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작구 상도동 도로변에 위치한 낡은 구두공장.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간판에 ‘백두제화’라는 상호가 밋밋한 글씨체로 적혀 있다. 이곳이 17년 간 장애인 맞춤 구두를 만들어온 구두장이 김범기(50)씨의 보금자리다.
알아주는 구두회사의 개발연구실 팀장으로 탄탄대로를 걷던 그가 9년 전 회사를 박차고 나와 조그마한 구두공장을 차렸을 때, 주위사람들은 한사코 그를 어리석다고 했다. 머물러 있었다면 보장되었을 안정적인 삶을 마다하고 뻔히 보이는 고생길을 택한 김씨의 행보가 못미더웠기 때문이다. 그 염려대로(?) 오늘날 그의 삶은 물질적으로 그리 윤택하진 않다. 직원 하나 없이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해야 하는 구두제조가 가져다주는 수입이라야 거기서 거기. 그런데도 김씨는 그럭저럭 살만 하단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다른 걸 얻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두 번째 신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낡은 컴퓨터와 작업대, 해묵은 소파가 비좁게 들어선 김씨의 사무실 겸 공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열 평 남짓한 실내, 석유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는 그 곳에 김씨가 이날의 첫손님이자 마지막 손님인 송씨와 함께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오른쪽이 너무 헐렁해요. 좀 조여 줬으면 좋겠는데….”
“허~ 너무 조이면 발 건강에 안 좋다니까 그러네.”
“좌우가 조금 틀리네요. 높이도 달라서 기분이 이상해요.”
인터넷으로 알음알음 이곳을 알게 된 송씨, 처음 맞춘 구두가 어색한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보조기를 찬 오른쪽 다리와 장애가 없는 왼쪽 다리의 높이와 크기 차이를 적절히 조율해 만든 구두다보니 외관상으로 보이는 약간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데도 못내 아쉽고 어색한 모양이다. 6개월 전 수술을 받다 신경을 잘못 건드려 평생 오른쪽 다리에 보조기를 차야한다는 그는 이곳을 알기 전까진 커다란 운동화와 슬리퍼를 끌며 평생을 살아야 하는 줄만 알았단다. 그 말대로 ‘다시는 못 신을 줄 알았던’ 구두라 그런지 오히려 이것저것 주문이 많은 걸지도 모르겠다. 열흘 정도 테스트한 후 그래도 불편하다 싶으면 그때 사이즈를 줄여보자는 김씨의 말을 듣고서야 송씨는 겨우 가게 문을 나선다.
“신발은 원래 제 발보다 손가락 하나 정도는 들어가게 신는 게 좋은데, 도통 들어야 말이지….”
장애인용 신발은 너무 조이면 심한 경우 궤양까지 유발하기 때문에 특히 더 그렇다는 말을 해 주어도 도통 들으려 하지 않는 손님을 대할 때면 김씨는 자주 난감해지곤 한다. 그러면서도 “늘 뒤축을 구겨 신다가 모양 갖춘 신을 신게 되니 꼭 들어맞는 걸 원하는 심정이야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이라며 뒷말을 흐린다.
김씨가 장애인 맞춤 제화를 알게 된 건 지난 1989년, 김씨가 몸담았던 회사가 ‘가장 편안한 신발’을 기치로 미국에서 초빙해온 족부(足部) 전문 박사를 만나고부터다. 그때까지 일반 구두만을 만들어 온 그에게 의학적 지식이 접목된 정형외과용 신발은 발과 사람에 대한 새 지평을 열어준 계기가 됐다. 3년간 누구보다도 의욕적으로 기술을 익힌 김씨. 그러나 시장성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회사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97년, 일방적으로 부서를 폐기해 버렸고 이에 낙담한 김씨 역시 그길로 만류하는 회사를 뿌리치고 말았다.
그 후 3개월 동안 무작정 산만 타다 지금의 구두공장을 차렸다. 알아주는 기업의 고기능자인지라 맘만 먹으면 재취업도 어렵지 않았지만 더 이상 누군가에 의해 움직여지는 삶은 진절머리가 났다. 무엇보다도 그간 쌓은 노하우를 살려 직접 장애인용 구두를 만들고 싶었다.

남긴 기록 하나하나가 재산이자 산 역사

부위별 치수가 적힌 발바닥 프린트

그러나 그가 선택한 이 길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조직화된 곳에서는 한달에 60~70켤레의 수제화도 거뜬히 만들어냈지만 조직력을 잃고 보니 찾아오는 손님도 몇 안 됐다.
“구두를 파는 거면 모를까 혼자 수제구두공장을 운영한다는 건 수지가 안 맞아. 이게 요래 봐도 온통 수제공정이라 한 켤레 만들기까지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꼬박 걸리거든. 석고 모형을 뜨고 자연건조 하는 데 걸리는 3일을 제해도 말이야.”
200쪽을 거뜬히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 놓고도 하루 한 켤레를 만드는 게 고작이니, 놀고 있는 장비를 보면 안타까운 건 당연지사. 중간에 떼이는 마진이 너무 커 보조기 납품을 끊었던 재작년 1,700만원의 적자를 냈을 땐 그만 접을까 고민도 했었다. 그나마 작년 4월부터 정형외과용 신발이 건강보험 적용대상에 포함돼 주문양이 좀 늘었으나 전 과정이 수공이다 보니 혼자 감당하기도 만만치 않았다. 배운 기술도 물려줄 겸 수제자 하나를 키웠지만 고된 일에 수익이 안 나는 걸 지켜보더니 지난 1월 결국 제 발로 가게를 떠나고 말았단다.
“한달 수주가 열다섯 족이 넘질 않는데 가게 세며 자재비 빼고 자기 월급 주면 남는 게 없다는 걸 알았는지 미안하다며 나갔어. 다시 혼자 해야지 뭐….”
몸도 예전 같지 않아 돕는 일손 하나가 아쉬운 형편이지만 그의 수제공장에는 매일 칼 같이 지켜지는 기본원칙이 있다. 아무리 주문이 밀려도 손님을 일주일 이상 기다리게 해선 안 된다는 게 그의 철칙. 밤을 새서라도 약속된 날수 안에 임무를 완수하는 게 자신을 찾아주는 손님에 대한 보답이라고 말한다.
17년 동안 만든 장애인 구두도 어느덧 6000족에 이르러, 그 하나하나의 기록이 고스란히 파일로 저장되어 있다. 이 기록들이 모두 자신의 산 역사이자 둘도 없는 재산이라며 수북이 쌓인 파일 더미를 매만지는 김씨에게 간단한 제조 과정을 물었다.
“간단히? 그게 간단히 될라나… 설계부터 포장까지 세세한 공정 모두 합치면 200단계가 넘는데…. 우선 발바닥 모양을 프린트 해 보행습관을 분석하고 부위별 실 치수를 재. 그런 다음 발바닥 모양을 석고로 뜨고 그걸 압축기에 넣어 그대로 찍어내고. 아무튼 이 깔창은 장애인 맞춤 구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이래저래 정성이 가장 많이 들어가.”
그런 다음 장애의 정도와 종류, 그리고 손님의 희망에 따라 디자인을 고르고 재단에 들어간다. 완성된 바닥창과 구두 몸체(골)를 이어 붙인다. 여기에 맨 마지막으로 깔창을 부착하면 신발의 조건을 갖춘 투박한 구두가 태어나지만, 신발 임자에게 신겨보고 수정?보완할 사항을 체크 한 후 다시 두세 번의 뜯고 깁는 과정을 더 거쳐야만 비로소 모든 과정이 끝이 난다.

“아이들 신발 만들 때 제일 안됐어”
장애인 구두를 만들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단 설계다. 장애에 따라 좌우가 현격히 다른 신발을 어떻게 일대 일의 균형으로 맞추느냐가 최대의 관건. 오른발에 장애가 있다고 해서 왼발은 평범한 신발이냐면 그렇지 않다. 상대적으로 체중을 받치느라 더 무리가 가는 왼발을 위해선 특별히 아치(발바닥의 움푹 파인 부분) 모양을 본 뜬 특수깔창을 만들어 걸을 때 체중을 분산해 주어야 한다. 다리를 절며 지내온 기간이 길수록 맞춤 구두에 적응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처음부터 길이 차이를 완전히 없애주지 않는 것도 노하우다.
기능성에 치중하다보니 디자인은 뒷전일 수밖에 없는 특수화지만 멋진 구두 신고 싶기는 장애인?비장애인을 막론하고 마찬가지다. 하지만 설계 전공이다 보니 디자인만큼은 요즘 것을 따라잡을 수가 없는 게 김씨의 최대 고충이다.
“혼자 하다 보면 일일이 디자인을 고안해낼 재간이 없지. 손님이 외국 디자인을 들고 와 똑같이 해 달랄 때가 제일 난감해. 디자인을 유행 따라 바꾸려면 구두 몸체를 이루는 기본 틀부터 몽땅 새로 깎아 만들어야하는데, 일일이 손으로 깎고 다듬으며 새 틀을 짜는 데 드는 비용을 따지자면 구두 가격이 두세 배는 오르거든. 그런데 그 가격 어디 부를 수 있나.”
디자인이 다양하지 못한 그의 신발을 보곤 이런 걸 어떻게 신느냐며 돌아선 사람도 있단다. 하지만 한때 미스코리아 대회용 신발을 납품했을 정도로 세계 유수의 디자인을 섭렵했던 그의 심정은 오죽 답답할까. 기능성을 따지다보면 디자인은 죽게 마련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다독여 본다. 그러나 아동용 구두를 만들어야 할 때만은 아무래도 마음이 그렇지를 못하다.
“한창 예쁜 구두 신고 싶은 나이에 투박한 신발 신고 놀림 받기라도 하면 안됐잖아. 제 또래들은 죄다 멋쟁이 구두 신고 학교 올 텐데…. 그래서 장애가 심해 신발 전체에 기능을 강조해야하는 경우가 아니고선 되도록 깔창만 해줄 때가 많아. 치수가 큰 예쁜 디자인을 시중에서 구하라고 일러주지. 그럼 그 신발에 맞춰 최대한 편안한 깔창을 깔아주고.”

설계부터 포장까지 200단계가 넘는 수제공정을 김씨 혼자서 하루 반나절에 걸쳐 만든다

어쩔 수 없이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차선의 방법을 제공해주는 게 그의 일이지만, 직접 만든 구두가 그들 삶에 작은 위안과 기쁨을 넘어 없어선 안 될 필수품이라는 것에 자부심도 느낀다. 자신의 두 다리를 희생해 승객을 구한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 씨도 그가 만들어준 구두를 신고 재활의 의지를 다졌던 사람 중 하나다.
“그 사람, 얼마 전 내가 만들어 준 신발을 신고 킬리만자로를 다녀왔대. 믿어져? 사지 멀쩡한 사람도 도중하차하는 그 산을. 작년 말 술 한 병을 사 들고 가족들과 찾아 왔더라구. 그럴 때 참 살맛나지.”
국내에선 변변한 장애인 용 등산화 하나 구할 수 없어 김씨가 밤을 새 깔창과 맞춤 골을 만들어 보낸 인연이 어느덧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이런 감동이 그를 오늘날까지 구두장이로 살게 만든다고.

소박한 구두장이의 꿈
어느덧 흰머리가 성성한 지천명의 나이가 됐지만 바삐 사느라 여적 결혼도 미뤄온 김씨. 외교관 형에 성공한 형제들도 많지만 자신의 17년 경력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그간 갈고 닦은 노하우를 물려줄 제자가 없다는 것뿐이다.
“운 좋게 전수받은 이 기술을 썩힐 순 없으니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지. 이 분야도 곧 살만 해 질 거야. 지금이야 안 알아주지만 국내에도 족부만 전문으로 공부하는 의학박사들이 생기게 되면 발에 대한 중요성도 인식하게 될 테고. 내 세대는 아니겠지만 다음 세대는 분명 할만 하다니까?”
자신은 그 때를 위한 초석이면 족하다는 김범기 씨에게서 초롱불 같은 장인정신이 배어나왔다. 이런 그가 있기에 오늘밤도 누군가를 위한 신발 한 짝이 투박하게 제 모양을 갖추어 가고 있을 것이다.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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