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의 기자들은 석 달에 한번 꼴로 골머리를 앓는다. 바로 기자 자신이 직접 발로 뛴 경험을 취재하는 이 기자체험 코너가 석 달에 한번 꼴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체험 기사 자체가 취재하기 힘들다기 보단 좀 더 참신하고 의미 있는 주제를 찾아 고민해야 하는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있어서 라고나 할까. 때론 좋은 취지와 참신함을 다 살리고도 정작 섭외가 어려워 고생고생 하다 끝내 다른 아이템으로 우회해야 하는 ‘악재’가 숨어 있기도 하다. 자기 이름과 얼굴 걸고 나서는 코너인 만큼 어느 정도의 부담감도 있고 말이다. 아무튼 봄빛 찬란한 5월호의 바통은 어김없이 돌아왔고, 그와 함께 ‘어디, 단 시간에(길면 지친다) 이야깃거리 풍부한 체험의 현장 없나~’하는 기자의 머리도 따라 돈다. 마침 장애인의 날을 맞아 크고 작은 행사들이 여럿 있던 때라 기왕이면 장애인과 함께 할 수 있는 체험이 좋겠다 는 취지가 섰다. 그래서 단박에 결정한 게 ‘장애인과 함께 달리는 마라톤 대회’였다. 그러나 이번 달, 그렇게 만만하진 않았으니…. 짧고 굵었던 그날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보자.
175번, 같은 175번을 만나다
4월 15일 오전 9시 반. 강서구 가양동에 위치한 구암공원은 입구에서부터 주황색 마라톤티셔츠를 걸친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인파에 놀라워하고 있는데, 행사를 주최한 늘푸른나무복지관의 박현미 사회복지사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많죠? 작년보다도 지원자가 늘어서 올해는 접수를 일찍 마쳤어요. 장애·비장애인 모두 합해서 250명 쯤 되겠네요.”
둘러보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한 연령층의 지역주민과 장애인들이 행사열기에 들떠 있는 게 보였다. ‘한걸음 사랑 마라톤 대회’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짝을 맞춰 손을 잡고 달리는 어울림의 자리로, 인식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한 게 올해로 벌써 5회째를 맞았다.
마라톤 구간은 3킬로와 5킬로 구간, 둘로 나뉘는데, 장애인은 파란색, 비장애인은 붉은색으로 적힌 동일한 가슴번호의 파트너와 짝을 이루어 달리게 된다.
마라톤 초자인 기자가 달릴 종목은 당연 3킬로 구간. 접수대에서 부여받은 175번이라는 가슴 번호가 맘에 들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의 파트너도 파란색의 175번 친구가 되겠는데…. 함께 손 붙잡고 달릴 파트너에 대한 기대가 새록 고개를 쳐들었다.
“부탁하신 대로 잘 뛰는 친구로 짝지어 줬으니까 열심히 뛰어야 할 거에요. 작년 3킬로 구간에서 1등한 친구거든요.”
‘앗, 그게 아닌데! 난 잘 달리는 친구로 골라달란 말은 하지 않았다고요!’
며칠 전 전화로, 함께 달릴 친구가 달리다 문제가 생기면 어쩌냐는 둥 (이제 와 생각해 보면)주제넘은 소리를 남겼더니, 글쎄 그 말을 오해해 ‘과잉 친절’을 베푸신 모양이었다. 100미터 단거리는 곧잘 뛰었지만 장거리에 들어가면 늘 뒤로 축축 쳐지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더구나 작년 1등이라니. 여러모로 ‘이건 아니’었다.
‘까짓거, 100미터 달리기 삼십 번 한다 생각하면 되잖아? 100미터는 곧잘 뛰었다구! 스무스하게 100미터를 40초에 돌파한다 치고, 40초 곱하기 삼십 번…. 1200초? 1200초면 얼마야, 대충 20분 뛰면 되는 거야? 뭐…가뿐하지.’
암산에 약한 머리까지 굴려가며 분초를 계산했더니 제대로 된 암산인지는 몰라도 어설픈 안심이 들었다. 그럼 어디, 175번 선수 만나 보실까?
“안녕하세요.”
같은 번호가 적힌 건장한 체격의 남성 참가자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그가 대뜸 밝은 소리로 “175번~!”하고 맞아주었다. 반갑다는 그 나름의 인사법인 모양이다. 그에게서 어렵게 알아낸 이름은 정훈(30·자폐증). 통성명을 하며 기자의 이름 석자를 말해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내 “175번!” 하는 명쾌한 호칭뿐이었다. 아무래도 이날 하루 내 이름은 ‘175번’이 될 것 같은 묘한 예감이 들었다.
접수가 얼추 마무리 되자 단상 위의 사회자가 참가자들을 불러 세웠다. 사회자 옆으로 푸짐한 상품들이 등수가 적힌 종이를 붙이고 쌓여 있는 게 보였다. 3킬로 구간 1등 상품은 선풍기. 그걸 보자 정훈 씨가 대뜸 “175번! 1등! 1등 할거예요!”하고 큰소리를 쳤다. 에구에구, 전년 우승자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다~~!!
내심 나 때문에 1등 못했다고 원망 들을까 겁나던 차에, 사회자에게서 희소식이 들려왔다. 작년 1,2,3등 참가자들은 ‘아쉽게도’ 올해 상품 수여에서 제외된다나? ‘휴-.’ 파트너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기자에게는 한결 부담 더는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들었죠? 올해는 1등 해도 상품을 안 준대요.”
애써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성심성의껏 그 사실을 일러 보지만 이런, 우리의 파트너, 여전히 “1등!”을 외치며 다부진 승부욕을 불태우는 것이 아닌가. 상품을 주든 안 주든 목표는 1등, 그것 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 같다. 아직 준비 운동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제자리 뛰기를 하지 않나, 생수병을 챙겨오질 않나, 의욕이 하늘을 찔렀다.
요즘 한창 인기폭발인 꼭지점 댄스를 배우며 몸풀기 운동에 돌입하자 파트너뿐 아니라 전 참가자들이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그 모습을 보니 덩달아 신이 난 기자도 열심히 꼭지점을 밟아 보지만, 그 쉽다는 다이아몬드 스텝이 맘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그러나 그러면 어떠랴. 되든 안 되든, 남이 보든 말든, 제 기분에 신이 나 열심히 추어대는 참가자들을 보니 부끄러울 것도 없고 눈치 볼 것도 없어졌다. 에라 모르겠다, 이러면 돼? 이러면 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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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파트너 다리는 백만 불짜리 다리~!
20여 분 간의 준비운동과 몸풀기 댄스가 지나고, 드디어 본격적인 마라톤 출전 시간. 여기저기서 1등 할 거라는 다짐이 터져 나오는 와중에도 파트너의 열의는 최고조에 달해 있다.
“175번! 3킬로, 1등 할 거예요!”
오, 나의 파트너는 온통 이 세 가지 생각뿐인 걸까.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죄책의 화살이 되어 가슴에 콕 박혔다. 윽~!
‘미안해요. 그건 나와 함께 하는 한 무리라고 봐요.’
삐익~. 출발 휘슬이 울리고, 5킬로 구간 참가자들이 먼저 출발선을 밟았다. 그 뒤를 5분 간격으로 휠체어 선수들과, 3킬로 구간 참가자들이 잇따라 나갔다. 250여 명의 참가자들이 일제히 앞으로 튀어 나가니 자칫 넘어져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꼭 잡은 손을 밀고 당기며 알맞게 속도를 맞추는 장애우와 비장애우의 콤비가 멋지게 기우임을 말해 주었다. 그렇게 우리의 시작은 ‘가뿐’했다.
알맞게 구름이 드리워진 하늘이 마라톤 치르기에는 제격인 날씨. 한강 자전거 도로를 따라 달리는 구간으로 접어들자 잔잔히 흐르는 강물이 한결 시원함을 더했다. 하지만 성격 급한 우리의 파트너, 컨디션이 최고조인지 초반부터 치고나가려는 기세가 역력했다.
“처음엔 조금 천천히 가도 돼요, 나중에 속도를 내면 되니까 그 때 앞으로 나가요.”
“네~!”
웬일인지 파트너가 고분고분 내 청을 들어준다 싶더니, 이거이거 말 뿐이다. 붙잡은 손을 쭉쭉 끌어당기는 게 힘도 왜 그렇게 장사인지. 처음 얼마간은 100미터 달리기를 섭렵했던 왕년의 기량으로 어떻게 덤벼봤지만, 얼마 못 가 금세 체력이 바닥을 보이고 말았다.
“헉~ 헉~, 좀 천천히 가면 안 될까요? 2분만….”
콕콕 찔러대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우는 소리를 했더니 고맙게도 기본 매너가 몸에 밴 정 훈 씨, 차마 억지로 끌고 가지는 못하고, 잠시 걸음을 늦춰준다. 그러면서도 발은 계속 제 속도를 유지하며 제자리뛰기를 하고 있다. 마음은 벌써 저만치 앞서 나간 모양인데, 그러면서도 꼭 잡은 파트너 손을 놓지 않는 게 용할 정도였다.
“뛰어요! 3킬로! 1등 해요!”
파트너의 재촉에 쉬어가는 마음도 편치가 않다. 그래요! 알았어요! 뛰자구요!
그렇게 뛰었다 걸었다는 반복할 즈음 앞서가는 무리들에 자극을 받았는지, 정훈 씨가 자꾸만 손을 바짝 잡아끌었다. 앞으로 나가자는 무언의 압력. 하지만 기자도 기진맥진이라 돌덩이처럼 무거운 몸을 어떻게 할 재간이 없다. 할 수 없이 손목에 힘을 주고 무게중심을 뒤로 몰아 파트너 붙잡아매기 전술을 구사할 밖에.
‘몰라요 몰라, 더 이상 못 뛰어욧!’
하지만 본디 뛰기 위해 이 대회에 나왔을 정훈 씨 아니던가. 점점 애가 닳는 눈치더니 오로지 달리고 싶은 한 마리 말처럼 냅다 앞으로 치고 나가 버린다. 아뿔싸. 한 순간에 놓쳐버린 손이 부질없이 허공에 뜬 꼴이라니…. 앗! 정훈 씨, 이거 반칙이야~!
“저기요~! 둘이 손잡고 가야한단 말이에요! 거기, 175번!!”
그러나 이미 놓쳐버린 버스라 했던가. 떠난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는 법. 더 불러 봤자 남겨진 사람만 무안할 뿐이다.
‘참 잘도 뛰네, 나 때문에 그 동안 어떻게 참았을꼬….’
익숙한 흰 모자가 아스라이 멀어졌다. 조금 서운했지만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빼면 일단 몸이 편해져 좋았다. 애초 등수에 욕심 없이 참가에 의의를 둔 기자였다. 어차피 나중 가선 다시 만날 인연 아니던가. 이참에 쉬엄쉬엄 걸으며 경치나 살필 심산으로 주위를 둘러 봤다. 반대편 라인에선 어느새 반환점을 돌아 온 참가자들이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휠체어를 앞세우며 여유롭게 걸어가는 팀, 경보 하듯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재미나게 보조를 맞추어 뛰는 팀, 돌턱에 잠시 앉아 함께 숨을 고르는 팀…. 저마다 서로의 기량대로 빠르게, 혹은 느리게 코스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나처럼 장애우의 발목을 잡는 격인 비장애인도 상당수 눈에 띈다. 훈련을 통해 꾸준히 단련돼 있는 장애인들에 비해 마라톤 경험이 없는 비장애인들이 못 쫒아가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은 것 같았다.
이런 날 모처럼 장애인과 함께 뛴다는 것이 일방적인 봉사의 개념이 아님을 몸으로 느끼는 순간. 지닌 능력의 한계로 누군가의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내 안에 자리하고 있던 작은 교만이 조용히 얼굴을 붉혔다.
다시금 분발하려는데 ‘어라, 저게 누구야?’. 저 앞에서 역주행을 하며 달려오는 낯익은 얼굴 이 보였다. 오! 그럼 그렇지! 버림 받은 게 아니었어~ 잠깐 산책 갔다 오신 거죠?
“175번! 찾았어요!”
특유의 맑은 목소리가 예쁜 소리를 했다. 같은 숫자를 가슴에 단 동료애가 불끈 달아오르는 감동의 순간! 뒤쳐진 파트너를 생각하고 다시 돌아온 마음씨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
다시금 손을 잡고 보폭을 맞추자 멀지 않은 곳에 반환점이 보였다. 파트너는 아마도 저 곳까지 찍고 나서 다시 되돌아 온 것이리라. 반환점을 돌았다는 작은 표식이 달린 팔찌를 차고 방향을 틀자, ‘이제 반 왔구나’ 하는 생각에 희열과 피로가 동시에 엄습했다.
그래도 돌아오는 길은 더 가뿐하겠지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이 길이 언제 이렇게 길었나 싶다. 겨우 기워놓은 옆구리가 금세 다시 터져버릴 것처럼 쿡쿡 아파왔다. 입은 바짝 타고 허벅지는 뭉쳐오고. 이러다 비치된 앰블런스에 내가 실려 가는 건 아닐까 짐짓 엄살끼가 발동하는데, 그러든 말든 여전히 무쇠다리를 자랑하는 파트너의 몸은 피로를 모르는 양 열심 그 자체다. 여러모로 영화 <말아톤>의 초원이를 쏙 빼다 박은 정훈 씨. 지구력 싸움에선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그의 재능이 부러웠다.
“힘내세요! 다 왔어요!”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곳곳에 배치된 진행요원들이 힘을 북돋워 줬다. 출발지점인 공원 내로 접어들자 정말 고지가 멀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다리에 힘을 실어 주었다. 바짝 마른 입술을 다시자 짭짤한 소금기가 느껴졌다. 몇 미터 앞으로 하얀 줄을 가로지른 결승선이 눈앞에 보였다.
완주의 영광을 그대에게!
마라톤을 완주했을 땐, 많은 팀들이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뒤였다. 몹시 지쳐있긴 했지만 결승선을 끊을 때까지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으니 오늘의 미션도 무사히 완수한 셈. 생애 최초의 마라톤으로는 꽤 훌륭한 내용이지 않았나 싶다. 긴장했던 팔다리는 제멋대로 후들후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남 앞에 보이기 민망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왠지 개운했던 건 변함없이 쌩쌩한 파트너와 함께, 무사히 마라톤을 완주했다는 뿌듯함 때문이리라. 다행히, 그리고 멋지게도 혈색 하나 안 바뀐 파트너는 등수에 상관없이 완주의 기쁨에 한껏 만족한 모습이었다.
‘175번! 여러 모로 많이 배우고 갑니다!’
짝짝짝~! 끝까지 기자를 ‘175번’이라 부르며 함께 뛰어준 정훈 씨에게 (내 멋대로)완주의 영광을 돌리고 싶다. 그나저나 운동 좀 해야지….
글/김혜경 사진/최경훈 기자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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