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런은 말했다. ‘죽음으로써 모든 비극은 끝나고 결혼으로써 모든 희극은 끝난다’고.
플런은 또 말했다. ‘결혼 전에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보라. 결혼 후에는 한쪽 눈을 감으라’고.
결혼에서의 성공이란 단순히 올바른 상대를 찾는데서 오는 게 아니라 올바른 상대가 됨으로써 온다는 브리크너의 말도 있다.

결혼에 대한 위트 있는 격언들이 지혜롭다. 대부분이 핑크빛 예찬 보다는 짓궂은 ‘엄포’ 내지는 ‘경고’에 가깝거나,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는 말들이지만 그래도 듣는 사람 모두가 고개 끄덕일 정도로 ‘옳은 말’임에는 분명하다. 가히 살아 본 사람들의 경험이 밀도 높게 농축된 생활백서 수준. 그러고 보면 결혼에 관한 것만큼 구구절절 수긍이 가는 속담이나 격언도 없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들먹이는 게 바로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하는 게 결혼’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소개할 부부에게는 이보다 더 적격인 표현을 붙여주고 싶다. 8년 연애 끝에 작년 3월 결혼한 최성(33)·문양미(28) 커플. 이들에게 결혼은 참다운 뜻에서 연애의 시작이다(괴테).

여고생과 군인아저씨로 시작된 첫 만남

이 두 부부의 만남은 요즘 사람치곤 조금 별나다. 20세기 로맨스의 대표 수단으로 통했던 펜팔이 이 둘 사이를 엮어준 매개체이니 말이다. 양미 씨가 고3이던 97년, 학교에서 해마다 의례적으로 보냈던 위문편지 속에 이 둘을 엮어줄 한 통의 귀한 인연이 있었던 셈이다.
“내용이야 그다지 기억날만한 게 없는데, 악착같이 주소를 적어 넣었던 기억은 나네요. 그 때 편지에 주소를 쓰면 선생님들이 추려내서 폐기처분 해버린다는 유언비어가 돌았거든요.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친구들이 지레 주소를 적지 않았는데, 저는 답장 받고 싶은 마음에 눈치껏 주소를 적어 넣었어요. 당시 오빠가 말년 병장이었는데, 부대로 온 편지 중에 개인 집주소가 적힌 편지가 몇 없더래요.

그래서 고참의 특권으로 개 중 고른 게 제 편지였고요. 인연이 되려 그랬나보죠?”
그렇게 ‘군인오라버니’로 시작되는 편지가 둘 사이를 왕래하기 시작했다. 그 나이답지 않게 대찬 어리광도 형형색색의 꾸밈도 많지 않던 여고생의 밋밋한 편지가 왠지 정이 가더라던 성이 씨. 양미 씨 역시 편지로는 어떤 남자인지 모를 정도로 ‘예의바른’ 그의 편지가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했다고 한다.

성이 씨는 곧 제대를 했지만 둘의 첫 만남은 수능시험이 끝난 97년 12월 14일에 이루어졌다. 내심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나 걱정했던 양미 씨는 생각보다(?) 반듯한 남편의 외모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나 뭐래나.
“첫 느낌이요?”
당시를 회상하는지 성이 씨의 입꼬리가 야릇하게 올라갔다.
“그냥 애 같았어요, 중학생쯤 돼 보였죠. 청바지에 단발머리, 얼굴엔 귀여운 주근깨가 깨알처럼 박혀서는…. 내가 그 모습에 반한 건가?”

초반부터 닭살 남편의 아부가 만만치 않다. 이런 기술이 있으니 나이 어린 여자친구를 8년 동안이나 붙잡아 둘 수 있었을 테지만, 서로가 서로의 첫사랑이라는 사실이 이 둘을 엮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끈이었다고 부부는 말한다.

9년전 주고 받았던 위문편지. 이십여 통의 편지가 오가는 사이에 둘에게 무슨일이 벌어진 걸까? 안도 뻔~하다.

“헤어질 위기도 한두 번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이 사람과 헤어지면 다음엔 이 보다 더 좋은 사람 못 만날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래된 연인들은 서로에게 실증도 난다던데 저희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그런지 늘 오빠동생처럼 죽이 잘 맞았어요.”

남편 만나 일찍 코 꿰인 바람에 미팅 한번 못해 본 것 빼고는 일절 후회도 아쉬움도 없었다니 천생연분은 다 타고나는 법인가 보다.
하지만 무작정 좋아한다고 결혼한다면야 인륜지대사라는 수식은 생겨나지도 않았을 터. 이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느낌 없이는 감히 지를 수 없는 게 결혼 아니던가.

“사랑은 함께 지내온 시간과 함께 더 깊어지는 거 같아요. 오랫동안 정이 들어서 이제는 이 친구가 곁에 없으면 외로워 안 되겠구나 생각이 들었을 즈음 아내에게 청혼했지요. 결혼은 누구보다도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과 해야 잖아요.”

양미 씨는 청혼을 받던 순간을 떠올리며 행복한 웃음을 흘렸다. 긴 연애기간 동안 간지러운 멘트 한번 날리는 법 없던 남편이, 처음으로 마음을 다해 준비한 낭만적인 순간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2년 전 화이트데이를 하루 앞둔 날,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에서 남편이 ‘프로포즈’라는 코스요리를 주문했어요. 그때까지도 전 그냥 화이트데이 이벤트인가 했죠. 음식이 나오면서 종업원이 반지 곽 하나를 내밀더라구요. 어리둥절해 있는데, 남편이 조용히 ‘나랑 결혼해 줘’ 하더라고요. 참 밋밋한 청혼인데 또 그 말처럼 명료하고 멋진 청혼이 어디 있겠어요. 눈물 한줄기 또로로 흘리면서 알았다고 그랬죠. 그 때 남편도 저를 보며 눈물을 흘렸어요.”

그 순간이 떠오르는지 부부가 잠시 눈을 맞추고 웃었다. 두고두고 생각해도 질리지 않을 명장면이 있다는 건 참 부러운 일이다.

함께 늦잠 잘 수 있는 주말이 가장 행복해

긴 연애 끝에 결혼해 어느덧 일주년을 맞은 부부지만 아직도 동거하는 기분이라는 두 사람.

지난 3월 6일 결혼 1주년 날. 긴 연애 끝에 어느덧 일주년을 맞았지만 부부는 아직도 동거하는 기분이란다.

한 집에 사는 것 빼곤 결혼 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다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도 ‘살림’이라는 중한 책무가 만만치는 않을 텐데, 바쁜 일상에 집안 살림 돌볼 시간이 없다며 신랑신부 모두 고개를 젓는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그래머인 성이 씨는 낮밤이 따로 없는 업무 탓에 휴일도 반납하기 일쑤인지라 퇴근 시간이 빨라야 9시, 어느 땐 12시를 넘기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양미 씨 역시 이제 한창 업무가 손에 익는 3년차 해외운송회사 직원이다. 고된 업무를 끝내고 돌아오면 언제나 9시가 훌쩍 넘어 있으니 둘다 식사도 거의 밖에서 해결한다.

“결혼하고 둘이 같이 저녁 식사를 한 적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요. 처음 두 달은 오빠 아침밥은 꼬박꼬박 챙겨 줬는데, 오빠가 아침 식사하는 습관이 안 돼 있어서 부대끼더라고요. 그래 그것도 그만 뒀더니 정말 밥할 일도 없지 뭐예요. 퇴근하면 녹초가 돼 씻고 자기 바쁘니 빨래도 청소도 모두 주말에 몰아서 할 밖에요.”

신혼의 단맛도 즐길 틈 없는 바쁜 월급쟁이 생활이지만 그래서 더욱 짧은 둘만의 시간이 소중한지도 모르겠다. 가장 행복한 순간을 꼽으랬더니 둘 다 서로를 꼭 부둥껴안고 자는 그 시간이 제일 행복하단다.

“하루 일과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누워 꽃사슴(정말로 성이 씨는 인터뷰 중간중간 아내를 이렇게 불렀다)이 제 팔을 베고 콜콜 잘 땐 정말 행복하죠. 새벽에 팔이 저려서 깨어나도 마냥 행복해요.”
“둘 다 같이 쉬는 주말이 몇 안 돼서 어쩌다 토요일날 함께 쉬게 되면 그게 그렇게 좋아요. 남들처럼 쇼핑이나 드라이브 하러 밖으로 도는 게 아니라 저녁나절까지 방에 콕 박혀 늘어지게 잠만 자요. 가끔 밖으로 나가 바람이라도 쐬고 싶을 때가 종종 있지만 오빠에게 가장 필요한 게 잠이니까 저도 그 옆에서 같이 자게 돼요.”

워낙 잠이 부족한 직장인이기도 하지만, 학창 시절부터 잠꾸러기에 지각대장이었던 양미 씨는 결혼 후 가장 힘든 것이 ‘스스로 알아서 깨어나야 하는 것’이라고. 주로 ‘쬐끔’ 더 부지런한 남편이 깨워주는 편이지만, 이불 속에서 서로 ‘니가 먼저 일어나라’며 꼼지락대다가 결국 둘 다 지각하기 일쑤란다.

성격과 말투, 식성도 모자라 습관마저 닮아 버린 걸까. 그러고 보니 이 부부는 싸울 일도 없어 보인다.
“왜요, 가끔씩 싸우기도 하죠. 서로 마음에도 없는 모진 말로 상처도 주고, 억지도 부리고…. 그러다가 정신 차리고 싹싹 빌고.”
9년 동안 싸우기도 무던히 싸워왔다는 둘은 매번 싸우는 모양새가 비슷해서 싸움이 일어날 조짐이 감지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싸움 종료 후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라고 한다.

“처음엔 별것도 아닌 일이 발단이 돼 일이 점점 커져요. 대부분 제가 짜증을 잘 내서 항상 오빠의 화를 돋구죠. 그러다 오빠가 팽 하고 토라져요. 그러면 이번엔 제가 안달이 나서 사과하고…. 그렇게 다시 화해하고 또 싸우고를 반복해요. 안 봐도 뻔 하죠.”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성이 씨가 가만 고개를 끄덕인다. 겉으론 완고한 척 뻐기고 있다가 마지못해 화해하는 듯 받아줬지만, 사실 매번 먼저 화해를 걸어오는 아내에게 항상 고맙고 미안했다면서. 그러면서도 다음에 또 싸움이 벌어지면 아마도 패턴은 똑같을 거라고 실실 웃는다.

  이 부부에겐 원활한 부부생활을 위해 결혼 전 세운 원칙이 하나 있다. 바로 아무리 화가 나도 각방을 쓰지 않는 것. 다행히 오늘까지도 등을 돌리고 누울지언정 따로 잔적은 없단다. 등을 돌리고 자다가도 눈을 뜨면 어느새 마주보고 누워있더라니 지지고 볶아도 한방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이 제 힘을 발휘한 셈이다.

“덕분에 여지껏 큰 고비 한번 없었다는 거 아니에요. 고비는 오히려 결혼 전에 있었어요. 서로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 일이 많았거든요. 제가 일년 간 중국 유학 중에 있을 때랑 오빠가 사회 초년생일 때 지방으로 회사가 이전해 갔을 때요. 자주 볼 수 없다는 불안감에 더 자주 싸우게 됐던 거 같아요. 결국 오빠가 한달을 못 견디고 서울로 올라왔지만요.”

어렵게 들어간 회사마저 박차고 나올 정도로 양미 씨를 사랑했다나 뭐라나. 아내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지 어디 한번 물어나 보자.
“우리 꽃사슴은 실수도 많고, 고집도 세고, 귀도 얇아 갈팡질팡도 잘 하고, 잘 울고, 엉뚱하고, 자주 덜렁거려요. 모르는 것도 너무 많고요. 그런 게 다 사랑스러워요.”
사랑 앞에 홈은 더이상 홈이 아니라는 단순한 진리가 빛을 발하는 대답이다.

“서로를 반씩 닮은 예쁜 아이 낳고파”

이 두 커플의 바람은 어서 빨리 대출금 갚고 아담한 환경 만들어 똘망똘망한 아이 낳아 키우는 것이다. 아들 딸 둘은 낳고 싶지만, 워낙 아들이 귀한 딸부자 집안에서 자란 양미 씨는 일단 아들부터 낳고 싶단다. 두 사람 닮아 잠보에 지각 잘하고 우유부단한 아이가 태어날 것 같다는 최성·문양미 부부.

이 두 잉꼬부부를 보니 떠오르는 결혼에 대한 격언이 또 한 가지 있다. 부부가 앞으로 살아가며 확인케 될 평범한 삶의 진리 하나. ‘결혼은 작은 이야기들이 계속되는 긴긴 이야기이다(피천득).’ 

글/김혜경 기자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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