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멈, 이거 줄까? 왜? 싫어? 그럼 김치 먹어.”
부부간의 금실이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걸까. 고봉 하게 뜬 밥술에 할아버지가 반찬을 놓아주자 “동네 사람 보는 데 창피하다”며 손 사례를 치면서도 연신 얼굴 한가득 웃음을 띠는 할머니. 누가 이들 부부보고 60평생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할까.

연하 남편의 든든함과 연상 부인의 부끄러움이 마치 어제 결혼한 20대 신혼부부 마냥 깨소금이 넘쳐난다. 이들 부부의 모습에 함께 점심식사를 하던 노인들도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듯 자꾸 곁눈질하는 눈치다.
지난 12월 15일, 사당종합복지관(관장 전익준) 노인식당은 신혼 같은 두 노부부의 등장으로 깨소금 냄새가 진동했다.

각자 산 날보다 같이 산 날이 더 많은 ‘부부’

연하남편 최재만(80)씨와 연상아내 송신흥(81)씨. 딱 61년 전 두 사람이 부부가 됐다고 하니, 각자 산 날보다 같이 산 날이 더 많은 부부다.
“내가 스물, 집사람이 스물하나였어. 집안에서 혼사(婚事)가 오갈 때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난 안 한다고 했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어찌나 밀어붙이던지….”

한 동네에서 그것도 지척에서 나고 자라 모든 정황을 알았던 최씨는 말은 결혼이 달갑지 않았다고 했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아내 송씨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 처형, 그러니까 집사람 언니가 당시 ‘효부상’을 받았어. 그러니 우리 아버지는 보나마나 이 사람도 효부라는 거야. 내가 극구 나이가 많아 싫다는 데도 이 사람하고 결혼하라고 얼마나 성화였던지. 그래서 결혼했지 뭐야~.”

그렇게 두 부부는 전라도 익산의 어느 작은 시골마을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집안 형편에 자식도 쌍둥이 딸까지 여섯이나 있었으니 꽤나 평탄한 삶이었을 게다. 하지만 최씨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형편은 뒤바뀌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떠난 뒤 살림을 내가 주관했다고. 농사만 지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장사를 하고자 맘먹었지. 그래서 대구로 내려가 사과를 기차로 화물칸 하나 가득 샀어. 그런데 이놈의 기차가 영~ 오지를 않네~.”

결국 다 썩어 빠진 사과를 품에 안게 된 최씨는 다음 사업으로 고구마 장사를 택했지만, 그마저 녹녹지 않았다. 겨울철 추위에 얼음 박힌 고구마를 상인들이 살 리 없었기 때문이다. 있는 재산 없는 재산 다 날리고, 빈손으로 서울행을 택한 것이 벌써 30년도 넘은 이야기다.

여덟 식구가 무임승차로 기차에 올라타고 첫 보금자리를 튼 곳은 서울의 사당동. 최씨는 그 후로 이곳을 떠나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이곳이 채석장이었지. 먹고살려니 어쩌겠어. 그곳에라도 나가서 일을 해야 하는데, 며칠 못 가서 손가락을 다치고 말았어. 그렇게 되자 부동산중개업자로 나섰지.”
서울 하늘에 개발의 붐이 불어 닥치면서 꽤나 쏠쏠한 재미를 보기 시작한 최씨. 살림도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고, 커다란 집도 마련했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 45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빚더미에 앉고 말았다.

“전자대리점 다섯 개를 운영했는데 그게 홀라당 망하고 말았어. 살던 집마저도 다 뺏기고 투자한 땅마저 다 잡혔지. 차압이 뭐야, 잠잘 방 한 칸조차 없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부인 송씨는 묵묵히 남편의 곁을 지켰다고. 그게 바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고, 그 당시 아내가, 또 어미가 살아가야 할 길이라 여겼다며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우리 시대 할머니이고 어머니의 모습이 있다.

“둘이 살다 같이 가면 그만이지”

몇 년 후 다시 부동산업을 시작한 최씨는 막내 사위와 은행 빚을 얻어 작은 빌라 하나를 장만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에겐 과분한 것이었을까. 아내 송씨가 갑자기 화병으로 쓰러지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 사람이 병원에 누워있는데, 참 갑갑했지. 6개월을 꼼짝도 안했어. 밥도 링거로 먹고, 병원에서조차 고칠 수 없다고 포기하라고 한 상태인데 뭘~. 거기에 은행 빚은 하루하루 늘어가지, 갚을 능력은 없지. 죽겠더라고….”

병원비조차 마련할 수 없을 만큼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 최씨.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던 옛말처럼 12년간 아비와 의절한 큰아들, 큰 사위가 일찍 세상을 뜨고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큰딸, 시댁 살이 하는 둘째딸, 넉넉지 않은 막내딸. 자식이 있어도 선뜻 병원비를 챙겨줄 만한 사정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기에 아버지의 어깨는 더욱 내려앉고 말았을 것이다. 그 마음이 오죽했으면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아내와 함께 세상을 뜨고자 약까지 준비했을까.

“이제 안 되겠구나 싶어서 집사람을 포기하려했어. 그리고 영안실 예약까지 했지. 그런데 이 사람하고 같이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어차피 가실 것 집에서 편안히 모시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 막내딸도 자기 집에서 모시자고 나서고….”

그렇게 막내딸 집으로 들어선 최씨 내외. 하지만 월 16만원 지하 두 칸짜리 방에서 사는 막내딸의 사정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 어머니에게 자신들의 큰방을 선뜻 내어준 막내딸 내외가 최씨는 “아들보다 백배는 더 낫다”며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6개월간 누워 있던 할멈 등에 욕창이 났어. 소독을 해야 하는데, 그 몇 천원이 없어서…. 결국  약국에 가서 사정을 했지. 내가 돈이 지금 하나도 없으니 도와주면 꼭 갚겠다고.”

그러기를 꼬박 6개월. 누워만 있던 아내 송씨도 그의 정성을 알았던지 점점 회복기미를 보이더니 결국 거동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두 부부의 금실이 하루하루 두터워지기 시작했다.
“애들한테 미안해서 더는 같이 못살겠더라고. 친구가 하는 부동산에 가서 사정을 말하고 방을 구해달라고 했어. 그때 내가 집 소개를 해서 1백만원이 생겼었는데, 마침 월 30만원짜리 방이 나왔다기에 둘이서 이렇게 나와 살아.”

하지만 벌이가 없는 최씨에게 월 30만원은 거금이나 다름없는 액수였다. 그런 사정을 안 둘째 딸이 친구에게 빌렸다며 1천만원을 내어준 덕에 전세로 돌리기는 했지만, 왠지 최씨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시댁 몰래 빌려준 돈 때문에 딸이 생활하기 어렵지는 않을까 싶은 부모의 마음에서다.

“지금은 월 50만원 정도가 정부에서 나와. 두 늙은이가 병원비 내고, 세금 내며 생활하기에는 조금 빠듯하지만 그래도 먹고 살만해. 복지관하고 성당에서도 많이 도움을 주고 있고. 힘만 있다면 나도 남들을 위해 돕고 싶은데, 내 나이 80이 넘어가니 뭐 할만한 일이 있길 하나. 거기에 몸도 예전 같지 않아서….”

부인의 시중으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이 견디질 못하고 만 것일까. 얼마 전 장을 보러 나가던 길에 횡단보도에서 쓰러져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때 만약 조금이라도 늦게 발견해서 벌어졌을 끔찍한 일이 떠올라서였을까. 최씨의 목이 멘 듯 다음 말을 선뜻 잇지 못했다.

요즘 최씨에겐 부엌 출입금지령이 내렸다. 살림이라곤 모르고 살던 최씨가 지난 몇 년간 부인 송씨를 위해 부엌에서 고생했을 일을 생각하며 아내가 내린 벌 아닌 벌이다.
“할멈이 부엌엔 얼씬도 못하게 해. 원래는 빨래고 뭐고 다 내가했지. 오늘도 복지관에 가기 전에 할멈이 빨래를 다 해 놓고 갔어. 늘그막에 뭐 바랄 것이 있나. 이렇게 둘이 같이 살다 가면 그만이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그 마음

  다소 무뚝뚝해 보이는 남편 최씨가 부인의 손을 꼭 잡고 다닌 지 벌써 8년째다. 아침저녁 운동도 하고, 복지관을 갈때도 꼭 잡은 두 손을 놓지 않는다.
최씨는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넘어지니 안 잡고 다닐 수가 없어. 며칠 전에도 내가 먼저 갔더니 넘어져서 무릎이 다 깨졌지. 그래도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라고 말하며 부인의 손을 토닥인다.

이런 남편의 토닥임이 싫지 않으면서 “남부끄럽다”를 연신 내뱉는 부인 송씨. 소문난 깨소금 부부답게 두 사람 사이에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어쩜 이런 그들의 사랑이 있기에 지난 61년 삶의 고된 풍파도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은 아닐까. 이제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두 늙은이가 한날한시에 떠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노부부. 오는 새해 바람은 무엇보다 건강이지만,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곱게 떠났으면 한다고 한다. 그런 그들의 말이 왠지 씁쓸하기만 하다.

“갖고 있는 게 있다면 아이들한테 다 주고 싶지. 어느 부모인들 그러지 않겠어. 이제 제발 우리 두 늙은이 아프지 말고, 아이들한테 피해는 안 가도록 그렇게 세상을 떠나기만 한다면….”
이렇듯 최씨 부부의 말처럼 누구라 할 것 없이 아낌없이 주고픈 맘, 그게 바로 우리 부모들의 변함없는 맘일 것이다. 올 한해 부모에게 가장 갚진 선물이야 말로 우리의 사랑 섞인 말 한마디가 아까.  

글·사진/표수진 기자

표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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