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감사할 일은 참 많지만 유독 힘들고 외로울 때 드는 감사가 있다. 바로 위로받을 수 있는 안식처가 있다는 것. 꿈이 좌절 됐거나 타인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스스로가 별 볼일 없는 한낱 인생으로만 느껴질 때…

이런 위기의 순간마다 유독 가슴을 파고드는 한 줄기 등불 같은 존재는 가족이다.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눈앞에서 열리는 작은 대문과 지친 몸을 누일 수 있는 잠자리가 준비된 작은 낙원. 그 곳에는 늘 우리와 닮은꼴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서로 존칭 쓰는 동갑내기 부부

두 번째 Sweet Home 인연으로 만난 천성관(40)·윤영심(40)씨 부부는 참 많이 달랐다. 풍채부터 남다른 남편 성관 씨가 사교적이고 활동적인 마당발이라면 13년 째 유치원 교사를 맡고 있는 아내 영심 씨는 말수 적고 수줍음 많은 현모양처 스타일이다. 이런 두 사람이 모여 한 가정을 이루고 산지도 벌써 10년째. 그 사이 큰아들 창영(9)과 둘째아들 병희(8)가 연년생으로 나고자라 복닥거리는 재미를 안겨줬다.

이들 천씨 부부의 처음 만남도 남들처럼 작은 에피소드가 있다.
성관 씨는 원래 영심 씨의 동갑나기 외삼촌과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다. 성격 좋고 재미난 친구 하나 소개해 주겠다는 외삼촌의 말에 부담 없이 나간 영심 씨였지만 성관 씨가 약속장소에 모습을 보인 건 4시간이나 늦은 후였단다.

“회사에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업무를 마치고 부랴부랴 달려갔는데도 그렇게 늦었지 뭐예요. 그러니 제 이미지가 어땠겠어요. 미안해 죽겠지, 앞에 앉은 여자는 마음에 들지, 속은 타는데 아내는 자기 외삼촌하고만 쑥덕거릴 뿐 저한테는 눈길 한번 안주더라구요.”

한사코 쫓아다닌 성관 씨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지금쯤 다른 집에 살고 있을지도 모를 거라나.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이들 부부가 결혼에 성공하기까지는 8개월이라는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후 10년 간 서로를 닮은 두 아이를 낳고 별 탈 없이 살아온 천씨 부부다. 남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이들이지만 조금 특이한 게 있다면 동갑내기 부부가 서로 존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편한 친구처럼 지낼 만도 한데 대화의 말미가 늘상 “~요”로 끝난다. 

“결혼을 계획하면서부터 남편과 상의한 일이었어요. 가정을 이루면 서로를 더 존중하며 살자는 의미로 존칭을 사용하기로 했거든요. 남들은 덜 친해 보인다고들 하지만 말이 부드러워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싸울 일도 줄어들더라구요.”
역시나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고자란 말썽쟁이 두 아들도 부모에게 존댓말이 깍듯하다. 첫째 아이는 옹아리를 “~요”로 끝맺었을 정도라고.

창영이와 병희. 한창 경쟁하며 크는 연년생 답게 공부도 체육도 호각을 다툰다고.

두 아이가 예의바른 데에는 교육열이 남다른 할아버지의 영향도 컸다. 지금도 아침저녁으로 두 손주와 통화하며 안부를 묻는 할아버지는 매일같이 아이들을 찾아와 손수 한자를 가르치고 있다. 덕분에 4살 때 이미 천자문을 뗀 두 아이는 웬만한 한자는 눈감고도 그냥 쓰는 실력자가 다 됐다. 한창 경쟁하며 크는 연년생답게 공부도 체육도 호각을 다투고, 각기 다른 식성 탓에 외식 한번 하려면 누구 하나가 양보하기 전까지 타협을 봐야 한단다.

“말도 마세요. 여간내기들이 아니에요. 말끝마다 ‘평등’을 달고 산다니까요. 오늘 형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었으면, 내일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동생이 좋아하는 음식을 대령해야 하루가 편해요.”
두 녀석 등쌀에 비위 맞추기 힘들다며 영심 씨가 웃는 얼굴로 앓는 소리를 했다.

아이 키우며 알아가는 부모의 내리사랑

첫째 창영이는 건장한 체격부터 식성, 장난꾸러기인 성격까지 아빠를 빼다 박았고, 둘째 병희는 외모와 성격이 엄마의 판박이다. 때론 치고 박고 닮아가면서 서로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형제가 되길 바란다는 성관 씨는 아이들을 통해 전엔 몰랐던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며 담담히 고백한다.

“제가 참 불효자였거든요. 저 하고 싶은 것 하며 산다고 속도 많이 썩혀 드렸는데, 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이 되다 보니 자식 모습 하나하나가 모두 내 살처럼 아프고 귀한 게 새삼 내 부모 마음이 이랬구나, 할 때가 많아요.”

그의 말처럼 결혼 1년 만에, 그것도 연년생으로 생긴 두 아이는 남편 성관 씨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한창 직장에 매달려야 했던 결혼 초기, 남편에서 아빠로 가장의 영역을 넓혀가며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아가게 된 게 ‘양성평등 사회를 꿈꾸는 아버지들의 모임’이었다. 슬하에 딸아이를 두진 않았지만 두 아들이 커서 진정 멋진 남편과 아버지가 될 수 있도록 그 밑거름이 되고 싶었다는 천씨. 평소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모임의 뜻을 살려 바람직한 밤문화를 제시하고픈 바람도 갖고 있다. 

“아버지들을 가정에 돌려보내는 일에 관심이 있어요. 저도 술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밖으로 돈다고 해서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도,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더라구요. 술도 좋고 친구도 좋지만 가정에 소홀해지면서까지 지킬 건 아닐 텐데, 우리나라 남자들, 바깥 문제를 집안에서 해결하려는 생각은 좀체 하지 못하잖아요.”

여전히 술을 좋아하는 천씨지만 비싼 돈 주고 속 버려가며 먹는 술은 사절이라고 한다. 대신 친구들과 함께 먹는 기분 좋은 술, 집에서 아내가 만들어주는 안주와 함께 즐기는 술이 훨씬 맛나단다. 지지고 볶아도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 쉬는 게 제일 좋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남편만 변해야한다는 건 아닙니다. 아내들도 노력해야죠.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도록 미끼를 많이 줘야 해요. 제 경우에는 미끼가 음식이고요.”

유난히 육식을 좋아하는 그는 집에 돌아와 아내가 해 놓은 전골요리를 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 온 가족이 둘러 앉아 고기를 끓이고 서로 쌈을 싸 먹여주는 그 시간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순간이란다. 그 속에서, 음식은 먹어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준비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란 단순한 진리도 알게 됐다. 자신을 기다려지게 만드는 아내가 좋다며 성관 씨는 가끔씩 영심 씨에게 긴장의 끈을 놓지 말라는 ‘당부’ 도 잊지 않는다.

“저이가 얼마나 요구가 많은데요. 어쩌다 상차리기에 소홀해지는가 싶으면 왜 월급날인데도 반응이 시원찮느냐며 꼭 한 마디씩 해요. 대충 넘기려다가도 요리 하나 안 만들 수 없게 만든다니까요.”
아이들 가르치랴, 살림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영심 씨지만 가족들을 위해 요리책을 펴는 건 늘 즐겁다. 맛있게 먹어주는 가족들 보는 재미도 재미지만 식사하는 그 시간이 밀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최적의 기회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가정불화의 대부분은 대화단절에서 오는 오해잖아요.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식사 때 나눈 아이들과의 한마디, 자기 전 배게 맡에서 나눈 부부의 한마디로 현재 우리 가족의 상황을 알 수 있더라고요. 아, 우리 아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구나, 남편은 직장에서 어떤 문제가 있고, 아내는 지금 이런 꿈을 꾸고 있구나…. 그런걸 알게 되면 그 순간 내가 특별히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더라도, 대화를 나누기 전보다 훨씬 서로의 마음이 편해져 있는 걸 느끼게 돼요.”

“가끔은 가족만 바라보는 남편이었으면”

이렇듯 순탄하게 가정을 일궈 온 잉꼬부부지만 이들이라고 살며 맞닥뜨린 소소한 고비가 없었을까. 서로에 대한 아쉬운 부분을 토해 보자는 제안에, 영심 씨가 먼저 조심스럽게 속내를 내비췄다.

“다정하고 가정에도 충실한 남편이지만, 술과 친구들을 너무 좋아하는 게 한편으론 많이 서운해요. 제가 이이를 모르던 때부터 힘든 길 함께 걸어온 친구들이라 형제처럼 아끼는 거야 이해하지만, 가끔 친구들이 우선순위는 아닌가 싶을 만큼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거든요.”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여행이 있을 때엔 어김없이 가족들을 동반하고 나서는 남편이지만, 가끔은 가족끼리 떠나는 여행에 더 열심인 남편을 보고 싶은 게 솔직한 윤씨의 마음이다. 숨겨놓았던 아내의 속내에 성관씨의 마음에도 잔잔한 파문이 이는 듯 했다.

“몰랐어요. 아내가 왁자지껄한 모임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늘 함께 해주어서 그냥 쉽게 지나쳤나 봐요. 그러고 보니 나란 사람이 참 무심했네요. 가족동반으로 떠난 여행이니까 아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할 도리는 다 했다고 생각했거든요. 다들 즐겁고 흡족하리라고만 생각했지 아내가 이렇게 가족만의 여행을 고파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어요. 새삼 미안하네요….”

아기자기한 행복을 꿈꾸는 아내의 모습에 묻어두었던 고마움과 미안함이 한꺼번에 고개를 드는 모양이었다.

“8대 장손에게 시집와 묵묵히 시댁식구들의 사랑을 얻어낸 아내가 늘 고마울 뿐이에요. 생각해보면 결혼 전에는 친구도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만나지 못하더라구요. 그만큼 자기 삶의 많은 부분을 양보한 거겠지요. 아내가 노력하는 반만이라도 아내 친정에 잘 해야 했는데, 돌아보면 크게 마음을 쓰지 못했어요.”

불만을 토로하는 자리에 미안함이 먼저 자리를 메우니 영심 씨가 괜히 미안한지 한 마디를 보탠다.

“왜 이래요, 나도 미안한 거 많아요오~. 내가 일 욕심이 많아서 가정에 신경 못 써준 것도 많을 텐데, 아무 얘기도 안하니까 내가 더 미안해지잖아요. 일에 채이다보면 마음과 달리 말이 예쁘게 안 나올 때도 있고 짜증날 때도 있는데, 당신이 잘 받아줘서 늘 고마웠어요.”
이렇듯 각기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면서 조금씩 공통분모를 만들어가는 게 가족이다 싶다.

“살며 때때로 왜 불안하지 않겠어요.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다가도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사람 사는 모습인데.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이렇게 튼튼히 커주는 자식들에 착한 아내가 있는데 힘을 안 낼 수가 있나요. 평범함 속에 행복이 있다고 그러잖아요. 그 행복은 우리 식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가능한 거라 생각해요. 빈집에 들어가 느끼는 편안함이 내 가정에 들어와 느끼는 안락함과 비교할 수 있겠어요?”

천씨는 가정을 ‘담’이 아닌 ‘울타리’에 비유했다. 다른 세계와의 경계가 분명하지만 바깥과의 소통이 가능한 낮은 테두리 속 폭폭한 공간. 이 속에는 휴식이 있고, 사랑이 있고, 생명이 있다. 그리고 우리 삶을 영위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은 바로 여기에서 뿜어져 나온다.
딱 지금만큼만 노력하고 채워주면서 살아갔으면 한다는 이들 부부의 소소한 바람이 오늘도 충실히 제 길을 닦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글/김혜경 기자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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