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여름 토론회. 한 참석자가 패널들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뷁’
얼마 전 지하철 안에서 타블로이드판 무가지를 읽다 놀란 적이 있다. 네티즌들의 욕설이 난무하는 인터넷 댓글이라면 몰라도 아침 신문의 영화소개코너에서 이 단어를 맞닥뜨릴 줄을 누가 알았을까. ‘’은 남의 말을 무시하거나 어이없음을 표현할 때, 혹은 ‘영 아니다’라는 뜻으로 자주 쓰이는 인터넷상의 은어. 신문은 별점 한개 수준의 형편없는 영화등급을 이 단어로 표현하고 있었다. 아무리 표현이 자유로워진 요즘이라지만 독자에게 올바른 언어사용을 선도해야할 언론에서 이런 단어를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한 일이다.
한국의 문화유산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히는 우리말·글이지만 요즘만큼 일상 속에서 그 빛이 바래고 있는 때도 없는 것 같다. 이런 우려 속에 창립된 단체가 한글문화연대다.
외국어열풍 속 고개 숙인 모국어
영어가 곧 경쟁력이라 해서 온 나라에 조기영어열풍이 휩쓴 지도 여러 해가 흘렀다. 덕분에 요즘엔 영어발음은 능숙한 반면 국어실력은 현격히 떨어지는 아이들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여기에 중국어와 한자 배우기 열풍까지 가세해 모국어의 위상은 갈수록 불안하기만 하다.
한글문화연대는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잃어가는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찾고, 더 나아가 독창적인 한글문화를 일구기 위해 지난 2000년 태동했다. 연대의 유재경 간사는 “세계화와 경쟁력을 거론하며 외국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요즘이지만 한글만큼 경쟁력 있는 문자도 없다”며 “오히려 세계화 속 경쟁력은 국어와 한글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정재환(연대 부대표)과 함께 하는 한글문 화답사를 하고 있는 모습.
“우리 국민의 문맹 수준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것은 한글이 그만큼 배우기 쉽기 때문이에요. 읽고 쓰기 쉬운 특성 때문에 국민 전체의 지식수준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지요. 또한 한글은 정보통신 시대에 적합한 매우 효율적인 글자이기도 해요. 인터넷, 휴대전화 등 한국의 정보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달할 수 있었던 것도 정보화하기 쉬운 한글의 힘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말·글은 이처럼 우수한 문화유산이지만 구한말 일본어에 오염되는 한차례 수난과 더불어 국한문 혼용시기를 거치는 등 굴곡 많은 세월을 지나왔다. 어느덧 한글이 글자 생활의 중심이 되었지만 오늘날 들이닥친 외국어열풍과 통신언어의 범람 앞에 우리말·글은 다시금 휘청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유 간사는 오늘날 위태로운 현실과 관련해서 방송의 상업성과 선정성을 꼬집으며 “방송이 공공의 언어 훼손에 일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어떤 매체보다도 언어문화를 선도하는 입장으로써 방송언어는 중요해요. 하지만 시청률 올리기에 급급한 방송사들이 출연자들의 무분별한 어휘구사를 눈감아 주는 형국이라 큰 문제가 됩니다. 그나마 우리말 순화 프로그램이 등장하는 등 방송사 자체적으로 자정노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자극적인 표현이 난무하는 쇼·오락 프로그램이나, 외국어 열풍에 휩싸인 드라마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그 노력은 미비한 수준일 밖에요.”
우리말 홀대하는 사회 풍조 바로잡기
그렇기 때문에 연대는 바른 우리말·글 사용하기 운동에 주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활발한 것이 ‘우리말감시단’ 활동이다. 단체의 회원을 비롯한 누리꾼들이 중심이 되어 실 사례를 수집·분석하고, 잘못된 사례를 바로잡기 위해 전화, 인터넷, 민원제기 등의 방법으로 감시활동을 벌이는 운동이다.
유 간사는 이 외에도 구체적인 감시단활동으로 2004년 서울시의 버스개편 사례를 들었다.
당시 서울시는 시내버스에 새로운 디자인을 도입하면서 원색바탕에 옆면에는 영어 알파벳으로 R(red·광역), B(blue·간선), G(green·지선), Y(yellow·순환) 등 노선 종류를 알리는 알파벳 도안을 붙였다. 7월 버스운행 체계 개편을 앞두고 노선별 버스구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게 서울시의 설명이었지만 단체는 이미 버스들의 노선 종류가 각 색깔로 구별되는 상황에서 굳이 색깔을 나타내는 영문표시를 해줄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2004년 4월, 서울시에 시정 요청 공문을 보내고 청와대와 국회에 탄원서를 제출한 끝에 그해 10월 시내버스 영문 도안을 한글로 대체할 수 있었다.
의미있는 성과였지만 유 간사는 “비단 서울시의 경우만 아니라 정부나 언론, 기업들이 세계화 시대라고 하여 우리말을 홀대하고 외국어 배우기만을 강조하다보니 거리는 온통 영문 간판 투성이이고 한글은 천대받는 사태가 벌어졌다”며 쓴소리를 했다. 영어디자인은 세련돼 보이고 한글디자인은 미적 감각이 떨어져 보인다는 식의 잘못된 인식을 비판하며 한 말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 말글 가꾸기를 실천해 온 단체는, 회원 간에 우리이름 짓기 활동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사이트에는 우리말이름에 대한 문의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 우리말이름은 친근감을 줄 뿐 아니라 소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어감이 좋아 짓는 이들이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다. 우리말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특별히 뜻풀이를 하지 않아도 이름의 의미를 쉽게 알 수 있기도 하지만, 가온(세상의 중심이 되라는 뜻), 나래(‘날개’를 뜻하는 방언), 별하(별같이 높이 빛나는 사람이 되라는 뜻), 예님(예쁘고 고운 님), 하예라(예쁘게 하늘을 닮으며 자라라는 뜻) 등 한자이름처럼 뜻을 내포하기도 해 우리말과 한문의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다.
이 밖에도 맞춤법과 실용국어교실을 개최하고, 한글문화 강연회, 토론회 등 정기적인 학술모임도 열고 있다. 또한 일반시민들과 호흡할 수 있는 대중적인 행사와 기념공연을 통해 우리말·글의 위대함을 계속적으로 알릴 계획이다.
‘정신문명의 핵심은 말’, 신중히 사용해야
자음과 모음의 결합 속에 탁월한 과학적 규칙성을 내포하고 있는 한글은 선조의 지혜가 돋보이는 독특한 우리만의 자산이 분명하다. 하지만 무분별한 외래어의 사용과 통칭 ‘외계어(컴퓨터 문서상에서 쓰이고 있는 한국어의 변칙적인 표기를 통칭하는 말)’의 범람으로 우리말·글의 훼손이 심각한 정도에 이른 것도 사실이다. 계층을 넘어선 다양한 의견교환의 장이었던 인터넷 공간에서 오히려 의사소통의 단절을 경험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고 있는 것이다.
‘말은 그 나라 정신문명의 핵심’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말을 발전시키는 것이 곧 우리의 정신문명을 발전시키는 지름길이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획일적인 언어사용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우리말·글의 사용에 있어 좀더 신중하고 사려 깊은 태도가 필요한 때이다.
글/김혜경 기자 사진/한글문화연대 제공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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