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광주를 향하는 발걸음이 왠지 심상찮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허허벌판이 스산한 느낌마저 감돌게 한다. 느닷없는 사고로, 부모의 이혼과 별거로 하루아침에 ‘가장’이 돼야 했던 아이들. 조금은 힘들지만 그래도 어른 못지않은 몫을 해내가며 세상 속으로 당당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그들에게, 이 스산한 겨울이 항상 추운 것만은 아닐 테다. 사랑하는 가족이, 그리운 가족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올 겨울이 유난히 따뜻한 ‘소년’ 가장이 있다. 전남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김민현(24)씨. 지금은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됐지만, 이렇게 되기까지의 남모를 ‘설움’을 누가 알기나 할까.

5월이 너무 싫은 ‘소년가장’

민현 씨가 가족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별로 없다. 태어난 지 꼭 다섯 해 만에 그의 가족은 흩어져 버렸다. 단란한 세 식구에게 일어난 청천벽력 같은 일. 하지만 그가 ‘이별’에 대해 알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

“경남 마산에서 살았다고 해요. 아버지는 자영업을, 어머니는 공장에서 일했는데, 아버지가 도박을 하셨대요. 그러다 보니 생활이 힘들어지게 됐고, 두 분이 합의하에 이혼하셨죠.”

가정이 풍비박산 나고 민현 씨는 전라도 나주의 할머니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그의 아버지는 제주도로 떠나버렸고, 어머니는 재가를 했다.

“엄마가 없다는 게 뭔지 몰랐어요. 그냥 안 보인다고 생각만 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제주도에서 선원생활을 하셨는데, 일 년에 서너 번 볼 정도였어요. 그마저도 초등학교 4학년 이후로는 기회조차 없었지만요.”

풍랑을 맞아 배가 침몰하면서 민현 씨의 아버지도 사라졌다. 그 모진 풍랑은 열한 살 소년을 세상에 홀로 남기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잠잠했다.

“아버지가 실종되기 바로 전 ‘내년에 오면 새엄마를 꼭 만들어 주겠다’고 했는데, 결국 오지 않았어요. 어릴 때만 해도 아버지가 무인도 같은 곳에 홀로 남겨져 살고 있을 거란 상상을 많이 했죠.”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을까. 어린 나이에 겪었을 충격이 가늠해 보지 않아도 그려진다. 말로만 듣던 소년가장이 되고부터 민현 씨의 삶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홀로 있는 시간도 많아졌고, 어떤 일을 하던 결정도 자기 스스로 내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도움을 줄만 한 친척이 곁에 있어 정신적·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단다. 그래서 그는 다른 소년소녀가장보다 행복한 편이었다고 전한다.

“5월이 가장 싫었어요.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있는 달이잖아요. 친구들은 가족들하고 놀이동산도 가고 선물도 받는데, 할머니가 자주 아프셔서 집에서 외롭게 있던 날이 많았거든요. 그런 날이면 ‘왜 나만 이렇게 태어났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금세 포기했어요. 그렇게 생각해 봤자 아무것도 얻을 수 있는 건 없더라고요.”

점점 의기소침해지기 시작한 그는 말수도 줄고, 친구들과 거리도 두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겉으로 드러내 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자신을 동정하는 모습이 느껴져 곁에 가기 싫었다. 내성적인 아이로 친한 친구 하나 주변에 두지 못한 채 성장기를 보낸 그는 요즘 들어 그 시절이 후회가 된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게 혼자서 밥 먹는 것이었어요.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했을 땐 특히 더 그랬죠. 찬이 얼마 없어도 할머니와 마주앉아 먹는 밥이 제일 맛있어요. 아직까지도 혼자 밥 먹는 게 싫어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외로움’으로 사무쳤으리라. 그런 그가 사춘기 시절을 아무 탈 없이 보낸 게 너무나도 다행스럽다.
“죽고 싶은 만큼은 아니었지만, 힘들고 많이 외로웠어요. 만약 그 때 당시 그 감정들을 못 이겨 냈으면 어떻게 됐을지 아무도 모르죠.”

“가족사진 찍어보고 싶어요”

“아버지가 실종되면서 보상금 조로 받은 돈과, 친척들. 후원자들이 다달이 보태주는 돈으로 생활했어요.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았죠. 꼭 필요한 곳이 아니면 돈을 쓰지 않았거든요.”

어린 나이에 큰돈이 손에 들어와 흥청망청 썼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그라고 왜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게 없었을까. 하지만 자신의 앞날을 위해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했다. 학비도 장학금을 받아 스스로 해결할 정도로 생활력이 아주 강하다.

“그동안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어요. 주유소에서도 하고, 기숙사 식당에서 설거지도 하고, 과외나 초등학교 CA 강사를 하면서 한 달에 한 40여만원을 벌어요. 제 생활비는 버는 셈이죠.”

전라도 광주로 대학을 진학하며 할머니와 잠시 떨어지게 된 그는 2주일에 한번은 꼭 집에 내려가 할머니와 오붓한 저녁 시간을 갖고 돌아온다. 그런데 요즘 걱정이 하나 생겼다. 노환의 할머니가 얼마 전부터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언제까지나 자신의 곁에 있어주지 않을 것이기에 요즘 그는 “더 잘해드려야겠다”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누군가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할머니가 항상 기다려줘서 좋았는데, 요즘 몸이 많이 쇠약해져서 가슴이 아파요. 할머니와 나, 단둘뿐이지만 우린 가족이잖아요.”

그는 헤어진 가족을 찾는 TV 프로그램을 보면 어슴푸레 떠오를 듯 말 듯한 ‘엄마’를 찾아보고 싶어진다고도 했다. 우연히 거처를 듣긴 했지만, 어머니가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기에 조금 더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엄마가 일부러 절 버린 게 아니라는 것을 아니까 거부감이 들거나 그러진 않아요. 다만 학생인 제가 지금 엄마 앞에 나타나면 부담스러울 거예요. 그래서 빨리 사회에 나가 자리 잡고 싶어요. 그래야 엄마 앞에 당당히 서죠.”

그러기 위해 내년에 있을 국어교사 임용고시 준비가 한창이다. 그는 교사가 되면 어려운 처지의 학생들에게 자신이 받은 것처럼 똑같이 해주고 싶단다. 이 말속에 엄마 앞에서 멋진 교사로  나타나고 싶은 마음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가족사진을 찍어보고 싶어요. 또 함께 음식을 만들어 식탁에 놓고 오순도순 이야기도 하며 저녁 식사도 하고요. 그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가족의 모습이에요.”

그는 누구보다 가족이 생기길 간절히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통사람보다 두 배, 세 배는 더 뛰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소년가장이 헤쳐나가야 할 사회의 편견이 너무 깊은 탓이다.

구색은 맞지 않아도 우린 ‘가족’

김 민현 씨

둘이건 셋이건 그 숫자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함께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가족이고, 행복인걸. 휑한 겨울나무 사이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쓸쓸하지만은 않은 것은, 어쩜 그가 새롭게 만들어 갈 가족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외로움’을 누구보다 먼저 알았기 때문에 ‘가족’이란 의미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올 것이다.

“요즘 이혼율도 높고 많은 가정이 해체되고 있어 너무 안타까워요. 좋은 아들이 되고 싶어도 부모님이 없어 못하는 게 얼마나 억울한 일인 데요.”

비록 구색은 잘 맞지 않아도, 사랑으로 믿음으로 그리고 그리움으로 가득 찬 민현 씨네 지붕 아래에는 분명 가족이 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할머니가 그리고 손자가 말이다. 퍼즐 맞추듯 부족한 부분을 하나씩 완성해 나가는 소년가장의 겨울밤은 그렇게 깊어만 간다.

글·사진/표수진 기자

표수진 기자  

<저작권자 © 복지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