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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3일 홈쇼핑 광고를 촬영하는 세트장 안. 카메라감독의 큐싸인이 떨어지자 홈쇼핑 광고모델들이 긴장된 모습으로 촬영에 한창이다. 차례를 기다리는 젊은 모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가운데 대본연습에 한창인 할머니가 유독 눈에 띈다. 올해 72세의 황복순 씨가 그 주인공. 고희에 피어난 늦깎이 연기 열정이 은근하게 베어나고 있었다. 

“엑스트라?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죠”

드라마, 영화를 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엑스트라들. 주연배우에게 가려져 일부러 관심을 쏟지 않는다면 기억해 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스포트라이트가 비켜간 곳에는 수많은 조연과 엑스트라가 있기 마련. 화려한 주인공을 꿈꾸는 이들은 드라마, 영화의 감초들이다. 올해 72세의 황복순 씨 또한 이들 중 한명이다.  

경력이라곤 그저 시장에서 물건을 팔아 먹고 살았기 때문에 오로지 장사하는 재주밖에 없었다는 황씨. 그런 그가 늘그막 배우라는 꿈을 꾸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이 일을 하기 전 황씨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소박한 할머니였다. 그런데 바삐 살아온 인생이 덧없던 것이었을까.
평소 활동적인 것을 좋아했던 그에게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엑스트라 일자리는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지난 3월 황씨는 모홈쇼핑 운동기구 찰영이 한창이었다.

  “몇년 전 복지관을 통해 단역으로 활동하는 할머니를 알게 되었어요. 그당시 연기에는 전혀 문외한이라 그가 활동하는 것을 보고 멋있다고만 생각했죠. 그런데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욕심이 생겼어요. 그 이후 여러 기획사의 문을 두드렸죠.”

하지만 뭐든 뜻대로 되기란 없는 법. 아는 사람의 소개도 없고, 특별히 연기학원에 다닌 것도 아니라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기획사란 기획사는 다 찾았지만 번번이 고배를 들이켜야 했다. 도중에 포기할까 망설이다 한 번만 더 찾아가 보자는 시도 끝에 지금의 기획사와 인연이 닿았고, 드디어 연기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연기요? 얼마나 재밌다고요. 비록 단역배우지만 연기하는 매력에 푹 빠져 산다니깐요. ‘왜 진작 몰랐나, 좀 더 빨리 알았으면 평생 해왔을 텐데’ 그런 생각만 들어요. 뒤늦게 배운 것이 한이 되어 남들보다 더 노력하고 있어요.”

황씨가 처음 따낸 배역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의 상인역할이었다. 물론 단역에 대사도 얼마 없는 엑스트라 역할이었지만 여섯 번의 도전 끝에 따낸 배역이라 감격에 겨워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행복했었다고 회상한다. 뒤늦게 이룬 연기의 꿈에 욕심이 생긴 그는 틈틈이 연기학원을 찾았다고.

이런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일까. 얼마 전 그는 대학생들이 만든 단편영화 『마지막 밥상』에서 생애 처음 주연을 맡았다. 비록 단편영화였지만 주인공을 맡은 것은 처음이라 영화를 촬영하는 몇 달간의 고생도 고생이 아니었단다.
“주인공을 해보니 단역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어요. 단역보다 비중이 커 대사를 외우는데 힘이 드는 것 빼고는 훨씬 재미있더라고요. 열심히 하면 언젠가 또 주인공을 맡는 행운이 오겠죠.”

30초짜리 촬영위해 하루 반나절 대기하기도

물론 이 일을 하기엔 적지 않은 나이가 걸림돌이다. 단역이라 대사는 얼마 없지만 나이 탓인지 몇 번을 연습해도 대사 외우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워낙 낙천적인 성격 탓인지 어려움보다는 즐거움이 더 앞선다.

“평소에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했는데 일을 시작하고 특별히 시간을 내 여행을 갈 필요가 없어졌어요. 일의 특성상 지방스케줄이 많아 길면 일주일도 다녀오거든요. 일과 여행을 함께해 일석이조가 따로 없죠. 또 촬영장에서 유명한 연예인도 보게 되어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할머니가 하루 출연하고 받는 돈은 시간에 따라 일정치 않지만 아침부터 오후까지 일했을 때 3만원, 밤 8시를 넘으면 5만원에서 8만원까지 받는다. 얼마 전에는 영화 ‘괴물’촬영을 위해 2박3일간 밤샘 연기를 했는데 고단한 일정 속에서도 영화 촬영 자체가 신기해 마냥 즐거웠다고.

단역 전문 배우라 그가 촬영장안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사실 일하는 시간보다 더 길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들 연기하는 것을 다 기다리고 순서대로 촬영을 하다보면 대기하는 시간은 하루 반나절은 족히 걸리기 때문이다.

“5년 동안 대기하는 것이 습관이 돼 이제는 그러려니 이해하죠. 자투리 시간에 연기자들과 수다도 떨고 대본연습도 하고 시간을 보내서 이제는 익숙해 지루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연기자 중에 내 나이 또래는 없지만 모두 같은 일을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금방 친해지고 서로 챙기기도 해요.”

물론 건강을 걱정하는 가족들의 반대도 많았다. 늘그막에 주책이라는 자식들의 만류로 마음고생도 있었지만 가족들도 이내 TV나 영화에 나오는 황씨를 보고는 분위기가 확 달라졌단다. 이제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될 정도로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했다.
요즘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개봉 날짜를 꼼꼼히 기억해 두어 가족들과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그의 유일한 즐거움이자 삶의 낙이 되었다.

찰영을 하고 있는 황씨의 모습.

   “자식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영화 속에서 내가 나오는 시간은 짧지만 몇 달 동안 고생한 작품을 가족들에게 보여 줄때가 가장 흐뭇하고 짜릿한 순간이죠.”
이런 그에겐 아직 못다 이룬 꿈이 있다. 바로 드라마에서 안방마님 역할을 한번 맡아 품위 있는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것. 비록 인기 연예인처럼 뛰어난 외모는 아니지만 개성 있는 얼굴, 똘똘 뭉친 끼와 열정을 보아하니 곧 그 꿈도 이루어질 듯 보인다.

짧은 역이라도 옹골차게 해내는 것이 실속 있는 일이라는 그. 작품만 좋다면 뭐든 안가리고 배역을 맡는다. 그렇게 시작한 단역배우가 이제는 제2의 인생이 되었다. 하찮게 볼지도 모르는 단역이지만 그는 배우로서 지켜야 할 원칙을 한 번도 어기지 않는다.

“한줄 뿐인 대사라도 진지하고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것이 진짜 배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 작품에 두 배역은 절대 하지 않아요. 작품에 피해를 입는 일이지요. 그리고 하늘이 두쪽 나는 일이 있어도 촬영스케줄을 지키려 하고 있어요. 사람들과의 약속이기도 하니까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그에게 아직 ‘황혼’은 없다. 연기를 시작한지 5년밖에 안된 단역배우지만 자신을 써준다면 어디든 달려갈 생각이다. 앞으로는 신인감독들도 적극적으로 만나볼 계획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 있잖아요. 별볼일 없이 살아가지만 내가 출연한 작품만큼은 세상에 남는다 그말이죠. 뒤늦게 시작한 만큼 아쉬움도 너무 커요. 연기를 시작하고 나서 인생 자체가 즐거워졌어요. ‘이런게 행복이구나!’ 싶다니까요.”

앞으로 만년 단역 배우가 되도 상관없다는 그에게 이미 연기는 5년 동안 평생지기 친구로 자리 잡은 듯 했다. 
또한 그는 “세상에 주눅든 모든 단역배우들이 마음만큼은 인생의 주연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어떠한 조연 역할이 주어져도 주연보다도 더 연구해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황복순 씨. 주연보다 더 화려한 주인공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였다.

글·사진/박경미 기자

박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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