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지지 않도록 꽁꽁 묶어 드릴께요~ 라면 박스를 나르고 있는 김혜경 기자.

누구나 잔뜩 움츠러드는 엄동설한이지만, 겨울 추위가 유독 매섭게 느껴지는 이들이 있다. 사회가 제대로 보듬어 안지 못한 까닭에 따뜻함이 절실한 이 계절이 더욱 춥고 외롭게 느껴지는 우리 이웃들. 그렇기에 이 맘쯤이면 어김없이 이어지는 사회 곳곳의 작은 훈기가 더욱 값져 보이기도 하다. 그 작은 움직임에 동참하고자, 일찌감치 점찍은 곳이 바로 영등포구 장애인단체총연합회가 주최하는 ‘장애인 돕기 나눔 한마당’에서의 자원봉사였다. 각계에서 보내온 물품들을 영등포구 관내 저소득 장애인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된 뜻 깊은 자리에 함께 해 보았다.

“라면 박스만 1000개가 넘어요”

힘쓰는 일이라며 내심 장정의 방문을 바라던 주최측 담당자의 아쉬운 목소리를 뒤로하고 행사장에 도착한 것은 아침 9시. 행사 시작까지 제법 여유를 두고 갔지만 행사장 로비에는 시작 전부터 몰려든 인파가 부산히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저기 모처럼 만난 사람들의 반가운 인사말과, 회원증을 소지 못한 사람들과 주최측간의 실랑이가 심심찮게 오가는 어수선함 속에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던 것도 잠시. 누군가 챙겨주기를 바라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해 보여 눈치껏 봉사자용 노란 조끼를 걸친 사람들을 쫓아 무리에 섞였다.

제법 큰 행사규모답게 모인 자원봉사자 수도 만만치 않았다. 관내 새마을부녀회와 환경미화단체, 중고교 학생들을 비롯해 곳곳에서 몰려온 도움의 손길들로 여기저기서 노란 물결이 넘실댔다.
‘이 인원이 전부 달려들면 금방 끝나겠는데?’

싱겁게 끝날 기자체험을 우려하던 경박스러움도 잠시, 야외 주차장으로 나가자 건물 한 면을 가린 박스들의 ‘웅장함’이 한꺼번에 눈을 덮쳐온다. 90여 업체에서 후원 받은 라면과 갖가지 생활용품 박스가 즐비하게 늘어선 모양이 반듯하게 지어놓은 건물의 한 벽면 같다.
“조금 많지요? 라면 박스만 천 개가 넘어요. 그래도 해마다 모자란다니까요.”   

예상되는 장애인 참석자 수만 1,000명이 넘는다며 옆에 선 인솔자가 은근슬쩍 겁을 주었다.
“상자를 뜯어 안에 있는 물품들을 봉투 안에 담아 포장해 주세요. 내용물에 차이가 나면 형평에 안 맞으니까 균형 있게 이것저것 잘 섞어서요.”
인솔자가 조별로 맡을 일을 배정하자 봉사자들도 일사불란하게 헤쳐 모였다.
우선 떨어진 일은 봉투 뜯기. 이보다 단순한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하며 상자 뜯기에 바쁜 아주머니 옆에 섰다.

검은 비닐봉투를 뜯어 건네면 옆에 선 봉사자가 물품을 넣기 좋게 봉투 입구를 벌리고, 또 다른 봉사자들이 그 안에 과자며 양말, 치약, 영양제 등 곳곳으로부터 전달된 생필품을 나눠 담았다. 말 그대로 협동 분업. 각자의 역할로 하나의 선물꾸러미가 완성되고 운반되는 게 눈 깜빡할 새에 금방이다.
손은 계속 움직이면서도 입은 주위 봉사자들과 시종일관 떠들어댈 수 있으니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데 문제가 하나 있다면 쌩쌩한 겨울 추위다. 시간이 지날수록 붉게 상기된 봉사자들의 입에서 연신 뽀얀 입김이 뿜어 나왔다.

야외에서의 작업이 두 시간을 웃돌자 여기저기서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협회 직원이 봉사자용 ‘구호품’으로 양말이며 면장갑을 돌렸지만 덧신은 양말 위에 한 겹을 더 신고도 추위가 쉽게 가시지 않을 만큼 날씨가 매서웠다.

황금휴일을 보다 값지게 쓰는 사람들

양말을 겹쳐 신고 조끼 안에 외투까지 잔뜩 껴입은 탓에 몸이 둔하고 무거웠다. 장갑을 벗은 채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비닐봉투를 뜯는데, 얼어버린 손마디 탓에 비닐 봉투가 재깍재깍 낱장으로 뜯어지질 않는다. 다른 봉사자들의 노련한 몸놀림에 보조를 맞춰주지 못하는 게 미안해서 괜스레 마음만 급해지는데, 초조한 마음이 얼굴에 드러난 걸까. 아주머니 한 분이 “천천히 해, 천천히. 마음 즐겁자고 하는 일 아니야? 왜 이렇게 서둘러어?”하며 끼고 있던 장갑 한 짝을 벗어주신다.

말이 나온 김에 언 몸도 녹일 겸 초코파이 한 상자를 터 출출한 속을 달래기로 했다. 자판기 커피 한잔씩을 뽑아들고 삼삼오오 모여서니 매섭던 칼날 바람도 조금은 무뎌진 것 같았다.

“초코파이 이거, 보기엔 지겨운데 먹는 건 영 즐겁네?”
10년을 한결같이, 시간 날 때마다 봉사활동을 해왔다는 박두헌 씨가 그동안 자신이 나른 초코파이만도 수천 박스는 될 거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휴일도 아닌 이날 모인 자원봉사자들 대부분이 박씨처럼 비번을 이용해 참가한 교대근무자들이었다. 강남성모병원 직원 변경애(50)씨 역시 교대근무를 끝내고 나온 자원봉사자로, 뜻있는 일에 황금 같은 휴일을 반납한지 일년 째라고 했다.

“작년부터 병원 직원들 모두가 비번을 이용해 매달 한번씩 봉사를 나오고 있어요. 처음에야 야간 근무를 끝내고 봉사 나오는 게 힘들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렇게 보낸 하루가 더 거뜬하고 기분 좋아요. 그 기분에 봉사하지 안 그럼 못하지요.” 
황금 같은 휴일을 황금 보다 값지게 활용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생애 첫 일일봉사를 나온 마음이 조금 부끄러워진다.

그렇게 막간을 이용한 간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금 분업에 열중하다보니 어느새 500개의 초코파이 상자가 사라지고 없었다. 뒤를 잇는 목도리와 내복세트, 영양제까지…. 몇 백 개의 비닐봉투를 더 뜯고 새로 포장했을까. 어느새 박스로 만들어진 벽이 한 줄 두 줄 허물어 가는 게 보였다. 

  장장 네 시간에 걸친 단순 노무(?)의 고비를 넘어, 다음으로 투입된 일은 식당 홀에서의 점심식사 나르기. 하지만 갖가지 반찬과 과일, 음료를 올린 쟁반의 무게는 만만찮았다. 수십 개의 탁자에 음식접시를 놓는 것도 일이지만 넓은 홀 안, 발 디딜 틈없이 북적이는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게 무엇보다도 큰일이다. 음식을 재촉하는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니 얼굴이 금세 달아오르는 게 표정관리하기도 힘들어졌다. 늘상 시켜 놓은 음식만 받아먹을 줄 알았는데 직접 서빙을 해보니 새삼 깨닫게 되는 역지사지의 시간. 기다리는 자는 일분일초가 짜증스럽고 나르는 자는 손이 두개인 게 한일뿐이다. 그렇게 행여 부딪힐까, 쏟을까, 모자랄까, 안절부절하며 음식을 나르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도 훌쩍 지났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나르고나니 어느새 잔뜩 허기가 들었다. 일손도 모자란 와중에 누가 날라주는 밥상 받기는 애초부터 물 건너갔을 뿐 아니라 홀 안에는 빡빡하게 모여든 장애인들로 봉사자들이 앉아 밥 먹을 테이블도 없다. 눈치 빠른 봉사자들은 손수 쟁반을 들고 건물 로비 한구석에 모여 앉아 옹기종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찬 바닥에 옹그리고 앉아 먹은 퉁퉁 불은 국수였지만 수십 명의 자원봉사자들과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며 먹는 맛이 제법 괜찮았다.

꽁꽁 동여맨 노끈처럼…

잠시 후, 이날의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상품 추첨 시간이 끝나자 쌀이며 이불세트를 든 장애인들이 봇물처럼 밀려나왔다. 행사의 막바지 분주함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순간이었다. 이번에 해야 할 일은 장애인들이 들고 가기 편하게 물품들을 노끈으로 한데 묶어 주는 일. 가는 길에 끊어지지 않도록 두 번 세 번 단단히 묶는 게 관건이지만 이 역시 손이 언 탓에 노끈 당기기도 만만치 않았다. 
 
“아 고 아가씨 참 못 묶네. 도중에 풀어지는 날에는 몽땅 허사야!”
애써 묶은 짐이 스물스물 풀려버리자 매듭 묶는 법을 가르쳐주던 아저씨가 밉지 않은 퉁을 줬다. 하지만 실력이 노력만 못하다 했던가. 있는 힘껏 동여맨 상자를 받아 안는 한분 한분의 얼굴에 미소와 감사의 답례가 끊이지 않았다.
“하, 젊은 사람이 제법 야무지구만!”
“이만하면 절대 끊어질리 없네. 고마워 학생~.”

누가 묶었는지 몰라도 노끈으로 세 번 네 번 칭칭 휘감은 라면박스를 받아든 할아버지가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네며 발길을 돌렸다. 누가 봐도 엉성한 솜씨였지만 행여 끊어질세라 두배 세배로 감아준 사람의 배려가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일 테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산더미처럼 쌓였던 라면 상자들도 어느덧 바닥을 드러내고,서둘러 뒷정리를 끝마쳤을 땐 이미 저녁 해가 저만치 기울고 있었다.

생활 속에선 좀처럼 맛보지 못했던 ‘특별한’ 하루를 마치며 돌아오는 길. 새삼 봉사란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본다. 생활 속에 녹아있지 않기에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낯선 ‘봉사’. 하지만 이 ‘특별난’ 행위를 틈날 때마다 해 온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꼭 드러난 봉사의 현장에서, 자원봉사 띠를 둘러야만 봉사는 아닐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골목 어귀에 사는 독거노인의 초인종을 눌러 안부를 묻는 일, 길거리 취객의 안전을 위해 112번호를 눌러주는 일, 휘청이는 노인의 손을 잡고 함께 에스컬레이터 위를 오르는 일…. 이 모두가 마음 없이는 불가능한 생활 속의 작은 봉사다. 이 생활 속 작은 행동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나눔의 기쁨을 체험하다보면 이날 만난 사람들처럼 삶과 봉사의 거리도 어느덧 좁혀져 있지 않을까. 문득 집에 돌아가 꽁꽁 묶인 노끈을 푸느라 애 먹었을 이웃들을 생각하니 작은 웃음이 새어나온다. 

글/김혜경 사진/최경훈 기자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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