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사랑사랑 내 사랑이야…”
모두가 퇴근한 화요일 저녁, 당산동 장애우문화센터에서 ‘더늠패’ 회원들이 사랑가의 한 구절을 구성지게 부르고 있다.
판소리 전문 강사가 멋들어지게 한 곡조 뽑으면 예닐곱 명의 회원들이 목청을 높여 열심히 따라 부른다. 장애가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판소리 특유의 창법을 무난히 소화해 내는 게, 꺾어 넘기는 솜씨가 그만이다.

‘더늠패’란 ‘판소리의 절정’이라는 뜻으로, 센터의 문화활동을 통해 만난 10여명의 회원들이 6개월 전 자체적으로 만든 판소리 소모임이다. 장애 여부에 관계없이 평소 판소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다. 

오! 가둬두었던 끼와 열정의 발견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전축으로 판소리를 들려주던 추억이 있어요. 그래서 작년 센터에서 소모임 구성을 논의할 때 판소리를 적극 추천했고요. 여전히 듣고 따라 부르는 수준이지만 들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던 이전과 비교하면 알게 된 게 많아요. 소리의 내용과 창법을 익히다보면 판소리라는 게 참 매력 있는 전통문화라는 걸 느낀다니까요. 얼마 전 영화 <왕의 남자>를 봤는데 내용 중에 춘향가의 한 구절이 개사 돼 나오더라고요. 배운 구절이 나오니까 반갑던데요?”

이 모임의 초창기 멤버인 김현실(30·하지장애)씨는 센터의 문화활동을 통해 하나 둘 문화욕구를 키워가는 풀뿌리 활동가가 됐다. 장애를 드러내기 꺼려했던 가족들 때문에 집안에 갇혀 지낼 때가 많았다는 그는 몇 해전부터 집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조금씩 관심분야를 찾아 나섰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자신에게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조용히 지내기를 강요받았기 때문에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채워지질 못했어요. 커가면서 다른 사람들은 이런 것 저런 것 다 해보며 주말을 보내는데, 나는 이게 뭔가 속이 상하더라구요. 그래서 용기를 내 가족들을 설득시키고 외출을 시작했어요.”

그가 집을 벗어나 조금씩 문화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몇 해 전 한 여성단체가 주최한 연극 한 편을 보고부터다.
“<춤추는 허리>라는 연극이었는데, 휠체어에 탄 주인공이 자신을 가두기만 하는 부모의 세계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내용이었어요. 그 주인공의 모습에서 저를 발견할 수 있었지요. 장애를 가진 사람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들이 많아요. ‘나는 할 수 없다’는 자신감 부족도 있겠지만 할 수 없게 만드는 주위 환경 탓도 많은데, 이곳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시도를 할 수 있었으니 저에게는 행운이었죠.”

한 편의 연극이 그의 삶에 대한 자세를 바꿔버린 것이다. 그렇게 영화도 보고 틈틈이 사진도 배워가며 김씨는 조금씩 자신에게 색다른 문화를 보여줄 수 있었다.
장애우문화센터의 박성준 활동가는 회를 거듭할수록 회원들의 모습에서 전과 다른 당당함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여러 문화를 접하는 기회가 늘어갈수록 회원들이 소극적인 태도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걸 확인할 수 있어요. 제약된 범위 안에서 단순히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던 문화체험 수준을 벗어나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내는 단계에 이른 주체자로서의 모습이 보여요.”

박 활동가는 회원들이 좀더 자기 의사를 표출하고 활동을 주도해 나갈할 수 있도록 센터는 최소한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소모임 역시 센터가 회원들 각자의 의견을 종합해 제반여건만 조성해 주었고, 그 안에서 회원들은 직접 시간과 주제를 정하고 모임을 이끌어 가고 있다.

4년 전부터 센터의 다양한 문화활동을 이용한 예옥주(42·지체장애)씨 역시 이곳 활동을 시작한 이후 생활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고 한다.
“우선 마음이 많이 밝아졌어요.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막상 장애를 가졌으면서도 내가 가진 장애나 다른 장애인들의 사정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거든요. 일단 접하는 범위가 넓어지다 보니 성격이 활동적으로 변하더라고요. 사람들 틈에 섞여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타인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두려움도 떨쳐버릴 수 있고, 사람 대하는 법도 배울 수 있고요.”

  예전엔 두 자녀 키우느라 문화생활이 한층 어려웠지만, 예씨는 이제 두 자녀와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문화센터를 찾는다. 예씨처럼 고충이 있는 회원들을 배려한 센터가 참여범위에 특별히 제한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덕에 그의 아이들은 얼마 전까지 마술과 마임 소모임에 빠져 엄마보다 더 이곳 프로그램을 즐기게 됐다고 한다.

예씨는 사회생활에 점점 자신감도 붙었다. 10년 전 따 놓았던 장롱면허를 꺼내 작년 4월부터 시내드라이브도 시작했다. 평소 여행을 좋아했지만 짧은 외출조차 엄두를 못 냈는데 이곳에서의 작은 경험들이 어느덧 용기를 준 것 같다고. 가정주부이자 늦깎이 대학생이기도 한 그는 사회복지에도 관심이 많아 다니던 대학에서 얼마 전 사회복지과로 편입을 했다. 센터의 활동을 통해 보고 느낀 것들이 그의 인생방향을 바꿔놓은 것이다.

문화활동 매개로 인식과 환경 개선까지

김씨와 예씨는 모두 센터의 레저버디(leisure buddy) 프로그램을 통해 하나둘 문화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레저버디는 회원들에게 보다 향상된 삶의 질을 제공하기 위해 2001년부터 시작된 문화복지 프로그램이다. 개별적 문화생활의 기회가 적은 장애인들에게 평소 접하기 어려운 레저활동을 비롯해 영화제 탐방이나, 공예제작 등 다양한 테마별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레저버디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레저활동을 나눈다는 것이다. 박성준 활동가는 “말 그대로 레저생활을 통해 친구가 된다는 의미예요. 장애를 가진 사람과 가지지 않은 사람이 한쪽은 도움을 주고 한쪽은 도움을 받는 일방적 자원봉사 개념을 넘어서, 문화활동을 매개로 진정한 만남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어요. 활동은 어디까지나 ‘같이 어울린다’는 생각으로 진행돼요. 모두가 문화활동의 주체라는 의식으로, 서로의 이해 속에 신나고 즐겁게 문화활동을 나누자는 의미가 있어요”라고 말했다.

이런 레저버디 활동은 사회환경개선운동의 연장선상에 있기도 하다. 장애가 없는 회원 역시 일방적인 ‘봉사’의 개념을 벗어나 ‘친구’로 다가가기 때문에, 활동 중 맞닥뜨리는 편의시설이나 이동권, 문화접근성 문제에 대해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뿐만 아니라 문제개선을 위한 운동에도 동참한다고.

장애인의 문화적 욕구가 증폭되면 개인의 창조성과 자기개발의 기재로 활용될 가능성도 높다. 박성준 활동가는 “그렇게 되면 장애인들의 문화활동에 일차적으로 참여하는 단계를 넘어 ‘생산자’로서의 역할도 가능하게 될 것”이라며 ‘생산적 문화복지’를 강조하기도 했다.
“현재 일선 학교에 상당수 배치되고 있는 강사풀제 역시, 문화복지 차원에서 ‘길러진’ 고급 장애인 인력을 적극 활용할 수 있는데, 아직 그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네요.”

문화활동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사회의식과 문화환경, 나아가 복지수준까지 개선해나가는 모색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 밖에도 문화연대에서 2004년부터 실천하고 있는 ‘달리는 놀이터’ 역시 문화를 공공의 영역, 삶의 영역으로 확대키위해 기획된 공공프로젝트다. 야외 영화관과 공연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5톤 트럭이 매달 2회씩 지역주민을 찾아가 문화 기회를 제공하는데, 주로 극장이 없는 외진 곳을 찾아간다. 소외 지역에서의 문화활동을 재구성하고 확대하는 공공문화운동으로, 시골장터와 거리에서의 작은 공연들, 이주노동자와 노숙인 등과 함께 하는 문화체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달리는 놀이터’의 기획을 맡고 있는 송수연 팀장은 찾아가는 문화복지 서비스를 접한 소외지역 주민들의 반응이 날이 갈수록 높아진다고 말한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다보면 문화향유에 대해 주민들이 갖고 있는 일종의 ‘갈증’이 느껴질 때가 많아요. 공연이 끝나면 으레 스텝과 활동가, 지역주민이 함께 모여 평가를 겸한 뒷풀이를 하는데, 그 속에서 듣는 주민들의 감상과 비평이 때론 그들 내면의 욕구처럼 들릴 때가 있거든요.”

송 팀장은 이 같이 단체가 펼치는 문화운동이 문화적 소수자를 위해 좀 더 다양한 문화를 기획하고 창작할 수 있는 ‘증폭의 채널’이 된다며, 문화복지의 잠재력을 실험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문화복지요? 글쎄요, 단순히 미술작품이나 공연을 보여주는 시혜적인 것만을 의미하진 않겠지요. 오히려 자본과 권력이 만들어 내는 획일적인 삶의 가치가 아닌, 문화를 매개로 타인과 공존하는 삶을 만들어가려는 순수한 원칙과 가치를 지닌 삶을 의미하지 아닐까요?”
접근성의 문제를 해소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무료티켓 교부에 지나지 않는, 현 문화바우처제도를 꼬집으며 한 말이었다.

문화의 불모지에 한 발 더 가까이

문화복지가 가능한 삶은 그렇게 먼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사회적 소수자들에게는 여전히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문화의 영역이지만, 앞에서 본것 처럼 갑절의 노력과 열정을 쏟아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있다. 문화향유는 이제 그 누구도 포기할 수 없는 삶의 보편적 가치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소수자들이 문화의 변두리가 아닌 그 중심에 다가갈 수 있도록, 우선적으로 참여기회를 확대하고 그 제반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 왕성히 문화의 영역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다. 그만큼 목마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론 더딘 도입이지만, 어떤 의미에선 문화복지의 온전한 토대가 잡히지 않은 지금이 오히려 기반부터 다져나갈 수 있는 적기일 수 있다. 자, 황량한 문화의 불모지에 하나 둘 작은 깃발을 꽂아보자.

 글/사진 김혜경 기자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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