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럭 위에 간이 상점을 차리고, 인도까지 점거하며 가지런히 상품들을 정리해 놓고 보니 그 어떤 시장도 부럽지 않다.

  따사로운 봄 햇살이 한 가득이다. 신기루 같은 햇살 한줌 머금으며 지난 3월 19일 젊음의 거리 대학로를 향했다. 그 명성을 자아내듯 거리마다 젊음이 넘실거리는 곳에서 유독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 발길을 사로잡았다. 대학로의 끝자락 혜화동 로터리. 언뜻 보아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이들이 이곳엔 무슨 일로 모였을까.
“안녕하세요~.”
서툰 한국어, 까만 피부, 커다란 두 눈이 낯선 이방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다.

여기가 서울 하늘 맞아?!

망고, 오리알, 돼지고기, 연유, 이밖에도 필리핀 사람들만 알아보는 상품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이곳은 일명 ‘리틀 마닐라’로 통한다.
평일에는 지나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인도가 일요일 아침 9시만 되면 장터로 변신한다. 바나나또론(바나나를 전병에 쌓아 튀긴 음식)부터 필라피아(물고기의 한 종류)요리까지 필리핀 전통 음식들도 거리를 장식하는 데 한 몫 거들었다. 각종 해산물은 물론 국제전화카드며, 의류, 그리고 간이 환전소도 이곳에 차려진다.

인근 주민인 김성호(56)씨는 “일요일 아침부터 오후 4~5시까지 필리핀인들이 장사를 하는데 마치 필리핀 현지에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라고 전했다.
그는 또 “필리핀에서 7년간 살았었는데, 이곳에 오면 그때 생각이 나서 좋다”라며 “현지 음식들도 맛볼 수 있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이곳, 혜화동 로터리에 필리핀 시장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7~8년 전부터라고 한다. 국민의 절반이상이 카톨릭 신자인 필리핀인들은 미사를 보고 싶어도 한국어로만 진행돼 어려움을 겪어 왔다. 이에 천주교 서울 교구가 혜화동 성당에 필리핀 신부의 집전으로 미사를 보게 하면서 이곳에 모이게 됐다는 것. 성당을 찾는 필리핀인이 매주 약 1천여 명이나 된다니, 전국에 흩어진 이들이 이곳으로 운집하는 셈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장이 들어선다. 그렇다 보니 필리핀 시장이 들어선 것은 당연지사. 트럭위에 간이식 상점을 차리고, 인도까지 점거하며 가지런히 상품들을 정리해 놓고 보니 그 어떤 시장도 부럽지 않다.

김씨는 “필리핀인들은 이곳에서 일자리 등의 정보를 나누고, 또 사교의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일자리에 대한 정보부터 헤어진 친구의 동향까지 귀동냥도 할 수 있어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멀리 지방에서부터 미사를 보기위해 올라온다고. 비단 미사만 보기 위함일까. 삼삼오오 모여 따갈로그어로 인사를 나누는 이들의 모습에서 고향을 찾은 듯한 푸근한 미소가 번져 나온다.

이국에서 받는 설움까지 ‘싹’ 없애줘

“주인이요? 나 아니요. 사장님 없어요.”
카메라를 들고 어슬렁거리는 취재진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던 로이(42)씨. 그에게 1톤 트럭을 이용해 만든 이동식 가게의 주인장이냐 묻자 단번에 아니라 답한다. 일일 아르바이트를 위해 나왔다는 그. 6년 전 한국에 들어온 그는 평일에는 공장에서, 일요일이면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한다.

“아르바이트 하는 사람. 물건 팔아요. 여기서 같은 필리핀 사람 만나 재미있어요.”
그에겐  일요일 돈을 버는 일보다 더 즐거운 일이 ‘내나라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왜 모를까. 서툰 한국어로 또박또박 말하는 그는, 자신의 나라로 가서 식료품가게를 꾸리는 게 꿈이라고 전했다.

“마까노 바이토(이거 얼마에요)?”
“3천원.”
정겨운 따갈로그어가 울리자 로이 씨가 벌떡 일어나 물건을 봉투에 담아 건넨다.
장터에는 필리핀인이 직접 운영하는 가게도 있지만, 한국인이 트럭을 임대해 주거나 혹은 필리핀인을 고용하기도 한단다. 힘든 노동현장에서 스트레스를 받다가 일주일에 한번 이곳에 모여 모국어로 마음껏 떠들고 고향 소식 듣는 재미에 이국에서의 받는 설움도 말끔히 씻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물건값도 싼 편이다. 대부분 만들어 파는 음식들은 1천 원 대인 데다 조금 비싼 식사류가 2~3천원이다보니 허기진 배를 참아가며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거기에 난생처음 보는 이국적인 음식 맛과 현지에 온 듯한 필리핀 언어가 거리를 뒤섞으니 한 번 가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한다고.

새로운 문화와의 신선한 만남을…

그런데 이상하게도 장이 선 약 20m의 거리엔 한국 사람이 지나가지 않았다. 혜화동 로터리가 필리핀인들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지만 이를 지켜보는 한국인들의 반응은 어떨까.

중년의 한 여성은 “이곳이 뭐하는 곳이냐?”라며 질문을 하더니 “이 근처에 십수 년을 살았는데, 이런 광경은 처음 본다”라고 전했다. 인근의 대학생 김모(23)씨는 “이국적인 장이 열려 상당히 신기하다. 하지만 혼자 오면 조금 꺼려질 것 같다”라고 말했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이방인에 대한 편견이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들이, 영국인이거나 미국인이었다면 우리는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해당 관청에서는 이들이 ‘불법노점상’이라 하여 단속에 나서고 있으니 새로운 이색 공간이 사라질까 아쉬울 뿐이다. 그들이 장소 이용을 할 수 있도록 조금만 배려한다면 분명, 문화적 교류는 물론 그들의 삶 자체를 이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다행이도 부정적인 입장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혜화동 로터리를 한국과 필리핀 교류의 공간으로 활용해보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을 정도로 이곳이 혜화동의 명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는 게 일부의 의견이다.

오는 일요일, 가족들과 혹은 연인과 함께 봄 햇살을 만끽하며 대학로 필리핀 장터를 거닐어 보는 것은 어떨까. 아마 새로운 문화와의 신선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글·사진/표수진 기자

표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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