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독립제작사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규용 씨가 작업실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것만큼 힘든 일이 또 있을까. 매일 반복된 생활을 우리는 지겨워하면서도 하루라도 그 일을 쉬게 되면 무언가 허전한 느낌부터 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과거 화려하게 활동하다가 은퇴를 하면 우울증에 빠지기가 쉽다. 과연 제 2의 삶을 어떻게 개척해 나가야하는지 막연한 부담감 때문에 자칫하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제 2의 은빛인생을 살고 있는 이가 있다. 바로 MBC프로덕션 이사로 활발한 활동을 해오다 은퇴한 이규용(61·현 독립제작사협회 편집위원)씨. 옛날 같으면 크게 잔칫상을 벌일 환갑에 그는 새로운 은빛인생을 시작했다. 그간의 사회생활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투잡 족? 저는 오팔 족입니다”

이규용 씨는 요즘 여느 젊은이 못잖게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2004년 정들었던 방송국을 떠났을 때는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었단다. 퇴임 후 1년 동안  바쁜 일상 때문에 미쳐하지못했던 취미를 즐기며 난생 처음 여유라는 것을 가져봤다.

“집에서 놀면 마냥 마음 편할 줄 알았는데, 일 하던 것이 습관이 됐는지 1년 정도 쉬고 나니까 몸이 근질근질해지면서 우울해지더라고요. 이러다 내가 정말 필요없는 사람이 되는건 아닌가. 그런 무서운 생각도 들었어요. 때마침 MBC에서 친분이 있었던 심재주 선배에게 연락이 왔어요.”

이씨는 심재주(독립제작사협회) 사무총장의 권유로 다시 산업 현장(?)으로 복귀했다. 외주제작 시스템의 확대로 외주 프로덕션이 활발해 지고 있는 최근 방송가의 추세에 이규용 씨 같은 베테랑 언론인이 필요했던 것.‘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또다시 방송관련업으로 돌아온 이씨는 물 만난 물고기 마냥 왕성한 활동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는 독립제작사협회 소속 후배들의 방송 프로그램제작에 조언을 하는 한편 협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KIPA저널에도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매달 발행되는 월간지라 인터뷰 섭외하고 취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라지만 이씨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전공인 ‘미술’과 ‘미디어’계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현재 박홍근 홈패션에서 홍보와 광고, 인테리어 등을 맡아 활동 중이다. 일주일에 사흘이면 어김없이 홈패션에 출근해 직원들과 어떻게 하면 고객이 만족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지 연구하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요즘 사람들이 나보고‘투잡족’이라고 해요. 하지만 나는 오팔족(active life)라고 말하고 싶어요.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사람이라나?(웃음) 일을 강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말이죠. 사실 방송인으로 살 때는 여유라는게 없었어요. 가족들과 함께 한 추억이 무엇이었나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없지요. 일을 할 때는 몰랐는데, 방송국이라는 곳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다는게 무엇보다 좋습니다.”

때문에 이씨는 후배들에게 “여유를 갖고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하라”고 강조한다. 방송국을 퇴사하고 나면 아무도 써주지 않는 신세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 이씨가 밝히는 이유다. 이와 더불어 이씨는 “구태의연한 말 같지만 ‘초심을 잃지 말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시대 마지막 ‘장서가’

이씨는 이시대 마지막 장서가다.
그는 책의 해였던 1993년에 한국출판문화협회가 선정한 ‘모범장서가’로 선정됐지만 이후 대가 끊겼다. 덕분에 이씨는 얼마남지 않은 장서가 그룹의 막내에 속한다.

“출협에서 대상자를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모범방서가 제도를 폐지하는 바람에 제가 마지막 수상자가 됐지요. 모범장서가들이 모여 만든 장서가클럽에서도 회원들이 대부분 70~80대여서 저는 가장 젊은 축에 듭니다.”

월간 KIPA저널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이규용 씨가 인터뷰를 하며 즐거워하고 있다.<사진:독립제작사제공>

장서가의 길은 어렵다. 일단 책을 사는 데 돈이 들고 귀한 책을 구하기 위해서는 발품도 많이 팔아야 한다. 책을 보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공간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이씨가 책을 모으기 시작한 60년 무렵은 책을 문화와 교양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었다.

“글쎄 본능적으로 책을 모은 거죠. 헌책방이나 고물상에 가서 괜찮은 책을 보면 ‘내가 가져다 놓지 않으면 쓰레기나 파지가 돼 사라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하나둘 챙긴거죠.”

책읽기를 좋아했던 그는 고등학교 때 담임을 맡았던 서지학자 고 하동호 선생의 책 심부름을 하면서 책의 가치에 눈을 뜬 뒤 헌책방과 고물상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현재 소장하고 있는 책만 4만여 권에 달하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좋은 책을 사서 모으는 일은 쉬지 않고 있다.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씨도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서 고서들을 구하게 됐다는 점이다.

“헌책방에 가봐도 참고서 뿐이에요. 책이 오래오래 유통되려면 헌책방이 활성화돼야 합니다. 중간 유통단계가 없으니까 요즘 책들은 신간코너에서 나온 뒤 폐지공장으로 직행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워요.”

40여 년 헌책방과 고물상을 뒤지며 고서를 모아 이젠 그걸 바라보기만해도 흐뭇할 것 같지만 그에게는 남모르는 고민이 있다. 자신이 모은 ‘역사적 자료’들이 사라져버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이다.
“제 아이들조차 이런 고서는 줘도 안갖는다고 해요. 글자는 작지, 세로쓰기지, 맞춤법도 다르지, 누가 읽기나 하겠어요. 도서관에 기증하기도 힘듭니다.”

그의 장서가로서 소원은 자신이 모은 책들도 ‘창고에 처박혀 있지 않고 주인 잘 만나 훈증소독도 하고 호강하며 사는 것’이다.

독립제자사협회 작업실에서 심재주 사무총장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

  이씨 모은 장서 중 가장 애지중지하는 책은 「수제본 삼국지」다.
“간직하고 있으면 언젠가 쓰임새가 있겠거니 싶은 책들을 보면 왠지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직업도 책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는데 혼자서 이것 저것 모으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40년이 되었습니다.” 한국전쟁통에도 문학도들의 갈증을 채워준 50년대 문학잡지 「문예」, 한 월간지가 40년 동안 매년 1월호에 낸 부록들, 화집이나 도록이 부족하던 시절 인기 높았던 한 제약회사의 명화 달력 40년치…. 이젠 찾아보기 힘든 책과 자료들을 한자리에 모아 지난해 이색 전시를 열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런 취미생활이 있었기에 과거의 우울증이 찾아왔을 때도 가뿐히 할 수 있겠지 싶다.

화려한 은빛인생… 인생은 60부터

지난해 이색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이씨는 앞으로 미술과 관련한 이색전시회를 가질 계획이다. 본래 미술을 전공해 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술관련 자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림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자료를 갖고 전시회를 열고 싶어요. 40년 전 미술행사는 어떻게 열렸는지 이런 것들을 연대별로 정리해 놓으면 나중에 자료로 활용할 수도 있고 재미도 있을 것 같습니다. 미술자료전시회를 마치면 그 자료들을 관련 연구기관이나 단체에 기증할 예정입니다.”

이씨는 아내와 시간을 많이 보낼 계획도 세웠다. 남들처럼 여행도 다니고 데이트(?)도 하면서 젊은 시절 일에 빠져 돌보지 못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고.
그는 정년퇴직 후 새로운 인생을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으라”고 당당히 말한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설계해 나가는 이규용씨. 그의 화려한 은빛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평소 어떤 분야의 전문성을 갖고 있다면 은퇴 후에도 어딜가서 재미 있게 일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이를 찾지 못했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장 자신있는 것,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실천해 보세요. 우리 아직 늙지 않았잖아요.”

글·사진/박경미 기자

박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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