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평택 미군기지의 대규모 확장이 추진되면서 연일 계속되고 있는 ‘대추리 사태’를 뉴스로 접하며 착잡함을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결국 물리적 충돌로 이어지고 마는 대치상황과 그 속에서 몸 닳고 마음 닳는 주민들의 모습은 보는 사람 모두의 마음을 우울하게 한다. 언제나 하나로 모아지지 못하는 주체들의 입장차와, 여전히 몰아가기식 플레이를 구사하는 수구언론의 구태스런 발상, 그리고 그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여론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다. 민주주의 한번 잘 해보겠다며 유세가 한창인 한편에서 ‘강제’며 ‘진압’이라는 서슬 퍼런 단어가 무섭게 살아 작용하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이런 속에 한국은 물론 아시아 여러 나라의 인권현장을 만날 수 있는 인권영화제가 5월6일부터 14일 사이 종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렸다. 갈길 먼 우리 인권의 현주소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인도, 방글라데시, 동티모르, 필리핀, 버마 등 다양한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아시아 각국의 인권현장을 고발해 낸 의미 깊은 영화제였다. 그 중에서도 버마(미얀마)의 현실은 한국의 현재와도 연결된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이달 ‘세상 밖으로’에서는 나라 밖으로 시선을 던져 버마의 숨겨진 인권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군부 만행에 눈감은 해외투자기업
지난 5월 10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선 특별한 토론마당이 진행되었다. 버마의 인권운동가 카사와 씨의 활동을 담은 다큐멘터리 <책임회피 Total Denial>의 상영 후 감독과 주인공, 버마 인권운동가들이 함께 참석한 가운데 ‘영화 밖 이야기 마당’이 열린 것이다.
우리에게는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지(그는 현재까지 버마군부에 의해 10년 넘게 가택연금 상태이다)여사로 알려진 버마는 13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군부정권이다. 영국과 일본의 식민통치를 거치면서 자행된 소수민족 분리정책으로 민족 간 갈등이 깊어진 고단한 역사의 나라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군부의 오랜 독재정치와 계속된 내전으로 수많은 버마인들이 고향에 머물지 못하고 난민촌과 정글을 떠돌며 살고 있는데, 국민들은 정치 얘기를 드러내놓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인권유린이 심각하다.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버마 인권운동가 마웅쩌 씨에 따르면, 버마에서는 5명 이상이 모여 있으면 체포할 수 있는 이유가 되며, 자유롭게 외출할 수도, 군부 허락 없이는 부모의 집도 찾아갈 수 없다. 때문에 가족을 수십 년 간 만나볼 수 없는 가족해체 현상은 이미 버마에선 너무도 기본적인 인권침해의 예라고 한다. 이처럼 인권유린이 심각한 국가이지만, 이곳에 투자하는 외국 기업은 계속적으로 늘고 있다. 버마에는 원유와 천연가스 등 미개발에너지 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기 때문이다.
밀레나 카네바 감독의 <책임회피>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펼쳐지는 67분짜리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미국의 거대기업 우노칼과 프랑스의 석유회사 토탈이 버마에서 개발한 천연가스를 태국에 판매하기 위해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고, 버마군부가 이 뒤를 봐주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온갖 인권침해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투자기업의 안보를 이유로 야다나 지역에 군대를 파견한 버마군부는 대규모 공사를 위해 주민들에게 강제이주와 강제노동, 강간, 살인 등 무수한 만행을 저지른다. 해외기업의 투자유치는 버마 군부의 부를 증가시켜줄 뿐 버마국민과 야다나 지역 주민에겐 그 실질적인 이득이 돌아가지 않는다. 영화는 사업가를 꿈꾸던 카사와 씨를 인권운동가로 변신케 한 버마의 인권현실을 고발하며, 인권유린의 직접적 책임자 우노칼이 법정에 서게 된 경위와 재판진행 상황을 9년간 집요하게 뒤쫒는다. 결국 긴 싸움 끝에 지난 2005년, 카사와 측은 미 법정의 배상판결을 받아내며 감동적인 승리를 거뒀고, 야다나 지역 주민에게 제소당한 토탈 역시 프랑스 법원으로부터 65억원에 해당하는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두 건 모두, 해외기업이 주민들에게 직접 인권침해를 가하지 않았더라도 사업 파트너인 버마 군부가 저지른 일에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묵과하지 않은 서방세계의 판결로서, 작년 말 국제사회를 뜨겁게 달군 이슈가 된 바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는 것은 바로 한국기업에 의한 ‘제2의 우노칼과 토탈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 때문이다. 대우인터내셔널과 한국가스공사가 버마의 가스개발사업에 뛰어들며 버마는 더 이상 우리가 ‘강 건너 불구경’만 해선 안 될 대상이 된 것이다.
대우인터내셔널, ‘제2의 우노칼’ 답습 우려
지난 2005년 10월 대우인터내셔널의 버마투자에 반대하는 항의시위가 말레이시아, 인도 등 13개 국가에서 열렸다.
지난 2000년, 버마 북서부 뱅갈만 A-1광구의 독점탐사 계약을 체결한 대우인터내셔널은2004년 1월에 잠재가치가 4조~6조원에 이르는 두꺼운 가스층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슈에(버마어로 황금이라는 뜻)’라 불리는 A-1 광구의 지분은 2002년 대우인터내셔널이 공동투자자를 유치해 한국가스공사(10%)와 인도석유공사(20%), 인도가스공사(10%)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 또한 대우인터내셔널은 2004년 2월에도 A-1 광구 면적의 3배가 되는 A-3 광구의 개발권을 획득한 바 있다.
대우인터내셔널과 한국가스공사는 2010년부터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가 중국 또는 인도로 수출할 계획이라고 한다. 슈에 가스전은 지금까지 버마에서 개발에 들어간 가스전 중 가장 큰 규모. 우리 정부는 가스 개발로 발생할 경제적 이익에 크게 도취해 있지만 한편에서는 기업과 군사정부의 개발사업으로 받을 주민들의 피해를 우려하는 국내외 환경단체와 인권단체들의 목소리도 높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작년 10월에는 한국의 버마 가스개발사업에 대한 항의집회가 13개 국가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국제사회의 여론을 떠나서라도 우노칼과 토탈, 이 두 건의 사례가 한국에 시사하는 바는 크다. 버마의 현재 인권 상황에 비추어볼 때, 한국의 버마 가스개발사업이 인권보호를 위한 대책마련 없이 진행될 경우, 앞의 두 서방기업의 사례처럼 우리기업이 연루된 인권침해가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높기 때문이다.
토론회에 참석한 국제지구권리(ERI: earthrights International)의 캐롤 랜슬리 씨는 "해외 기업 유치사업은 버마군부의 가장 큰 소득원 중 하나이지만 각 나라들이 투자하는 자본의 극히 일부만이 버마의 국민에게 돌아가고 있다. 나머지는 모두 국민을 억압하는 군부정권의 배를 채우는 일에 쓰일 뿐이다”라며 “현재 대우가 개발하고 있는 곳은 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천연가스 매장지로, 50개 대대 규모의 군대가 집결하고 있다. 그 와중에 많은 인권유린과 환경파괴가 예상되지만 대우는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토지몰수나 강제노역 등의 인권유린은 없을 것이라는 말만 하고 있다. 하지만 현지 서쪽 지역에선 이미 우노칼 사례와 비슷한 상황들이 계속 확인되고 있다"고 말했다.
버마의 인권운동가 조샤린 씨는 “버마에 대한 한국의 투자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대부분의 버마국민이 인정하지 않는 현 군사정권에 대한 투자를 당분간 ‘유보’할 것을 당부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한국이 투자한 자본은 결국 군부확장에 씌어져 이는 곧 동아시아 평화를 헤치는 일에 일조하는 꼴이 될 것이라며 “혹자는 경제적인 측면만을 이유로 개발 유보에 반대할지도 모르지만, 인권유린이 자행되는 걸 알면서도 자국의 이익만을 고집한다면 수백 년간 우리가 보아온 제국주의와 다를 게 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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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시민단체와 국제사회는 이들에게 묻는다. ‘우노칼과 토탈의 선례를 되풀이하지 않을 대책이 마련되어 있는가’라고. 우리 기업들은 이 질문에 구체적인 답변을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국내에 들어온 다국적 기업뿐만 아니라 해외에 진출한 국내 기업의 감시 역시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유엔이사국 선출에 즈음하여….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한 나라였던 버마. 하지만 버마의 현 상황은 우리의 지난 군사정권시절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많이 닮아 있었다. 공교롭게도 유엔이사국으로 선출된 기쁨을 충분히 누리기도 전에 접하게 된 버마의 현실은 여러모로 우리에게 생각해야 할 거리들을 던지고 있었다. 국내의 자본이 국제사회에서 인권유린에 일조하고 있는 마당에 국제평화를 논하는 유엔이사국이 될 자격이 과연 있는지, 진지하게 자문해 본다.
***tip***
버마 역사에 대한 이해 : 왜 ‘미얀마’가 아닌 ‘버마’인가
인도차이나 반도 서쪽에 위치한 버마. 버마의 공식 국가명은 ‘미얀마연방’이다. 버마라는 국명(國名)이 미얀마로 바뀌게 된 경위는 다분히 역사적이다.
1988년, 버마에서는 62년부터 지배해온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대규모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88년 8월 8일, 10만 명 이상의 시민과 학생, 심지어 승려들까지 참여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 항쟁이 채 결실을 맺기도 전에, 서마웅 장군을 위시한 신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대대적인 강경 진압을 계속했다(이 과정에서 최소 2,000명에서 최대 20,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아직까지도 그 정확한 수는 밝혀지지 않았고, 진상조사 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이다).
권력을 장악한 군부정권은 이전의 모든 기구를 폐지하고,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SLORC)의장이 국가수반이 되었다. 1990년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야당 민주국민연맹(NLD)이 총선에서 승리했으나 여전히 군의 통제를 받고 있다.
이렇게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신군부는 시위대에 대한 무력진압으로 실추된 대외적인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1989년 국명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개정하였다. 국가의 공식 명칭을 불법으로 정권을 탈취한 군부정권이 국민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바꾸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버마의 민주화를 기원하는 사람들은 국내외적으로 ‘미얀마’ 대신 ‘버마’라는 국명을 사용하고 있다. -‘함께하는시민행동(action.or.kr)’에서 발췌-
글/김혜경 기자 사진제공/인권영화제(www.sarangbang.or.kr/hrfilm)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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