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3일 오전 9시. 5평 남짓한 사무실에 머리가 희끗한 노인들이 삼삼오오 앉아있다. 마치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기라도 하듯 온통 전화벨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차례대로 배달갈 곳의 주소를 들고 서둘러 자리를 뜨기 시작한다. 종로 시니어클럽에서 운영하는 실버택배 서비스 일꾼들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된다.

또 다시 전화벨이 울리자 7번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경력 5개월차 안효민(68)씨가 일어선다.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서둘러 읽고 있던 신문을 접어 바지 뒷주머니에 꼽는다. 배달될 물건을 받으러가는 위치를 동료에게 정확히 확인하고 문을 나선다.

돈과 건강, 친구까지 일석삼조

그의 첫 번째 임무는 충무로 명함가게에서 학여울역 무역센터전시장으로 갓 찍은 새명함을 배달하는 것.

검은 작업모에 검은 가죽가방을 메고 옷 매무새를 가다듬더니 심호흡을 크게 하고 동료들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건넨다. 드디어 출발. 그는 전철역까지의 거리가 무척이나 익숙한 듯 최소한의 동선으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리고는 전철을 타고 자리에 앉자마자 노선표를 꺼내 한참을 쳐다봤다. 아마 움직일 동선을 그리는 듯 하다.

“하루종일 전철에서 생활하다보니 저절로 노선표를 외우게 되었어요. 위치를 잘 모르면 하기 힘든 일이라 일을 시작하고 가장 처음 한 것이 위치 파악하는 것이었죠. 이제는 초행길 아니면 눈을 감고도 찾아갈 정도에요.”

예순 여덟의 안효민 씨는 택배 배달원으로 활발한 활동중이다.

남들 같으면 70이 다된 나이에 노후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을텐데 젊은 사람도 하기 힘들다는 지하철 택배원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 일을 하기 전 그는 부인과 화원을 운영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일거리 삼아 운영하려던 마음의 여유 때문이었을까? 수입은 거의 기대할 수 없어 부인에게 일임하고 하루 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던 차에 그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종로 시니어클럽을 방문했단다. 그리고 ‘지하철택배 배달원’이라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운동도 하고 돈도 버는데다 지하철에서 책과 신문도 읽을 수 있어 자투리 시간 활용도 쏠쏠합니다.”
출발지인 혜화역과 목적지인 충무로역은 불과 네 정거장. 15분 남짓만에 명함집에 도착했다. 자주 거래하는 집인 듯 명함집 사장님과 밝은 인사를 나누고는 노인이 들기에 다소 무거워 보이는 명함 꾸러미를 번쩍 들어올렸다. 이제 학여울역으로 출발이다. 전철에 올라타서 자리에 앉자마자 주머니에 꼽아둔 신문을 펼쳐든다. “습관적으로 전철에 타자마자 책이나 신문을 읽는다”는 그의 말처럼 무척이나 익숙해 보인다.

지하철 택배는 오토바이를 탄 젊은 택배원들과는 달리 지하철을 이용해 배달한다. 65세 이상으로 지하철 승차권이 무료이고 교통체증과 관계없이 정해진 시간 안에 물건을 배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최근 가벼운 서류나 꽃배달 등은 지하철이 각광받고 있다. 오토바이 택배보다 조금 느릴지 몰라도 신용과 정확도, 그리고 저렴한 가격 등의 경쟁력을 갖고 있다. 이들은 주로 명함에서부터 양복, 옷감, 서류, 귀금속, 꽃 등 다양한 물건을 배달하고 있다. 또한 월급제가 아니라 자신이 일한 만큼 급여를 받는 프리랜서직이라서 만큼 마음도 편하단다.

“수고한다며 인사 건넬 때 가장 뿌듯해”

물론 일은 힘들다. 이 일을 하고 나서 몸무게가 5kg이나 줄었을 정도다. 가끔 갑자기 일이 몰릴 때는 점심을 거르거나 오후 6시를 훌쩍 넘길 때까지 일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전철이어서 편하리라는 생각도 하겠지만 사람이 북적일 때는 앉을 자리도 없을 정도다. 하루 종일 걷다보니 오후경에는 무릎이 아파 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것도 행복이라고 여긴다. 원래 길에 밝은 편이라 목적지를 찾는데 고생이 덜한 편이지만 가끔 반대편 지하철을 타는 등의 크고 작은 실수도 잦다. 길을 몰라 헤맬 때는 동료들이 가장 큰 힘이 된단다.

“집에만 있으면 무료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건강을 잃기 쉬워요. 일을 하면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고 친구들도 많이 사귈 수 있는데다 돈도 버니 일석삼조죠.”
어느새 학여울 역, 무역센타 전시장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무척 높았지만 짐을 들고도 힘든 내색 없이 성큼성큼 오른다. 누가 이런 그를 보고 70이 다된 노인이라 할 수 있을까.

무역센타 전시장에는 굉장히 많은 부스가 설치돼 있다. 휴대폰으로 고객과 통화를 했지만 정확한 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관계자로 보이는 직원에게 위치를 물어보기 시작한다. 다행히 친절하게 설명을 받았다.

사실 목적지의 위치를 지나가는 사람이나 고객에게 물어봐도 이렇게 친절하고 정확한 설명은 흔치 않다. 오히려 길을 잘 못 찾는다고 짜증을 부리거나 노인을 보내서 늦었다고 투덜대는 고객도 있다.
목적지를 찾아 물건을 전달하고 돈을 받은 뒤 영수증을 꼼꼼히 작성해 건넸다. 고객은 물건이 제시간에 도착했다며 감사의 뜻을 전한다.

“감사합니다. 또 이용해 주세요.”
밝고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힘차다.
“아무 실수 없이 정확한 시간 내에 손님을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받을 때가 가장 보람 있습니다. 노인이 방문하면 열중 아홉은 놀라지만 대부분 고생한다는 말과 함께 음료수를 챙겨주는 경우가 많아요. 그럴 때마다 아직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고 느끼죠.”

그 때 다음 임무를 알리는 전화가 울렸다. 다음은 동대문 상가에서 고객에게 양복을 전달하는 일.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빨리 동대문역으로 가야 한다며 발길을 재촉했다.

전철에 도착하자 가방에서 식수통을 꺼내 목을 축인 그는 주섬주섬 지도를 펼쳤다. 서울 주요시내 지도와 남대문 시장, 동대문 시장 가게 배치표가 들어있다. 어느덧 시간은 11시 30분을 넘어 정오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 상태로라면 점심끼니도 걸러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동대문에 일단 들러서 시간을 보고 조금 여유가 남으면 점심을 먹겠다”고 했다.

내 자신감의 원천은 일!

“아침에 눈을 뜨면 내 일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자식에게 용돈 안 받아도 되게끔 경제력이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체력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을 하고 싶습니다.”

  안씨는 은퇴 후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도 미리 계획해 뒀다. 그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하고 싶단다. 농사도 짓고 분재도 하면서 지난 세월을 정리하는 자서전도 쓰고 싶다고.
현재 아들은 장가를 갔지만 미혼인 딸이 독일에서 유학중이다. 유산으로 물려주기보다는 공부를 계속 시켜주는 것이 더 큰 자산을 물려준다는 생각에 열심히 뒷바라지하고 있다.

이 일을 시작할 때 “너무 힘들지 않겠느냐”라는 주위의 만류도 많았다. 무시하는 듯한 눈길도 느꼈다고. 초기에는 아는 사람을 만나면 자존심 때문에 모른척 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제 그런 시선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 이 모든 게 일을 시작하면서 되찾은 자신감 때문이다.

그는 이제 퇴직후 집에서 놀고 있는 노인들에게 조언을 한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던 없던 집에서 놀고만 있으면 무료해지고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굳이 일을 하지 않더라도 봉사활동이라도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현재 종로시니어클럽에는 건강을 목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동료들이 많다. 이렇게 활동을 하다 보면 고혈압이나 치매 등의 질병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아픈 사람도 이곳에서 몇 달만 일하면 금세 건강을 되찾는다.

종로 시니어클럽 회원들은 일을 해서 얻은 수익으로 독거노인을 도와주는 선행도 펼치고 있다. 사실 모두 비슷한 처지에 각자 살기도 빠듯할텐데 자신보다 어려운 노인들을 생각하는 것을 보면 정말 좋은 동료들을 알게 되어 기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거듭 당부하지만 세상의 모든 노인들이 각자의 할 일을 찾아 함께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비록 힘들고 고단하지만 즐거운 삶을 살아가는 안효민 씨. 수도권을 거미줄처럼 아우르고 있는 전철이란 애마에 올라타자 또다시 신문을 펼쳐든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글·사진/박경미 기자

박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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