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5월이 찾아왔다. 유원지가 북적이는 인파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카네이션 판매가 연중 최고치에 달하는 시기. 연중행사처럼 부산스럽다가도 금방 수그러들곤 하지만 그래도 이달만큼은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돌아볼 수 있어 뜻 깊고 정겹다.
가정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며, 정신적인 영양을 공급하는 비옥한 대지가 되어준다. 그리고 가족은 언제나 한 자리에서 우리의 귀가를 기다려주는 따뜻한 얼굴이다. 하지만 거저 얻은 축복인지라, 우리는 그 가족의 소중함을 쉬이 홀대하곤 한다.

여기, 한 사람을 주목해 보자. 결혼 후 어렵게 자신의 가정을 일구기 전까지, 한번도 단란한 가족의 품을 느껴보지 못했던 박태수(49)씨. 그는 평생 동안 가족의 정이 고팠던 ‘천애고아’였다. 그런 그가 9년 전, 한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에도 없던’ 가족을 되찾았다. 35년 만에 되찾은 그의 가족 이야기를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내 가정 이룬 뒤에도 남아있던 ‘상처’

그는 5살 무렵, 충무로의 한 보육원에 버려지다시피 맡겨졌다. 당시의 기억은 전혀 없지만 후에 되찾은 가족들 얘기로는 얹혀살던 큰집의 큰어머니 손에 이끌려 보육원에 맡겨졌다  한다. 그 곳에서 박 씨는 매일같이 얻어터지고 굶기 일쑤였지만 공부에 소질이 있던 까닭에 학교만은 다닐 수가 있었다.

고1이던 해에 보육원이 비리로 사라지자, 그는 영락보육원으로 옮겨 가 새 보금자리를 틀 게 된다. 지옥 같았던 이전 시설과 달리, 그 곳에선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던 박 씨, 그러나 그 행복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교회가 운영하던 시설이라 모든 게 비교할 수 없이 좋았지. 처음으로 맘 편히 먹고 자고 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만18세가 넘으면 여지없이 나와야 했기 때문에 그 다음이 문제였어. 보육원을 나오자 갈 곳이 없더라구. 보육원의 후원으로 어렵게 대학에 입학 할 수 있었는데, 나오고 나니 학비는 커녕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거야. 그래서 대학을 중도 포기하고 말았는데, 그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외롭고 힘든 시기였어….”
곁방살이 하는 고등학교 친구 집을 찾아가 낯선 식구들 틈에서 낀 잠을 자야만 했던 당시를 떠올리는 박 씨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때만큼 가족이 사무치던 적도 없었어. 비빌 누군가라도, 아니 함께 푸념할 가족 한 사람만 있었어도 오기로든 뭐든 대학만은 포기하지 않았을 텐데…. 사방이 콱 막혔다는 절망감에 죽어버릴까 결심도 했지.”

막상 죽을 결심을 하자 그 마음으로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박씨는 그 때부터 오로지 악착같이 살아가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비빌 언덕 하나 없이,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오늘껏 버텨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당시의 고생이 자양분이 됐다고 말했다.

그에게 늦게나마 행복의 시기가 찾아온 건 스물 셋에 아내 기순(48)씨를 만나면서부터였다. 함께 가정을 꾸려가며 행복을 하나하나 쌓아나간 박씨. 변변한 기술 하나 없이 이일 저일 떠돌던 자신이 인쇄업에 뛰어 들어 착실히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그는 그 과정이 마치 태어나 처음 선물을 받아본 아이처럼 서툴렀다고 회상했다.

“내 가정을 꾸린 뒤에야 비로소 가족이 뭔지, 혈육의 정이 뭔지를 알 수 있었나봐. 하지만 오래도록 가족이라는 개념 없이, 강한 자아 하나로 버티며 살아왔던 나였기에 가족을 이룬 뒤로도 쉽게 마음이 안정되지는 않았던 거 같아. 뭐라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내 가정이 소중하면서도 정작 가정 안에서 단란함을 가꾸려고 노력하지는 못했다고 할까?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 그게 이제 와 미안하고 그래….”

박 씨가 한때 자신을 짓누르던 심적 공황 상태를 어렵게 털어 놓았다. 그저 돌보고 이끄는 일에만 신경을 썼지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 한번, 아이들 입학식 한번 같이 간 적이 없었다며 지난날을 후회했다. 밖에서 남들에게는 다 하는 것도 가족들에겐 유독 못 해 줬다며, 다 커버린 두 자녀에게 미안하다는 박 씨. 그는 알고 있었다. 내면 깊숙이 채워지지 않는 빈 자리가 상처처럼 자신을 계속 과거에 묶어 두고 있다는 것을. 혹여 있을지 모를 가족, 그러나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던 가족이 내 가정을 이룬 후에도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렇게 그는 덮어두었던 ‘뿌리 찾기’에 나섰다.

판박이처럼 닮은 사진, “이것이 혈육이구나”

“원래 찾을 생각까지는 없었어. 세월과 함께 가족에 대한 원망도 그리움도 사그러들었으니까. 이제 와 찾아 무얼 하나, 막상 찾게 되도 반갑고 좋기만 한건 아니라던데…. 별별 생각이 많았지. 하지만 뿌리를 알고 싶다는 겨자씨만한 생각은 도통 없어지지가 않았어.”

  그렇게 지난 97년, ‘사건과 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에 박씨의 사연이 나갔다. 아무 기억도 남아 있지 않던 터라, ‘몇 년도 어느 지역에 버려진 박태수씨가 부모나 형제자매를 찾는다’는 막연한 문구가 자막으로 흘렀을 정도다. 당시 박씨의 이름도 나이도 모두 버려진 이후에 새로 짓고 추정한 것이였으니 정확한 정보랄 것은 버려진 당시 찍은 사진 한 장과 언제 다친 지도 모르는 목에 난 상처뿐이었다고. 하지만 미국에서 방송을 보던 둘째 누나는 그것만으로도 단박에 박씨를 알아봤다. 목에 난 상처도 그렇지만, 버려질 당시의 얼굴과 입고 있는 스웨터가 몇 십 년 전의 기억을 생생히 떠올렸다고 했다.

“날 찾는다고 미국에 있던 누나들이 늘 그 방송을 보고 있었던가 봐. 큰 기대 없이 나간 건데 방송이 나간 지 2주 만에 연락이 왔지 뭐야. 그러고 한 달 쯤 후에 미국에 살던 두 누님이 한국을 찾아와 대면하게 된 거고.”

그렇게 찾게 된 가족이 누나 셋과 형이었다. 본디 6남매였다는 것도, 밑으로 두 살 터울인 막내동생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는 것도 후에 알게 된 일. 그 간 나머지 형제들은 서로를 찾아 진작부터 연락을 해왔지만 박씨만은 좀체 찾을 수가 없었단다.

박씨는 40년 만에 ‘이용인’이라는 본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혀 다른 성과 이름으로 살아오다 맞닥뜨린 생소한 이름이 호적상 1대로 기록된 지금의 ‘박태수’라는 이름과 오버랩 됐다. 실제나이도 알고 있는 나이보다 두 살이 더 많은 56년생이었다. 헤어진 가족을 찾고 보니 두 살이 더 늙어 있지 않겠느냐며 허한 웃음을 보였지만, 본디 태어난 해와 이름까지 잃고 산 세월이 왜 슬프지 않겠는가.

박씨는 큰누나에게 전해 듣고서야 비로소 가족이 헤어진 사연을 알 수 있었다. 당시 빚에 쪼들리던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병저 누웠던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됐다. 제법 나이가 들었던 누나들은 남의집살이를 가게 됐지만 어린 동생들은 보육시설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빨리 돈 벌어 동생들을 찾겠다던 누나의 바람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던 어머니를 보고도 막지 못했던 죄책감을 늘 지고 살았던 큰 누나가 이후 미국에서 형편이 서자 동생들을 찾아 나선 것이다.

큰 누나와 둘째 누나는 진작 미국으로 이민을 갔지만, 형과 막내누나는 줄곧 서울에서 생활했다고 하니, 같은 하늘 아래 스쳐지나갔어도 몰랐을 그 인연이 참 기구하다 싶다.

“평생 고아라 생각하며 살았는데 막상 누나와 형을 만나고 보니 가슴이 막막하대. 그건 원망도 그리움도 아닌 다른 감정인데, 희한하게도 처음 누나들을 만났을 때 아무런 감흥이 없는 거야. 그냥 가슴 한켠이 마비된 것만 같고…. 이상하게 눈물도 안 나. 큰누나는 그런 나를 보고 조금 섭섭해 하기도 했어.”

박씨는 장롱 위에서 낡은 상자 하나를 꺼내 놓았다. 상자 안에는 앨범 한권과 국제우편들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미국에 사는 누나들이 보내온 거라 했다.

편지에는 늦게 찾은 남동생에 대한 두 누나의 회한과 미안함, 조금이라도 옛 기억을 되살리고 푼 에피소드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누나들이 아무리 옛날이야기를 해 줘도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어. 그래도 뭔가 하나 둘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야지 ‘아, 맞다!’하고 손뼉치고 울고 웃고를 하지, 통 기억이 없으니 이야기 하다가도 간혹 말문이 막혀….”

추억 하나 기억나지 않는 가족을 맞이한 그의 혼란은 또 어떤 것일까. 슬픈데 눈물이 흐르지 않는 비현실적인 감각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얼핏 짐작해 본다.
박 씨가 방안 가득 오래된 사진들을 펼쳐 놨다. 사진 속 인물들의 닮은 면모가 눈에 잡혔다. 특히 둘째 누나와 박씨의 어린 시절 얼굴은 판박이처럼 닮았다. 그는 세월의 강 앞에 가로막혀 있다가도 이 사진만 보면 ‘이것이 혈육이구나’ 싶단다.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현재 미국에 있는 두 누나와는 편지와 전화통화로 연락할수 밖에 없지만, 서울에 사는 막내누나와 형은 정기적으로 왕래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그렇게 자주 찾아가지지는 않는다고.

“찾아갈 가족이 있다는 건 좋은 거야. 문득문득 집이 아닌 다른 곳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도 나한테는 기적 같은 일이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좀더 자주 찾아가 접하면서 혈육의 정을 나누고 싶은데, 그게 그렇게 또 간단하지만은 않아. 형제마다 다 사는 정도가 틀린데, 혹시 풍족하지 않은 내 살림이 그들에게 부담을 주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이 들거든. 그런 생각 없이 지낼 정도로 허물이 없어지면 좀더 편하게 누나도 형도 볼 수 있을 거야.”

두 자녀에게 친가라는 든든한 배경을 만들어 주어 가슴 뿌듯하다는 박씨.갑자기 시댁이 생겨 낯설었다는 기순씨는 물론,두 자녀 역시 아버지에게 가족이 생긴 게 기쁘고 반갑다.

조금 더 일찍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지만, 그래도 두 자녀에게 친가라는 든든한 배경을 만들어 주어 가슴 뿌듯하다는 박 씨. 갑자기 시댁이 생겨 낯설었다는 기순 씨는 물론, 두 자녀 역시 아버지에게 가족이 생긴 게 기쁘고 반갑다.
“숨기셨지만 아버지가 늘 외로움을 타신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도 자식으로서 해 드릴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는데, 이제 늦게나마 마음의 고향을 찾으신 거 같아 좋아요.”

힘들 때 곁에 있어 주어야만 꼭 가족인 건 아니다. 때론 어찌할 수 없는 이유들로 아픈 이별을 경험해야 하는 가족도 이렇듯 있다. 하지만 다행히 이들은 만났고, 이제는 세월이 갈라놓은 틈새를 어떻게 매워 가는가 하는 발전적인 고민만 남았다. 때론 귀찮은 혹처럼, 들기 버거운 짐처럼 여겨질 때도 있지만 많이 가졌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가족이 있어 든든하고 하루를 살 힘을 얻는다. 그들은 바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글·사진/김혜경 기자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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