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한 보육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는 송정희(가명·만17)양은 요즘 통 잠이 오지 않는다. 내년이면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시설을 나가야만 하는데, 홀로서기를 해야 할 날이 다가올수록 불안감에 전에 없던 고립감마저 밀려와 평상심을 잃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모아놓은 돈이라야 실업고에서 현장실습을 나가 벌어 놓은 200여만 원이 전부. 여기에 시설 퇴소시 주어지는 자립정착금 500만원이 보태어져도 실질적으로 ‘자립’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현실이 암담하기만 하다.
서울 동작구의 자립생활관에 거주중인 김도훈(가명·23)군도 마찬가지다. 시설 퇴소 후 대학 진학자에 한해 제공되는 이곳에서 3년간 주거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도 24살이 되는 내년 이후에는 시설을 나가야만 한다. 그동안에는 장학금도 받고 아르바이트도 뛰어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해왔지만 당장 월세라도 살 집을 장만해야 하는 내년을 생각하니, 그 불어날 지출규모를 감당해낼 자신이 없다. 진작부터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보았지만 자격증에 유학에 날고 기는 친구들도 백수생활을 면치 못하는 요즘, 그 역시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실 자립과 거리 먼 그동안의 지원수준
이렇듯 말이 좋아 ‘자립’이지 실상은 준비 없이 세상에 등 떠밀리듯 내몰리는 시설퇴소아동의 수가 매해 800~900여명에 이른다. 시설아동들은 대학입학이나 직업훈련, 질병·장애 등 특별한 사유가 아니고서는 누구나 만18세가 되면 자립을 모색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서울 SOS어린이마을 허상환 원장은 “적령기의 아이들은 퇴소시를 준비하며 심리적, 사회적으로 자립을 연습하지만 충분한 뒷받침이 안 돼 큰 부담을 안게 된다”고 이야기 한다.
“사실상 아이들은 비자발적으로 사회에 내보내질 뿐 아니라 자립 준비기간도 짧아 상당수 아이들이 내팽개침을 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 퇴소 시 받게 되는 자립정착금 은 현실적으로 옥탑방 보증금 수준밖에 안 돼 월세도 구하기 힘든 경우 고시촌으로 들어가는 아이들도 많다. 퇴소시 아이들이 갖는 심리적 압박감도 크지만 무엇보다 경제적 자립 없이는 온전한 ‘자립’은 불가능한 일이다.”
미취학 아동에서부터 스무 살 전후의 아동까지 총 121명의 아이들이 생활하고 있는 서울SOS어린이마을에서도 매년 7,8명의 아이들이 시설을 나선다. 이중에는 최근 정부지원 등 우대사항이 늘어 대학진학을 선택하는 아이들이 늘고 있지만,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아 실 대졸자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진학자에게 주어지는 정부혜택은 일시 자립거처 마련과 첫 학기 입학비, 식비 수준의 생계비 지원에 그쳐 나머지 비용은 아동 본인 부담을 원칙으로 장학제단 연결과 시설 자부담 등으로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실상 시설아동들이 학업을 무리 없이 마칠 수 있는 충분한 지원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허 원장은 “그동안 대학에 진학하는 시설아동에 대한 정부지원은 충분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주거걱정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큰 부담을 덜지만 실상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인 점을 고려한다면 보다 세심한 배려와 지원이 따라야 한다. 시설아동 역시 대학생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유지는 필요한데, 현재 교통비조차도 지원받지 못해 지원이 필요한 아동의 경우 책값과 교통비, 소정의 용돈을 모두 시설 차원에서 부담해 왔다”고 말했다.
또 현재 자립생활관에서 생활하는 대학진학자는 사실상 휴학이 불가능한데, 휴학을 신청할 경우 정부지원대상에서 제외돼 생활관에서 퇴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는 학업 외의 다른 길을 모색할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며 일년 정도 휴학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좀더 실질적인 자립모색차원에서 취업의 길을 택한 아이들 역시 자립이 수월하지만은 않다. 20대의 저조한 취업률과 열악한 근무환경, 높은 이직률 탓에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워, 이들 역시 생계유지에 급급한 생활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주거·학자금 지원 등 자립지원책 확대
이처럼 이제까지의 퇴소아동에 대한 지원은 취업 준비기간 동안 일시 보호해 주는 자립생활관(13개소 233명 생활, 24세까지 가능)을 통한 주거제공, 지자체로부터 대학입학금 및 등록금 등의 일부 지원, 퇴소시 지급되는 자립정착금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매년 발생하는 900여 명의 퇴소아동 중 일부에게만 일시주거가 제공되고, 학자금 및 자립정착금 지원 액수도 미흡하여 대다수 퇴소아동들은 주거문제, 취업 등 실질적인 자립에 어려움이 많았다. 지역 별로 다소 차이는 있지만 퇴소아동들이 시설을 나서며 받게 되는 자립정착금은 평균 300~500만원 선. 시설을 통한 결연후원금이나 아동 스스로 벌어놓은 돈이 없다면 아이들은 이 금액만으로 혼자 살 방도를 마련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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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설아동들은 특별한사유가 아니고서는 누구나 만 18세가 되면 자립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그간의 자립지원책은 극히 미비해 실자립에 어려움이 많은 게 사실이었다. |
정부는 복지부, 교육부, 건교부 등 관계부처 합동으로 지난 1월 시설퇴소아동에 대한 자립지원방안을 발표한 바 있다. 퇴소아동 자립지원대책은 아동복지시설 퇴소자에게 영구임대아파트 입주자격 1순위부여, 그룹홈 입주, 전세자금 융자, 학자금 지원 확대, 의료급여혜택부여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우선적으로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구임대주택 입주자격 1순위 부여와 관련해서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에 대한 개정절차를 진행 중에 있다. 또 기존 장애인·미혼모·가정폭력피해자 등을 대상을 실시했던 그룹홈 시범사업에 시설퇴소자도 포함시키고, 전세임대지원과 더불어 전세자금 융자지원도 확대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대학진학자에게는 기숙사 우선배정과, 그동안 취업준비 기간 중에 일시 거주가 가능했던 자립생활관 의 이용기간을 기존 24세에서 25세까지로 확대해줄 방침이다. 또 단순 숙식제공에 그친 자립생활관 운영을 바꿔 취업과 상담지원, 생활지도 프로그램이 가능하도록 전문인력을 기존 1명에서 3명까지 추가 배치할 계획이다.
또한 각 대학별로 사회적 배려 대상자들에게 장학금을 우선적으로 지급할 예정이며, 생활고로 학업을 중도 포기하는 사례가 많은 것과 관련해서는 대학진학학자금지원을 확대할 예정이다.
또 지금까지 액수가 적고 시·도별 차이가 심했던 자립정착금 지원액을 늘리는 방안이 지자체별로 추진되며, 일정 기간 동안의 의료급여 지원도 검토 중에 있다. 이와 함께 취업?상담 등 시설퇴소아동에 대한 효과적인 서비스 제공을 위해 현재 운영중인 자립지원센터(16개소)의 인력을 증원(1→2명)하고 운영지원을 확대(1억4천만→2억4천8백만원)하여 퇴소자에 대한 자립지원서비스를 강화하는 한편, 지역사회 역량을 적극 활용하여 시설아동에게 1:1지역사회 결연 및 1인1기술갖기운동도 전개해 나갈 계획이다.
시설아동의 특수성 고려한 세심한 배려는 미흡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의 신혜령 교수는 이 같은 정부 발표와 관련해서 “그동안 제일 심각한 게 주거와 경제적 문제였는데 이 최우선적 과제가 선결될 것으로 보여 고무적이다. 그러나 국가 및 지자체가 퇴소아동에 대한 자립지원사업을 적극 추진하도록 근거규정을 두는 등 ‘틀’을 종합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이와 관련해서 주거, 취업, 학자금, 생활지원 및 상담, 후원 등 사후관리 자립지원사업 추진근거를 마련키 위해 올 상반기 중 아동복지법개정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그동안의 현행규정상 자립지원사업을 추진할 근거규정이 없던 것에 비추어 볼 때, 한 단계 진일보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허상환 원장은 그러나 “휴학 기회 제공, 자립준비를 돕는 전담직원의 효율적 배치, 대학진학자의 품위유지비 등 정서적·경제적·환경적으로 특수성을 지닌 시설아동에 대한 세세한 배려와 관련해선 아직 미흡한 점이 많다”며 꾸준히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현재 전국 277개 아동복지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은 1만9천여 명에 이른다. 아동은 어느 사회에서나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차세대 인력의 핵심으로, 사회는 이들이 건강히 성장하고 발달하도록 돌볼 의무와 책임이 있다. 이들이 머지않아 사회를 짊어질 원동력으로 건강하게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재정적 지원과 함께 시설아동의 상처까지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사회의 따뜻한 지지와 협력이 절실하다. 시설아동들의 성공적인 사회이전을 위한 앞으로의 정부와 각 지자체, 그리고 시설의 행보에 큰 관심과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글/김혜경 사진/최경훈 기자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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