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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빳빳한 새 달력의 첫 장을 넘기는 마음이 기대와 희망으로 한껏 부푼다. 그동안 엄두를 못 내던 계획들이 다이어리의 앞머리를 가득 메우는 시기, 미루고 미뤘던 영어학원 새벽반을 덜컥 끊을 수 있는 것도 새해를 맞는 이 때만의 드높은 기상 탓이리라. 가만 생각해 보면 지난해와 별반 달라질 일도 없건만 마음에는 어김없이 새해에 대한 온갖 기대와 호기심이 똬리를 트는 연말연시, 그 넘쳐나는 소망만큼이나 북적댈 것 같은 곳이 있다.

기막힌 새해운수를 기대하며 들어서게 되는 온갖 점집과 사주철학관이다. 새벽부터 줄을 서야 간신히 무당의 얼굴 한번 볼 수 있다는 미아리 유명 점성(占星)촌에서부터 젊은 남녀들의 부담 없는 데이트 코스인 대학로 사주카페나 인사동거리의 작은 천막집에 이르기까지, 주변 곳곳에서 진득하게 옹그리고 앉아 우리를 손짓하는 온갖 역술관들. 그곳에선 지금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까.

반 평 공간에서 풀어내는 사주팔자

“날씨가 이런 날은 손님들이 도통 들어오질 않아. 추운데 어디 들어오겠어?”
을씨년스러운 추위 탓에 천막을 젖히고 들어오는 손님 하나 없다며 넋두리를 하는 이계옹(79)씨는 탑골공원 근처에서 20년째 지나는 사람들의 운수를 보아 온 이 지역 터줏대감이다.

보통 저녁 5시에서 9시까지 불을 밝히는 이씨의 천막 위엔 신수, 재수, 재복, 건강, 궁합, 관상, 손금, 택일 등의 글귀가 단정한 글씨체로 빽빽이 적혀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반 평 남짓한 천막 안에는 최대 두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간의의자가 나란히 붙어 있고 중앙에 놓인 탁자 위에는 알 수 없는 한자가 빼곡히 적힌 낡은 책자도 몇 권 있다. 그 옆으로 놓인 전구램프와 소형 스토브가 영하 15도를 오가는 강추위 속에서 천막을 지켜주는 유일한 난방기구다. 

공무원 생활을 하다 육십의 나이에 사주역리를 익혀 이 일을 시작했다는 이씨의 일과가 시작되는 시간은 오후 5시. 이때부터 점포 귀퉁이에 뚫린 작은 창문을 내다보며 행인을 손짓하는 그의 영업이 시작된다.

점포를 접는 밤 10시까지, 어떤 때는 손님이 나가는 족족 새 손님을 맞는 운수 좋은 날도 있지만 반면 하루 내내 기다려봐야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아 ‘쪽박 차는 날’도 여럿 있단다. 그런 날은 일치감치 감을 잡고 두 시간 남짓 일찍 점포를 접는다고.

뿌연 램프불을 받아 이계용 씨의 얼굴이 사뭇 신비스러워 보인다.

이씨처럼 탑골 공원 일대에서 사주와 점을 봐주는 곳은 대략 7~8군데. 모두 이 곳에 터를 잡은 지가 10년 이상은 족히 된 베테랑 할아버지들이다. 대부분 생년월시를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로 분석해 나무, 물, 불, 쇠, 흙 다섯 가지 기운의 배합률을 밝혀 8글자로 나타낸 사주팔자 풀이와 관상을 주로 보고 있다. 이들 중에는 꽤 젊은 시절부터 이 일에 뛰어든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이 은퇴의 기로에서 새롭게 시작한 제2의 직업인 셈이다. 이씨 역시 슬하에 다섯 자녀가 있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이 일을 계속 할 거라고 한다.

탑골 공원에서 신호등 하나만 넘어오면 되는 인사동 골목. 이 곳에도 길거리 역술가들의 모습은 쉽게 찾을 수 있다. 탑골 공원 일대가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들의 독무대라면 이곳 인사동은 역사와 젊음이 공존하는 거리답게 역술가들의 연령대도 40대 중년에서 70대 노인까지 다양하다는 게 특징이다.

많고 많은 직업 중에 남의 사주보는 일을 택하게 된 사연들도 재미나다. 어떤 이는 생계  유지 차원에서 이 일을 시작했지만 또 어떤 이는 신 내린 듯 ‘이 길이 내 길’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10년째 사주를 보아 온 역술인 김모(61)씨는 이 중 후자에 속한다. 현암(玄岩)선생이라 불리는 그는 원래 미국서 해운업에 종사하던 해외파였다. 미국 경기가 한창 내리막길을 걷던 94년, 그는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새 사업에 골몰하다 아내의 권유로 철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김씨는 원체 젊은 시절부터 정신세계에 남다른 호기심이 있어서인지 몰라도 처음부터 이 세계가 낯설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이 자기 사주를 알면 인생에서 실패할 일이 없다는 그는 자신의 사주를 안 후 “나는 딱 이쪽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구나!”하고 무릎을 쳤단다. 그는 인류가 계속 되는 한 사주도 계속된다며 사주역학이 얼마나 오랜 역사와 경험을 함축한 학문인지 모른다며 연신 혀를 내둘렀다.

오랜 외국 생활 덕에 유창한 영어구사가 가능한 그에게는 찾아오는 손님도 다국적이다.
“일본인 관광객 다음으로 많이 찾아오는 이가 캐나다인과 미국인이야. 서양인들이 사주나 점에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도 않아. 주로 관상과 손금을 보는데, 재밌어 하면서도 굉장히 진지하게 듣거든.”

글로벌 시대, 차별화된 손님맞이로 방문객이 많은 계절엔 큰 호황을 누린다는 그에 따르면 음행의 원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흑인이든 백인이든 잘 들어맞는다고. 단 인도나 방글라데시, 아랍 등 기후가 확연히 차이 나는 중동 지역의 사람들은 손금 이외엔 제대로 맞는 게 드물다고 한다.

그의 옆에는 육효(六爻, 주역)라는 산통이 있었는데, 작은 통을 흔들어 그 안에 있는 막대를 뽑아 점을 치는 모습이 조금 생소해보였다. 육효는 옛날, 거북이 등껍질에 팔괘를 그려 만든 통에 대나무 막대기를 넣어 흔든 후 그것을 뽑아 점을 친 것에서 유래해 거북점이라고도 부른다. 모두 여섯 개의 막대를 뽑으면 그 끝에 그려진 붉은 칠의 의미를 해석해 처한 입장과 진로 등을 점치게 된다. 이미 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사주와 달리 점치는 당시의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다른 점괘가 나오는 게 특징이다.

만인의 바람은 돈! 건강! 이성!

“만원 한 장에 관상, 손금, 궁합, 택일 안 봐주는 게 없어~.”
종로와 인사동 일대의 고만고만한 집들은 모두 만원이라는 균일가에 손님들 궁금증을 풀어 준다. 미아리 일대의 가격이 최하 3만원에서 시작하는 것에 비하면 가벼운 가격이지만 그만큼 소요되는 시간과 내용의 깊이 면에서 차이가 있다고.

점을 한번 볼 때마다 15분에서 30분이 소요된다는 박모(69)씨. 박씨는 찾아오는 손님이 가장 자주 묻는 질문으로 재복과 건강, 연애 운을 꼽았다.

“아 모든 사람들 공통의 화제가 뭐겠어? 돈, 건강, 이성 아녀? 그 세 개가 모두 하나로 통하는 거니까 두말할 것도 없지. 남자가 왜 돈을 벌겠어, 맘에 드는 여자 얻으려고 기를 쓰고 버는 거잖아. 요즘 같은 세상에 돈이 없으면 어디 이성이 붙겠어? 그렇다고 ‘웰빙웰빙’ 하는 시대에 건강이 없으면 돈이 무슨 소용이고. 그러니 너도나도 이 세 가지 복을 갖추려고 그렇게 용들 쓰는 거지.”

육효는 옛날, 거북이 등껍질에 팔괘를 그려 만든통에 대나무 막대기를 넣어 흔든 후 그것을 뽑아 점을 친 것에서 유래해 거북점이라고도 부른다.

박씨는 그러나 요즘 이곳을 찾는 발길은 뜸하다고 했다. 노상에서는 저녁 바람이 선선한 여름이나 가을이 성수기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머물지 않는 것은 매서운 날씨 탓만은 아니란다.
“날씨도 날씨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더 썰렁한 거 아니겠어? 주머니 사정이 빠듯하면 사람들의 호기심도 얼어붙기 마련이거든. 이 일도 경기를 많이 타는 분야라서 올해는 전반적으로 비수기야. 자기 생활이 안정적일 때 점을 볼 여유도 생기는 법이거든. 사람들은 주머니가 마르면 좀체 이런 데에 돈을 쓰려하지 않아.”

그 말마따나 주위를 둘러보니 퇴근 손님을 맞는 주점과 식당들로 한창 북적여야 할 저녁 시간인데도, 인사동거리가 꽤 한산했다. 따뜻한 실내를 찾아 총총이는 사람들의 발걸음에서도 유난스런 한파가 느껴졌다.
박씨의 주 고객층은 거리의 성격상 2·30대의 젊은 남녀가 주를 이룬다는데 그 중에서도 30대의 비중이 가장 크단다. 이 30대가 주 고객층이라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또 다른 시대상을 엿볼 단서를 만날 수 있다.

“옛날에야 30대가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장을 다니고 가정을 꾸려나갈 나이지만 요즘은 어디 그래? 직장과 승진, 결혼 어느 면에서나 확실한 안정을 갖추지 못한 그 또래가 얼마나 많은데.”
그만큼 사회적으로 불안한 위치에 있는 연령대가 30대라는 뜻이다. 그래서 일까. 2·30대 사이에서는 요즘 재복이나 궁합 같은 정석 외에도 공무원시험 합격과 사업상담 등 현실적인 질문들이 줄을 잇는다고 했다.

실제로 진로문제 때문에 점집을 찾았다는 김현숙(25)씨는 곧 졸업을 앞둔 대학 4학년생이다. 취업에 성공한 친구들이 하나둘 자리 잡아 나갈 때 혼자만 남은 것 같아 마음고생이 많았다는 그는 다가오는 하반기 공기업 합격을 목표로 시험 준비를 결심했다. 하지만 바늘구멍에 비유되는 합격률 탓에 도무지 마음이 잡히지 않아 기분전환 겸 의지처로 점집을 찾았다고.

“어차피 꿈을 좇아 진로를 결정한 건 아니에요. 안정성과 경제성을 따져 제 미래를 설계한 끝에 내린 결정이니까요. 그래서 타고난 사주에 맞춰 지원 기업을 선택하는 게 어떨까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왔어요.”

그 말을 듣자니 가슴 한편에 착잡한 여운이 감도는 건 또 왜 일까. 사주보다는 혈액형에 더 열렬한 신뢰를 보이는 이들 세대도 미래가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게 사뭇 씁쓸한 탓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곳을 찾는 이들이 다 한 단계 꿈을 접은 사람들뿐이라면 인생이 얼마나 재미없을까. 방문객의 대부분은 각자 자기만의 규모와 계획으로 인생을 긍정하려 애쓰는 소시민들이다. 

“복이랄 게 뭐 있어? 잘 먹고 잘 쉬다 편안히 가면 좋은 인생 산 거지. 요즘 같은 세상에 직장 잘리지 않고 무탈하게 사는 것도 어딘데. 별 꿈 없어, 난. 그냥 아프지 않고, 가족들 다 건강하고, 자식들 하는 일 번창해서 지들 앞가림 순탄히 사는 거 말구는…. 거기에 뭐냐 거…”

새 손주 이름이나 하나 지어줄 요량으로 이곳을 찾았다는 김순남(67)할아버지. 새해 소망을 묻는 질문에 이 나이에 바랄 것 뭐 있겠느냐며 뚱한 표정이던 그도 어느새 끊어질 듯 말 듯 말끝을 늘여 나간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손주의 몫까지, 바람이란 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바통 터치를 한다. 누군들 크게 다를까. 이것이 바로 우리들, ‘별 욕심 없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마음일진데. 

“바닥은 쳤으니 새해는 살 맛 나리!”

간단한 소액 결제만 거치면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한해 운세를 받아 볼 수 있는 요즘, 이 미지의 세계는 더 이상 특별한 사연이 있는 이들만 찾아가는 금단의 영역이 아니었다. 발품 팔아 유명 점집까지 찾아가진 않을지라도 살다보면 재미로든 호기심으로든 혹은 믿음으로든, 손금 한번, 신문 귀퉁이 오늘의 운세 한번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이렇듯 과학이 나날이 발전하는 시대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역술가들을 찾는 이유는 우리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존재들, 바로 ‘소망을 품은 인간 군상’이기 때문일 거다. 그것이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현대문명 속에서 밤마다 오롯한 불을 밝히는 이들 역술가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득 현암선생이 귀띔해준 새해 전반운이 떠오른다.

“그간 지독한 불경기였어. 하지만 병술년은 조금 나아질 거야. 경제도 국운도 슬금슬금 살아날 운세거든. 이미 바닥은 쳤으니까 자영업자든 월급쟁이든 지난해보단 더 살맛 날거라 봐.”
역술의 세계를 긍정하든 그렇지 않든, 듣는 모든 이가 믿어버리고 싶어 할 말이다. 그만큼 힘들었던 묵은 해였으니, 이젠 그 긴 터널을 한번 벗어나 보자. 신년 운세도 마음가짐도 우리 편이니 이젠 정말 해볼만 하다!

글·사진/김혜경 기자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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