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아들, 외딸로 자란 사람들은 종종 외로움을 푸념하곤 한다. 중학교 때 무남독녀로 금지옥엽 자란 친구 하나도 다섯 식구가 복닥이며 사는 다른 집을 부러워했다.

현관 앞을 가득 매우는 신발 더미에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소리가 담을 넘는 이웃집이 유독 부러웠던 명절날의 풍경. 할아버지 할머니에 줄줄이 엮이는 손자손녀까지…. 두루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워내던 화목한 모습은 샘날 정도로 정답고 그리운 것이었다. 아이 하나만 낳는 가정이 많아 식구라 봐야 서너 식구가 고작인 요즘이지만, 누가 뭐래도 가족은 여럿일수록 든든한 법인가 보다.

명절마다 40인분은 기본, 장손 집 맏며느리

두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원대희(52)·임영숙(48)씨 가정은 명절이 아니어도 언제나 집안이 북적인다. 부부 슬하의 세 남매까지 모이면 어느새 일곱이 돼버린 식솔도 한 몫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이웃해 사는 친척들이 수시로 찾아드는 까닭에 하루가 멀다 하고 손님상이 차려지는 게 이 집의 일상사이기 때문이다.

부친 원용범(77)씨 역시 7남매의 장남이다 보니 명절 때 모이는 친척 수가 많을 땐 40명을 훌쩍 넘는다. 일년에 치러야 하는 제사만도 6개. 온 친척이 성묘라도 한번 갈라치면 관광차 한대를 빌려야만 한다. 그러다보니 차려 내야할 음식도 만만찮다. 지난 설날엔 갈비 20근에 게장 4kg, 북어찜 20마리가 하루 만에 동이 났다고 하니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영숙 씨가 느끼는 부담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다.

“명절 한번 치르려면 힘이야 들지만 어머니께서 챙겨주시니 크게 어려운 건 없어요. 부지런하셔서 웬만한 장은 한 달 전에 봐두시거든요. 친척들 많은 거야 좋으면 좋지 왜 싫겠어요. 시끌벅적 모처럼 사람 사는 맛도 나고요.”  

직장 때문에 일찍부터 서울 타향살이를 해야 했던 영숙 씨, 가족의 든든함이 고파서인지 대희 씨가 장남이라는 사실이 처음부터 싫지 않았다. 부모 모시고 사는 게 당연하다 배워온 까닭도 있었지만, 며느리 감을 두 팔 벌려 환대해주신 시부모님 사랑에 일찍부터 한 가족이라는 마음이 우러나왔기 때문이다.

7대째 안양에 터를 잡고 살아온 원씨 일가에 영숙 씨가 시집 온 지도 어언 20여 년 전의 일이다. 이미 혼기가 꽉 찬 나이였던 터라 선도 제법 많이 봤던 대희 씨는 중매로 만난 아내가 처음엔 그렇게 끌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연락도 없이 일주일가량을 그냥 흘려보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날수록 자꾸만 생각나는 게 어딘지 여운이 남았다. 그 시간 동안 영숙 씨의 마음도 바짝 타들어가고 있었단다.

“선 보고 한참이 지났는데 연락이 안 오데요. 그래 인연이 아닌가보다 했는데, 별안간 만나자고 하더라구요. 둘 다 별말은 안 하고 헤어졌지만 선보던 날 첫눈이 내렸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왠지 이이가 남 같지 않았어요.”

두 사람이 만난 날은 22년 전 11월 11일. 요즘처럼 빼빼로데이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지만 만난 시간도 오전 11시라고 하니 캐보면 어딘지 낭만적인 구석이 나올 것도 같다. 결혼기념일에 맞춰 초코 과자 한 상자 사오는 센스 정도는 있을 법도 한데 영숙 씨, 듣자마자 절레절레 손사래부터 친다.

“에이~ 낭만이요? 이 사람 그런 거 없어요. 얼마나 무뚝뚝한데요. 평생 축구밖에 모르는 사람일걸요.”
“그런 거야 요즘 젊은 세대들이나 하지 내가 어떻게 하나. 그러는 당신은 뭐 낭만 있어? 애교 하나 없는 사람이 말이야~.”
머리를 긁적이던 대희 씨가 미안한지 되려 물귀신 작전이다.

“부모님 안 계셨으면 삼남매 못 키웠죠”

올해 축구명문 안영공고에 입학한 아들 종훈이. 한창때의 아버지를 따라 포지션도 수비전담 미드필더다.

은퇴 후 축구협회 관련 일을 맡고 있는 대희 씨는 얼마 전까지 지역에서 축구심판을 맡아왔다. 한창 때는 누구 못지않은 열정으로 잔디밭을 누비던 축구선수였기도 하다. 그 뒤를 이어 아들 종훈(17)군 역시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해, 올해 축구 명문 안영공고에 입학하게 됐다. 한창 때의 아버지를 따라 포지션도 수비전담 미드필더를 맡았다고. 팀의 숨은 파수꾼 역할을 톡톡히 하는 기대주로 성장 중이다.

“우직한 근성이 있어서 그런지 아들 녀석도 수비 쪽이 맞는 거 같아요. 팀의 허리를 든든히 지켜주는 믿음직한 선수로 자리 잡았으면 하는 게 바람이죠. 포지션을 떠나 박지성 선수처럼 인정받는 선수로 커줬으면 더 바랄 게 없겠네요.”
못다 이룬 꿈 때문일까, 대희 씨의 말에서 아들에 대한 기대가 묻어난다.

대를 잇는 축구집안답게 장식장엔 두 부자가 거둬들인(?) 상패가 즐비하다. 그 옆으론 아들의 대형 사진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데, 그라운드를 누비며 공을 모는 종훈군의 모습이 영락없이 아버지를 빼 닮았다. 우연찮게 종훈군이 뛰던 시합에서 심판을 보던 대희 씨 친구가 대뜸 전화를 걸어 ‘야, 너희 부자는 전쟁 나도 찾겠다’고 했을 정도란다. 그러고 보니 이 집안은 유독 남자들 얼굴 내림이 강하다.

할아버지와 대희 씨, 아들 종훈군이 나란히 서면 흡사 동일인물의 생장과정을 축약해 놓은 듯이 삼대에 걸친 유전인자가 무섭게 빛을 발한다. 삼대가 닮았다는 말에 누구보다도 흐뭇해하는 이는 할아버지. 당신도 젊은 시절엔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며 바짝 유대관계를 조인다.

그렇다고 집안의 기대가 종훈군에게만 쏟아지는 건 아니다. 무용을 전공한 첫째 딸 지훈(21)양은 얼마 전부터 끼를 살려 연기학원에 다니고 있고, 반면 둘째딸 자영(18)양은 공부에 소질이 있어 전교에서 ‘논다’는 수재 소리를 듣는다. 둘째딸이 받아오는 성적표도 즐겁지만 단역으로 드문드문 TV에 얼굴을 내미는 큰딸 찾는 재미도 쏠쏠하단다. 한 배에서 나도 아롱이다롱이라고, 이래저래 세 자녀 모두 제가 원하는 방면에서 열심히 해주고 있으니 두 부모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사는 맛이 날 것 같다. 원씨 부부는 셋 중 누구하나 엇나가는 자식 없이 바르게 큰 건 모두 할아버지와 할머니 덕임을 안다. 풍족하다고는 못해도 물심양면 세 아이를 뒷바라지 해 줄 수 있던 것도 손자손녀 사랑에 남다른 할아버지 할머니의 내리사랑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어머님 아버님 아니었으면 삼남매 제대로 못 키웠지요. 어머님이 식사며 집안 일 다 챙겨주시고 아버님께서도 아이들을 잘 돌봐 주셨으니 제가 마음 놓고 바깥일도 할 수 있었고요.”

할아버지와 대희 씨, 종훈군까지, 삼대에 걸친 닮은꼴 유전인자가 무섭게 반짝거린다.

  영숙 씨가 보험회사 대리점 일을 한 지도 10년 째. 일을 시작하겠다는 임씨를 적극 밀어준 것은 시어머니(이금순·74)였다. 조용하지만 끈기 있는 며느리 성격이라면 보험 일이 제격이리라는 생각에, 자신이 십수 년을 해오던 그 일을 적극 추천해 줬다.

“나도 몇 십 년 동안 시집살이 하던 사람인데 사람이 집에만 있으면 답답해 병 생겨 못써. 멀쩡한 재능 놔두고 왜 썩혀 ?”
아니나 다를까, 며느리는 근속상에 해외연수까지 따 내 시어머니를 흐뭇하게 했다. 실적에 목매달 정도로 열심을 부릴 수는 없지만 적당히 살림을 병행할 정도로 시간이 자유롭고 성취감도 있어 영숙 씨는 이 일이 재미있다. 이젠 시어머니가 집에 없거나 조금이라도 아프면  덜컥 겁부터 날 정도로 영숙 씨에게 있어 시어머니의 존재는 크다.

며느리 예쁘니 도와 줄 밖에

아들내외가 맞벌이이기 때문에 이 집에선 내 일 남의 일이 따로 없다. 시간 되고 여유 있는 사람이 먼저 나서서 집안일을 돕다보니 할아버지가 다 큰 손주들의 밥을 챙겨 먹이는 ‘정겨운’ 풍경도 가끔 연출된다. 아침이야 영숙 씨 담당이지만 저녁 시간을 맞추는 건 무리라서 시어머니가 차려 놓은 상 위에 수저만 올릴 때도 많았다. 그러기를 십년 째지만, 늦게 귀가해 데워진 밥상을 받을 때면 늘 미안한 며느리다. 이런 며느리가 가끔은 괘씸할 만도 한데 시어머니는 ‘내가 밀어 준 일 아니냐’며 오히려 두둔이다.

“내 몸 건강할 때 조금이라도 더 도와줘야지 생각하면 화 날 게 뭐야. 일 하랴 시부모 봉양하랴 이런 며느리도 없구만. 요즘 세상에 아무리 장남에게 시집왔어도 어디 부모 부양하려고 해? 근데 우리 며느리는 안 그래. 노부부끼리 한번 오붓하게 지내볼까 싶어 나가 살라 그래도 싫대. 그러니 예쁘지 않겠어?”

집안 살림 도맡아 해주는 시어머니지만 하루 종일 집안에서 지내지는 않는다. 아침 일을 마치고는 부랴부랴 산악회며 게이트볼을 치러 외출을 서두르는 ‘요즘 노인’. 활동적인 할머니와 달리, 천식이 심해 외출을 피하는 할아버지는 오후 나절 서예 학원을 다녀오는 게 유일한 외출이다. 대희 씨처럼 무뚝뚝해서 할머니에게는 살가운 소리 한번 못하지만 맏며느리에게는 늘 자상한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며늘아는 원심이 착한 아이야. 좋으나 궂으나 항시 웃는 낯으로 시부모 모셨으니 어디 내놔도 안 빠지는 일등 며느리지. 애비도 성실하지만 나를 닮아 그런가 많이 무뚝뚝해. 보수적인데다 융통성도 없어 다정한말 한마디 못 하는 성격이야. 장남 노릇만 잘하면 뭐해, 수고 했단 말 한 마디 못해주면 지 아내한텐 빵점인데…. 며느리에게 애정표현이나 좀 해 주라 그래.”

아들 내외에 대한 당부가 금세 아들을 향한 일침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래저래 이 집 남자들은 한결같이 무뚝뚝한 게 흠이라며 시어머니, 한 말씀 하신다.
“아이고~ 당신이나 좀 하시구랴~.”
“아, 나야 다 늙어서 안 되고, 젊은 애들이나 좀 잘 살아보라는 얘기지….”

부족한 부분도, 필요한 부분도 어느새 닮아버린 이 집 두 부부의 모습에서, 아옹다옹 살면서도 금세 보듬어 안아 버리는 일곱 식구의 ‘사는 재미’가 느껴진다.
“일곱이 뭐가 많아요? 아이들 결혼해서 가지 좀 치면, 그 때서야 옆 동네랑 축구 한판 할 수 있겠네(웃음). 그 날까지 부모님 모두 건강 하시고 아이들 제 길 잘 닦아 가기만 바라야죠.”
복닥거리며 사는 삶이 재미있다는 원씨네 가족. 돈 주고도 못 사는 가족의 의미를 몸소 느끼며 사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글/김혜경 사진/최경훈 기자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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