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생존권 우롱하는 기만행위 중단하라!”
“불법하청 중단하고 즉각 협상하라!”
메마르게 갈라지는 서울의류업노동조합 김정호 위원장의 목소리가 도심 속을 울리자, 뒤따르는 조합원들도 한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그 앞으로 쇼핑백을 거머쥔 인파들이 무심한 표정으로 지나갔다. 간간이 호기심 어린 몇몇 사람만이 잠깐 걸음을 늦추고 고개를 돌려 보지만 이내 눈길을 돌렸다. 인파의 바쁜 걸음을 붙잡기에는 이들의 행색이 너무 초라한지도 몰랐다. 그러나 썰렁한 반응에도 아랑곳 않는 시위대의 표정은 비장했다. 이들에게는 생존권이 걸린, 그야말로 중차대한 현실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주말이면 이렇게 백화점 앞에서 시위를 한지도 어느덧 5개월째에 접어들었다.

일방적 하청전환 요구, 파업돌입에 직장폐쇄로 맞서
꽃샘추위가 또다시 기승을 부리던 지난 3월 11일 소공동에 위치한 롯데백화점 본점 앞. 피켓을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백화점 정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두터운 점퍼에 초췌하고도 비장한 표정을 한 30여명의 시위대는 소위 ‘미싱사’라 불리우는, 의류업체 (주)루치아노최의 생산직조합원들. 피켓에는 사측의 노동탄압과 직장폐쇄를 규탄하다는 선전구들이 빽빽이 적혀있었다.
김 위원장은 “오늘로 파업에 돌입한지 135일째가 된다. 그 동안 조합원들은 성수동 본사 공장에서 천막농성을 펼치며 수차례 단체협상을 요구했지만 사측은 지난 11월 이후로 단체협상에 임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용역직원들까지 동원, 조합원들이 지키고 있는 재고품들을 빼앗아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갈등은 작년 가을 의류업계 여기저기에 노조 설립 붐이 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종업원들의 노조 설립을 우려한 회사가 작년 10월, 돌연 90여명의 생산직종업원 전원에 대해 일방적으로 하청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이에 종업원들은 조합을 결성, 전체 조합원의 88% 의 동의를 얻어 전면파업에 들어갔고 회사는 직장폐쇄라는 초강수로 맞대응해 왔다.
뿐만아니라 이들을 ‘노동자성이 없다’며 파업은 물론 조합의 정당성까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노동부과 사법부 역시 이렇다할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 체 방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합원들이 일명 ‘소사장제’ 계약을 맺은, 개인사업자란 ‘명분’ 때문이다.
소사장제는 일반적으로 생산직 간부에게 생산공정의 일부를 책임지게 해 부품을 생산케 하는 일종의 도급생산 방식으로, IMF 이후 중소기업들이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도입한 신경영방식이다. 의류생산직업계에도 지난 97년 도입되어 관행처럼 자리 잡은 이 제도가 지금 이들의 노동자성을 부정하며 발목을 잡고 있다. 
조합측에 따르면, 97년 회사는 생산직근로자들에게 업계불황을 빌미로, ‘일을 계속 하려면 개인사업자등록을 해야 한다’며 이와 함께 소사장계약을 강요했다고 한다. 업계 전체가 불황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직장을 잃을 위험에 처한 종업원 모두는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계약을 체결했고, 그 후부터 이른바 이름뿐인 ‘개별 사장님’이 됐다.
하루 꼬박 10시간 씩 일했지만 이들은 소사장계약 이후에는 4대보험도, 연월차 휴가도, 연장수당도, 퇴직금도 받지 못하는 ‘특수고용직’ 신분이 되어버렸다. 실질적인 임금을 목적으로(이들은 실제 기본월급제를 형식적으로 정해놓고 이른바 ‘객공(客工)’이라는 성과급을 받아왔다) 하는 근로자임에도 불구하고 ‘법적 노동자’로 인정받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생계수단 막막… “불안정고용에 머리 숙일 순 없다”
회사가 그나마 유지하던 소사장제까지 폐지하고 하청업체로 내려갈 것을 강요하자, 종업원들도 가만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후 법원에 단체교섭응락가처분신청을 제기했고, 그 결과 ‘사측은 교섭에 성실히 임하라’는 사실상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판결이 내려졌지만 회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조합원들을 상대로 10억원에 이르는 손해배상청구를 제기한 상태이다 보니, 처음 70명을 웃돌던 파업참가자들이 현재는 30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이들 조합원들의 생계문제다. 대부분이 부부가 함께 일하는 4,50대 가장들이다 보니 당장 돈줄이 끊긴 집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내와 함께 12년 동안 일해 온 김상현(47)씨는 5개월째 생활비를 벌 수 없어 가정을 돌볼 여유가 없다며 한숨 섞인 심정을 토로했다.
“파업이 지속되며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 신세가 되어버렸다.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가 있지만, 농성장을 떠날 수 없어 제대로 뒷바라지 해 줄 수도 없는 형편이다. 현재 마이너스통장으로 근근이 생계를 잇고 있다. 그러나 나 혼자 살자고 파업을 그만둘 수는 없지 않은가.”
김씨는 또한 “그동안 출퇴근 카드 찍어가며 종업원으로 부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나가라니 기업의 횡포가 아니고 뭔가. 회사는 이제라도 돌아오면 일은 주겠다고 획책하곤 있지만,  하청으로 가면 근로환경이 열악해 질건 뻔한 일이다. 일의 연속성은 또 누가 보장해 준단 말인가”라며 “하청업무 시 본사에서 받아 온 금액보다 최고 20%정도는 다운될 것”이라고 했다. 그가 갖고 있는 극심한 고용불안감이 전해져 왔다.
이들은 야외 선전전이 끝나자, 상복을 입은 조합원을 앞세우며 백화점 내로 진입을 시작했다. 불법하청까지 돌려가며 의류를 생산·판매하고 있는데도 이를 묵인하는 백화점 측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시위대가 사측 매장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노조원들과 경찰관 사이에 한차례 언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다행히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다.
한 여성 조합원은 매장에 진열된 제품들을 살펴보며 “세상에…. 이건 또 어디서 만든 거야. 리본 위치가 틀렸잖아”하며 혀를 찼다. 정식 생산라인이 전면 중단됐는데도 이렇게 매장에서 상품이 버젓이 팔리고 있는 것은 말 그대로 불법하청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법원에서 ‘쟁의기간 중의 하도급생산을 중단한다’는 판결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측은 끊임없이 불법적으로 ‘명품’을 찍어내고 있다. 김씨는 이들 불법하청공장을 찾아내기 위해 조합원들이 지방 곳곳을 쫓아다니는 게 요즘의 주된 일과라고 했다.

퇴보하는 특수고용노동자정책

시위대가 사측 매장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노조원들과 경찰관 사이에 한차례 언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다행히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다

그간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자성과 관련해서 대법원은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그 계약이 민법상의 고용계약이든 또는 도급계약이든 그 계약 형식에 관계없이 근로자가 사업 또는 사업장에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하였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하여야 한다”고 한 바 있다.
여기서 ‘종속적인 관계’ 여부는 ‘업무내용이 사용자에 의해 정해지는지, 구체적인 지휘감독을 받는지, 비품 등 작업도구를 제공받는지, 사용자에 의해 근무시간과 장소가 구속되는지, 근로제공이 계속적이고 전속적인지, 사내 복무·인사규정 등에 적용을 받았는지, 사회보장제도 등에 의해 근로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
위 사항에 대비해볼 때, 현재 루치아노최 조합원들은 “전적으로 회사의 지시하달에 의해 업무를 수행했고, 본사 공장에서 회사측의 자재와 비품으로 사측 디자이너와 관리자의 관리감독을 받으며 10여년을 일해 왔다”며 “다만 처음부터 소사장제 계약 형식이므로 사측의 복무규정 명시와 사회보장제도의 적용은 입사조건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었고, 기본급을 받진 않았지만 일정수준의 고정급이 있는데다, 회사에서 세금계산까지 맡아왔던 만큼 우리는 실 근로자가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측은 법적으로 문제될 게 아무것도 없다며 소사장제 폐지는 절대 안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동법상 이들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법안이 명확히 없기 때문이다.
비단 이들 뿐만이 아니다. 현재 레미콘 기사, 보험모집인, 학습지 교사 등이 특수고용노동자에 속해있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이들의 법정투쟁결과를 살펴보면 사법부가 번번이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려온 것이 사실이다. 주로 업무내용과 수행에 있어서의 구체적·직접적인 지휘감독 여부를 사실상의 ‘최소한의 규제’로 판단, ‘사용종속성’을 부인하는 판례가 많았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윤애림 정책국장은 “지금까지의 판례의 태도는 특수고용의 현실을 살피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특수고용의 경우 업무수행결과에 따라 보수가 결정되기 때문에 노동자 스스로가 노동강도를 높일 수밖에 없고 이것은 결국 열악한 노동조건을 가져오는 것이다. 운송노동자의 경우도 차량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노동자성을 부인하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지만, 실상은 자본이 부담해야 할 비용마저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법원과 지방노동위원회의 판결은 엇갈려 있다( 법원이 노동자성을 인정하며 단체교섭응락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인 반면, 지방노동위원회는 이들에게 독립된 사업자 판결을 내렸다). 조합원측은 이의신청 및 중앙노동위원회에 제소할 예정이지만, 앞으로의 사법부의 행보는 이들에게 불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현재 정부가 추진 중인 비정규보호법안 조차 이들 특수고용노동자들은 ‘논외 대상’이라고 하니 현재로선 이들을 보호할 법률이 부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관행화된 불평등계약이 문제
“생각해 보세요. 저희 같은 양재사들이 레미콘운전사처럼 1억짜리 차량을 가지고 회사와 계약을 맺는 것도 아니고 가진 기술 하나로 먹고사는데 노동자가 아니라니 말이 됩니까? 우리가 무슨 사장입니까, 사장은. 관행처럼 이어온 비정상적인 계약이 문제지요. 우리들이 IMF 당시 관행처럼 밀려온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일자리를 잃었을 것은 자명한 일인데 어찌 우리를 겉으로 드러나는 계약관계만으로 노동자가 아니라 합니까. 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저희 같은 사람들은 계속 생겨날 겁니다.”
형식상의 계약관계에 묶여 정당한 노동자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하소연하던 이해균(45)씨의 말이다.
이들의 시위는 오후 네 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그러나 이들이 돌아가는 곳은 집이 아닌 천막농성장. 조합원들이 돌아가며 사장 자택 앞 일인시위와 불법하청공장 추적을 병행해야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들의 파업은 언제까지 이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갈 곳 없는 이들의 처지가 꽃샘추위만큼이나 황량하기만 했다. 그나마 회사와 노조가 적당한 선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윈윈할 수 있었던 안혜영부띠끄의 사례가 이들에게 한가닥 위로와 희망을 남겨주고 있었다. 안혜영부띠끄의 경우 회사가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한 덕에 파업 6개월 만에 소사장제가 폐지되고 정상근무가 가능해졌다. 현재 퇴직금 혹은 4대보험 중 하나가 가능토록 사측과 노조가 협상 중에 있다.
현재, 노동자성을 보다 명확히 규정지을 것을 명시한 민주노동당의 비정규직법안이 국회에 제출된 상태다. 이것이 관철되어 ‘실 임금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이 근로자 대우를 받을 수 있기를, 이들 노동의 사각지대에 있는 특수고용노동자들은 간절히 희망하고 있었다.  글·사진/김혜경 기자

시위대는 사측의 불법하청을 묵인하는 백화점에 대한 항의 표시로 백화점 옥내 시위를 벌였다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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