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모를 두려움. 그곳에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괜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생각해보니 늘 그래 온 듯하다. 길을 걷다, 혹은 지하철역에서 보더라도 무심코 지나치거나, 도우미가 팔을 붙들고 “헌혈 좀 하세요”라고 권유해도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치기 일쑤였다.
그렇게 지금껏 단 한 번도 헌혈을 해본 적 없던 내가 그곳을 찾게 됐다. 혈액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처음으로 헌혈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기 때문일까.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느껴지며 기대감에 부풀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헌혈했어요”
아침 7시 30분 시청역에 위치한 대한적십자사 중앙혈액원으로 발걸음을 분주히 옮겼다. 약속 시간보다 늦지도 않았는데, 텅 빈 사무실뿐이다. 청소 아주머니는 직원들이 출근 전이라며 낯선 이방인의 방문에 얄궂은 소릴 해댔다. 바쁜 마음에 3층에서 7층으로 그리고 다시 5층으로 발바닥이 불나게 뛰어다니며 담당 직원을 찾아다녔지만 아무도 없다. ‘혹시 약속 시간을 잘못 알았을까.’
한참을 헤맨 끝에 벌써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부랴부랴 ‘서울예고’를 찾아갔다. 운동장엔 벌써 혈액원 버스가 자리 잡았다. 한 버스에 간호사 3명과 도우미 1명, 그리고 담당직원 1명이 배치돼 있다. 오늘 할 일은 학생들을 적당히 두 버스로 나눠 보내는 역할이다. 생김새만큼이나 맘씨도 좋은 여고생들이 삼삼오오 버스 앞으로 다가온다.
중앙 혈액원 기획과 이용호 헌혈진흥위원은 “오늘 헌혈자는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여학생은 혈액 비중 검사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잦은 다이어트와 생리 등의 현상으로 비중이 모자라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라고 귀띔했다.
몸무게 또한 45㎏이 넘어야 한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여성 헌혈자가 남성에 비해 현저히 적다. 전체 헌혈자 중 여성 헌혈자는 단 20%로 여성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단다. 버스 안을 들여다보니 난리법석이다. 헌혈을 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자랑스레 친구들 앞에 헌혈증을 내놓는 모습도 보인다. 전문가들의 영역인지라 마땅히 할 일이 없어 방황하던 차에 담당자가 드디어 두려워하던 말을 꺼냈다.
“아침은 먹었어요? 헌혈하려면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해요. 학생들이 몰리지 않는 시간에 헌혈하는 게 어때요?”
바로 헌혈버스에 올라갔지만 왠지 아플 거 같아 불안하다. 어린 동생들도 보고 있는데 자랑스럽게 해보자고 다짐하건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상세히 헌혈기록카드를 작성하고 비중을 검사했다. 간호사에게 까다로운 질문공세를 받고 바로 침대로 올라갔는데 하늘이 노랗다.
간호사는 “자, 소독합니다. 주삿바늘이 들어갈 때 잠깐 따끔해요”라는 말을 전하더니 손가락만 한 주삿바늘을 팔뚝에 푹 꼽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하나도 아프지 않다. 몸에서 새빨간 피가 나오는데도 아무 느낌도 없다. 그동안 괜한 걱정으로 몸 졸였던 걸 생각하니 웃음까지 난다. 문진을 하고 들어온 지민(19)이가 “언니 아파요?”라며 말을 건넸다. 불과 몇 분 아니 몇 초 전의 내 모습을 보는 듯하다.
헌혈은 의외로 빨리 끝났다. 여성에겐 320㎖를, 남성에겐 400㎖를 채혈하는데 몸속에서 혈액이 빠져나와도 몇 시간 후면 정상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일상생활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직접 헌혈을 해보니 그다지 나쁘지 만은 않다. 마음에 쏙 드는 기념품도 받고, 자랑스런 헌혈증도 받았다. 헌혈을 하면 물을 많이 먹어야 한다기에 꿀꺽꿀꺽 음료를 마시며 초조해 하며 기다리는 학생들에게 용기를 복돋아 줬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처럼 직접 해보는 게 훨씬 좋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거리 홍보·도우미 ‘바쁘다 바빠!’
11시가 되자 혈액공급 수거차량이 들어왔다. 아침 동안 헌혈한 혈액을 중앙 혈액원으로 갖고 가는 것이다. 헌혈 후 빠른 시간 안에 검사를 끝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은 엄수라고.
중앙 혈액원에 들어가 혈액을 내려놓고 다시 대학로 헌혈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베테랑 홍보 도우미로 일하고 있는 아주머니를 따라 거리로 나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추적추적 봄비마저 내리는 거리. 지나가는 이들에게 헌혈을 하라고 권유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힘겨웠다.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홍보 도우미 아주머니가 선뜻 자신만의 노하우를 알려줬다.
“기자 양반, 힘들어 할 거 없어. 그냥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공손히 인사하고 말하면 돼. 자, 보라고. 안녕하세요~! 어! 남학생이 멋지네요. 옆에 언니는 너무 예쁘다.”
바로 앞에서 걸어오는 커플을 잡고 얼마간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헌혈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역시 베테랑 도우미답다. 언제쯤 저렇게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그래 이왕 왔으니 도우미 역할이라도 제대로 해보자는 심산으로 바쁜 사람들을 붙잡고 말을 걸었다. 그러나 세상은 참으로 냉정했다. 왜들 그리 바쁜지, 쳐다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거나 어떤 사람은 말이라도 걸까 봐 아예 빙 돌아간다. 도우미의 노하우를 유심히 살펴봐도 답 없는 망망대해다. 수차례의 실패 끝에 드디어 착한 학생들이 처지를 불쌍히 여겨 흔쾌히 승낙했다.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어쩔 뻔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너무 고맙기만 한 이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비가 오는 날인데도 헌혈의 집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오후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몰아닥치는가 싶더니 누워있는 사람보다 대기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그야말로 헌혈의 집이 북새통을 이뤘다. 헌혈의 집에서는 그들을 위해 음료를 준비해주고, 헌혈기록카드 작성법을 설명하며 안내를 했다. 쉴 틈 없이 헌혈이 이뤄지는가 싶더니 썰물 빠지듯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매년 의약품 제조용 혈장 약 20만ℓ를 수입하는 우리나라는 헌혈자들이 턱없이 부족하지만 꾸준한 나눔을 전하는 이들도 꽤 많다고 한다.
서덕순 책임간호사는 “2주에 한 번씩 방문해서 성분헌혈을 하는 분들도 계세요. 어떤 분은 헌혈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안타깝다고도 하는걸요. 이처럼 헌혈하는 사람이 많아져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세상은 아직도 살 만하다는 말들이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하루 종일 발을 동동거리며 뛰어다녔더니 서서히 다리도 아파 왔다. 이까짓 도우미 역할 몇 시간 했다고 벌써 몸이 말썽이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정신없어 하는 모습을 눈치챘는지 서 간호사는 “힘들죠? 그래도 덕분에 우리가 편하게 일할 수 있었어요. 사람이 몰아닥칠 새면 정신이 없거든요”라며 위안의 말을 건넸다. 정말 도움이 되긴 한 걸까. 말썽만 부린 건 아닌지 내심 걱정됐다.

 철저한 검사, 부적격 혈액은 절대 금지
중앙혈액원으로 출근한 다음 날. 운영과 김은정 씨는 “전문가들의 영역이라 체험할 만한 게 없다”며 어떻게 혈액이 들어오고 나가게 되는지 전반적인 과정을 보라고 권했다. 그래도 체험인데 할 일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싶었지만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무실을 보니 적어도 방해꾼은 되지 말아야겠다라는 생각에 수긍했다.
매일 아침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는 공급과는 헌혈한 혈액들을 가지고 들어와 정확한 인적사항을 기재하고, 전산작업화를 마쳐 다른 팀에 보낸다. 그리고 혈액은 환자에게 가기 전에 다시 공급과로 내려와 까다로운 절차를 통과한 정상 혈액만을 골라 병원으로 공급하게 된다. 24시간 돌아가야 하는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곳은 하루에 1500~2000여 개의 혈액을 필요한 이들에게 보낸다고.
공급과 강복만 씨는 “확인작업을 거쳐 이상이 없는 혈액만 따로 보관하고 있어요.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혈액은 절대 출고시키지 않아요. 생명이 달린 일이기 때문에 이상이 있는 혈액은 폐기 처분하고 있죠”라고 말했다.
제제과는 다소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하얀 가운을 입고 살갗을 에는 바람을 쐰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는 이곳은 혈액을 원심기에 넣고 돌려 분리시키는 곳이다.
김현숙 주임은 “혈액은 적혈구, 혈소판, 혈장 이렇게 세 가지가 있어요. 이들은 무게가 달라 원심기에 넣고 RPM을 주게 되면 상층과 하층으로 분리가 되죠. 이렇게 3차례 분리시키는데, 모든 혈액을 6시간 내에 분리해야 해요”라고 말했다.
뭔가 도울 일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던 차에 김씨가 선뜻할 일을 쥐여줬다. 혈액 봉지에 매달린 줄을 정리하는 일인데, 병원에서 테스트할 때 쓰기 위해 아주 중요하다는 말을 듣자 힘이 실렸다. 길게 늘어진 줄을 세 번 접어 양옆의 홀과 홀에 끼우는 일인데, 더딘 손놀림이 어찌나 민망한지 어디 녹록한 일이 없었다.
얼마 후 1차로 원심기가 돌아가자 적혈구와 혈소판과 혈장이 들어있는 노란 혈액으로 나눠졌다. 이를 분리하는 판에 흔들리지 않게 넣고 위 꼭지를 좌우로 따주면 저절로 분리가 된다. 정신없이 손을 놀렸는데도 전문 직원들을 따라가려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혈액이 어떻게 분리되는지 알게 되는 소중한 시간을 가진 듯했다.
혈액이 분리되는 동안에 검사과에서는 혈액 검체를 가지고 정확한 혈액형과 감염균이 들어있는지를 확인하는 검사작업을 한다. 마이크로 단위로 검사를 해서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여기서 통과되지 못한 혈액은 모두 부적격 판정을 받는다.
검사과 김종필 씨는 “검사과에서는 정확한 혈액형과 C형간염, 에이즈, 말라리아 등을 검사를 통해 알아내고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는 혈액은 부적격 판정을 하게 되요. 그리고 혈액이 외부로 유출되지 못하도록 막아놓게 되죠”라고 부서의 역할을 설명했다.
그는 또 “바이러스에서 직접 핵산을 분리, 증폭하여 그 감염 유무를 확인하는 핵산증폭검사를 실시하고 있어요. 이 방법은 항체미형성기간을 단축해 조기에 바이러스 감염 여부를 진단할 수 있죠. 앞으로 안정성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기대해도 좋아요”라고 말했다.

 헌혈, 그 숭고한 이름… “함께 해요”
업무 파악을 모두 한 후 내 혈액이 곧 출고된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지금쯤이면 누군가의 몸 속에 들어갔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렇게 숭고한 일이 어디 있을까. 비록 많은 도움이 되진 못했지만 돌아오는 발걸음이 뿌듯하기만 했다.
운영과 김은정 씨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선 헌혈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에요. 때문에 꾸준한 관심을 갖고 많은 사람이 함께 참여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이렇듯, 불의의 사고로, 또는 희귀난치성 병으로 피를 수혈받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혈액원은 생명줄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한 치의 오차도 범하지 않도록 철저한 검사와 관리를 하고 있는 중앙혈액원 직원들. 그들이 있기에 헌혈로 나눔을 실천하고, 그 나눔으로 생명을 구원받는 이들의 발걸음은 가볍다. 작은 나눔으로 한 생명을 구하는 고귀한 일이기에 어쩜 헌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의 실천이 아닐까. 이제부터라도 이 나눔의 행렬에 함께 동참해 꾸준한 사랑의 실천을 실행할 것을 굳게 다짐해 본다.
(문의: 02-319-6626)

표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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