는 깨진 연탄이 애처롭다.

아! 드디어 연탄이 철책을 넘는구나’
벅찬 마음에 눈 감을 수밖에. 옆에 앉은 사람 손잡을 밖에. 그렇지 않고서야 가슴이 터져버리겠다. ‘한반도따뜻한연탄나눔운동’을 통해 연탄트럭 10대와 금강산 온정리에 갔다왔다. 연탄은 저 깊은 땅속에 묻힌 우리민족 통일을 퍼 올리는 한바가지 마중물이다. 남과 북이 함께 살자는 뜻이다.
2004년 11월 2일. 수많은 사람이 빚은 ‘사랑의 연탄’과 철책 넘어 겨레를 만났다. 짧은 만남이지만 우리는 만나야 할 한 민족임을 깨우치고, 무뎌진 통일염원을 되살렸다. 번개탄처럼 강렬한 불꽃이 검고 못난 가슴에 옮겨 붙었다.

광산연구소 일을 마치고 평소처럼 동네 집으로 돌아왔다. 철암에 온지 100일 만에 집 주인이 되었다. 이제 철암 사람이다. 고개를 들어 얼음처럼 맑고 투명한 돌구지의 밤을 본다. 이 편에서 저탄장 쪽으로 길게 꼬리를 그리는 별똥별에 나도 모르게 도라지꽃 터지듯 ‘아!’ 외마디 탄성이 나왔다. 우리 동네는 늘 우주 쇼하는 날이 아니더라도 빗자루와 쓰레받기 있으면 별똥별 쓸어 담는다.
돌구지 언덕길에 서니 골짜기마다 전설이 들리는 듯하다. 저기는 동네 아이들과 깡통차기 하던 곳, 여기는 대학생 광활팀과 맨 땅에 누워 별 보던 자리, 중학생 ‘배달천사’와 가정방문하고 연탄배달하며 수다 떨던 골목길 등...
가만히 눈감고 생각하면 어느새 연탄은 내 삶에 전설이자 동화가 되었다. 검은 친구야! 수 천년 땅 속에서 품은 역사를 꿈과 열정, 땀과 눈물로 피우자. 깊은 곳에 묻어둔 참 모습에 눈 뜨자. 불 붙이자. 다음에 눈을 뜨면 어디에 있을까?

현재 강원도 철암 광산지역사회연구소에서 연구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동찬(27)씨. 한반도따뜻한연탄나누기운동 실무자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빛도 소리도 없는 깊은 땅 속
화강암처럼 단단하지도 않고
보석처럼 예쁜 빛도 품지 못해
한치 자랑도 없는 나는 검은 돌
새까맣고 못생겨서 눈물 흘리다

‘나 같이 못난 검은 돌이 어디에 쓰일까?’

긴 시간 한숨과 눈물을 곰삭이고
겉과 속이 오롯이 검게 짓눌릴 때
폭약에서 부서져 땅 밖에 나오다

곱게 으깨어 다시 뭉치니 22공탄
손 시린 겨울. 할머니 방구들 데우고
흰 재로 부서져 학교 앞 서툰 걸음 지켜주고
부스러기마저 텃밭에 거름되다

겨울이 지나고 봄비 내릴 때
땅속으로 스며들어 지하수 타고 가매
저만치 들리는 울먹임

‘나 같이 못난 검은 돌이 어디에 쓰일까?’

눈을 감다

김석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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