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차영차 구령에 맞춰, 개나리팀 잣나무팀 힘을 합쳐...

 ‘탕!’소리가 나자마자 잽싸게 달려가 주운 쪽지에 적힌 지령을 보고 관중석으로 뛰어드는 아이. 신나게 박수치며 구경하던 동네 아저씨가 갑자기 아이 손에 덥썩 붙잡힌다.
“아저씨 달려요!”
영문도 모른 채 아이와 함께 달리는 아저씨. 기왕 뛰는 것 1등 해야겠다 싶어 열심히 달린 결과, 결승점에 1등으로 골인. 갑자기 아이 손에 끌려나가는 아저씨를 보고 깔깔거리던 관중들도 1등이라며 좋아한다. 쪽지에 적힌 지령은 ‘모자 쓴 아저씨 함께 달리기’였다.

높고 파란 하늘 아래 펄럭이는 만국기는 예행연습 때부터 가슴을 설레게 했다. 청군, 백군 대신 노란색 운동복을 입은 개나리팀과 녹색 운동복을 입은 잣나무팀이 승부를 가른다. 운동회를 시작한 아침부터 학교 식당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운동회를 구경온 동네 어르신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평소보다 많은 양의 식사를 준비해야했기 때문이다.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에 위치한 운담초등학교(교장 조규식)에서 열린 가을운동회는 이 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즐기는 ‘한마당 큰잔치’였다.

선생님들이 직접 짠 아기자기한 종목 37가지

동네 어르신들이 참여하는 강태공 나들이..앉아서 구경만 하기에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손주들에게 선물 할 수 있는 과자를 낚아 본다.

한 학급이 한 학년인 운담초등학교. 전교 학생 수는 126명이다. 학생들은 종목 하나를 마치면 바로 다른 종목에 참가해야하기 때문에 응원석이 비어있을 때가 많다. 덕분에 응원은 고스란히 운동회에 구경온 동네 어르신과 학부모들의 몫. 김밥과 얼음물, 며칠 전 딴 산밤을 삶아 주섬주섬 점심도시락을 싸온 학부모들은 일찌감치 운동장가에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거, 참 난감하네, 첫째는 노란옷이고 둘째는 파란옷이니 어느 색깔을 응원한담.”
초등학교 1학년과 3학년인 자녀를 둔 어르신은 가족 내에서도 팀을 갈랐다. 엄마와 옆집아주머니는 개나리팀을 응원하고 어르신은 잣나무 팀을 응원하기로 했다.

준비된 종목도 37가지. 요즘은 대개 이벤트회사에서 초등학교 운동회를 진행하는 추세인데, 운담초의 선생님들은 생각이 달랐다. 비록 몸은 고될지라도 9명의 교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직접 종목을 짰다. 이름과 순서를 정하고, 준비물을 챙기는 데 한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학생들 줄다리기 경기가 있은 후 학부모 대항 줄다리기에 참가한 이남국(33)씨. 3학년인 승희의 삼촌이다. 징소리가 울리고 ‘영차영차’구령에 맞춰 젖먹던 힘까지 써봤지만 줄이 자꾸 반대편으로 쏠리는 느낌이다.

“이겨라, 이겨라, 개나리팀 이겨라.”
병설 유치원의 유치원생들이 귀여운 입을 쫑알거리며 응원해도 여지없이 끌려가버리고 만다. 잣나무팀의 승리를 알리는 징이 울리자 초록색 운동복들이 폴짝폴짝 뛰며 함성을 질렀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퇴장하는 잣나무팀 학부모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려있다.

마을사람 모두 웃고 떠드는 큰 잔치

점심시간을 알리는 박 터트리기. 어른 아이 할것 없이 오재미를 던진다.

손목에 1, 2, 3등 도장을 찍어주는 장애물달리기가 원외에서 진행되는 동안, 원내에서는 동네 어르신이 참가하는 ‘강태공 나들이’ 프로그램이 한창이었다. 방송에서는 동네 어르신들 중 소싯적에 ‘고기 좀 낚았다’ 하신 분들만 나오라 했지만 가만히 구경만 하기 몸이 근질근질 했던 어르신들이 다 나와 줄을 선다. 고리가 달린 긴 막대기를 큰상자에 드리우면 상자 안에 있던 학생이 준비된 과자며, 소주며, 세숫대야, 빨랫비누 등을 고리에 걸어 준다.

“난 소주 싫어. 딴 거 줘.”
낚시를 하다 마음에 안 든 물건이 걸리면 다시 낚시대를 드리운다. 손주에게 줄 과자가 걸리자 깔깔거리며 좋아하는 어르신의 웃음소리가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처럼 맑다.

오재미를 던져 터트린 박에서 점심시간을 알렸다. 엄마가 바빠서 못 온 시무룩한 친구의 손을 붙잡고 가는 아이들의 모습과 누구든지 나누어 먹으려고 넉넉하게 김밥을 싸 온 어른들의 모습이 흐뭇한 풍경을 자아낸다.

“형아, 줄넘기 재밌어?”
아까부터 2학년인 형의 모습을 지켜보던 5살짜리 동생은 “나도 하고싶다”고 엄마를 졸라대던 터다. 동생의 손을 잡고 일어선 형은 달콤한 냄새가 코를 간질이던 정문 쪽으로 갔다. 원래는 솜사탕을 먹으려 간 건데, 그 앞에 펼쳐있는 장난감 노점에 관심이 더 간다. 장난감 노점에는 딱총, 보석커플링, 종이꽃총, 장난감 수갑 등이 널려있다. 한쌍에 천 원하는 보석커플링에는 운동장의 모래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다.

“어제는 김포에 있는 초등학교에 갔었는데, 여기가 훨씬 낫네. 재미도 나구.”
초등학교 운동회를 다니며 장사를 하는 장씨.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단다.

가을의 아름다운 풍경, 초등학교 가을운동회

오랜만에 하려니 힘드네.. 학부모들의 장애물 달리기. 마음처럼 몸이 따라주면 좋을 텐데.

 초등학교 운동회의 꽃인 여학생들의 부채춤 공연. 종목 이름도 ‘꽃들의 향연’이다.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학부모들과 강단에서 순서대로 무용 시범을 보이는 선생님, 알록달록 코스모스를 닮은 아이들의 움직임이 예전에 우리가 했던 운동회 모습과 변함이 없다.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며 손에 땀을 쥐게 한 전체 계주를 끝으로 모든 경기가 끝이 났다. 경기만으로는 잣나무팀의 승리였지만 정리체조를 열심히 한 개나리팀에게 추가 점수 50점이 부가됐다. 끝까지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이긴 팀에게 박수를 쳐주는 잣나무팀의 표정 어디에서도 섭섭한 기색을 찾기 어렵다.

학교에서 키우는 닭이 화단에 알을 낳고 천연덕스럽게 그 자리에서 알을 품어 볏짚으로 닭집을 만들어 준 시골초등학교. 여유로운 이 풍경과는 반대로, 소음일 뿐이라며 인근 초등학교 가을운동회를 반대하는 도시의 아파트 주민들 이야기는 씁쓸하게 들린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에게는 따뜻한 추억이고, 어른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초등학교의 넉넉한 가을운동회가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게 느껴진다.

글/배미용 사진/최경훈 배미용 기자

배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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