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남구 하상장애인복지관 녹음실 안. 머리에 헤드폰을 쓴 한 중년 여성이 시각장애인에게 들려 줄 책을 정성스럽게 읽어 내려가고 있다. 차분하고 낭랑한 그의 목소리는 50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또렷하고 매력적으로 들린다. 호흡과 발성, 띄어쓰기 등이 한껏 감정을 몰입해 예사롭지 않은 것이 수준급이다. 그의 손에 들고 있는 책 속의 활자는 컴퓨터와 마이크 앞에서 따뜻한 음성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렇게 시각장애인들에게 오랫동안 시각장애인 낭독 봉사를 하며 어둠을 밝혀주는 사람이 있다. 바로 아나운서 경력이 있는 김은수(53)씨가 그 주인공. 가슴속에서 울려나오는 그의 목소리에서 젊은이 못지 않은 삶의 열정이 느껴졌다.

봉사 아닌 삶의 ‘낙’

2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몇 시간씩 혼자 책을 읽어 내려간다는 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일까. 아마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녹록치 않은 작업일 것이다. 올해로 10년째 녹음 봉사를 하고 있는 김은수 씨는 몇 년 전 우연한 기회로 복지관과 인연을 맺어 활동을 시작했다. 아나운서 출신이었던 그에게 낭독 봉사는 매우 매력 있게 다가왔던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성우나 아나운서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어요. 목소리에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 마다하지 않았죠.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녹음 봉사는 평소 책을 좋아하는 저에게 딱 맞는 봉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이라면 어떤 장르도 마다 않는 문학소녀였던 그는 어릴 적부터 항상 손에 책을 끼고 다녔단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대학에서 언어와 관련된 불어를 전공했고 지금까지 번역 일과 책에 관련된 일을 하며 틈틈이 낭독 봉사를 해오고 있다.

처음에는 ‘자신의 능력을 살려 좋은 일 한번 해보자’하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이제 그에게 낭독 봉사 일은 생활의 일부가 돼 버렸다. 
시각장애인의 눈이 돼주고 있는 그녀가 10년이라는 세월동안 녹음한 책은 60여권, 시간으로 환산하면 1천여 시간에 이른다. 주로 교양위주 중심으로 책을 녹음했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 되도록 많은 책을 접하게 하기 위해 다양한 장르를 녹음했다고.  

“개인적으로 종교적인 책을 좋아해요.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책만 녹음할 수는 없죠. 봉사자 각자의 목소리 스타일이 있기 때문에 복지관 직원들이 책을 선정해 주는 편이에요. 물론 그 책 중에 다시 제가 좋아하는 책을 선별하고 있어요.”

김훈의 『칼의 노래』,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등이 그가 여지껏 녹음한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들이다. 특히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은 시각장애인이야기라 그에게 더욱 뜻깊게 다가온 작품이었다고.

김씨는 “공지영 씨 작품은 전에도 한번 읽은 적이 있어요. 낭독을 하면서 다시 읽게 되었는데 처음 접했을 때보다 시각장애인 입장에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읽으면서 중간 중간 눈물이 나 작업을 순조롭게 하지 못한 기억이 나네요” 라며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지 눈시울을 붉혔다.

“목소리만 듣고 인사 건넬 때 가장 뿌듯해”

물론 단시간 끝나지 않는 작업이라 일은 힘들다. 좁은 녹음실 의자에 홀로 앉아 몇 시간씩 녹음을 하고 나면 진이 빠져 다음 스케줄은 잡을 수 없을 정도니 말이다. 또 녹음봉사가 있는 날이면 그 전날부터 목소리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일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힘에 부치는 작업이다. 하지만 오히려 봉사를 하면서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겐 마냥 행복하단다. 책을 그냥 읽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낭독을 해야 하기 때문에 꼼꼼히 책을 읽게 되는 것도 좋은 점이라고.

“주는 것보다 얻는 만족감이 더 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내 행복이지 봉사라고 할 수 없어요.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나눌 수 있다는데서 오히려 활력을 찾아요. 또,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어 좋고 내 목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한 줄기 햇빛으로 새롭게 살아가면 이보다 좋은 것이 또 있을까요.”

꼬박 10년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사랑을 베푼 탓일까. 김씨는 시각장애인들에게 연예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오랫동안 차분한 그의 목소리에 매료되어 그가 녹음한 작품을 골라 찾는 팬들도 있을 정도다. 가끔 팬레터도 받고 오며 가며 만나는 이들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듣기도 한단다.

“시각장애인들이라 제 목소리만 듣고 저를 알아보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어요. 그럴 때가 가장 가슴 뭉클하죠. 또 그런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봉사를 계속 할 수 있는 것 같고요. 우리는 눈으로 보고 정보를 얻지만 그들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려서 들어야 하잖아요.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과 희열을 느끼죠.”  

오랫동안 시각장애인들과 인연을 맺어서일까. 자연스럽게 시각장애인들에게 관심이 많아졌다. 길에서 시각장애들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 스스럼없이 말을 걸게 될 정도니 말이다. 또한 그들을 통해 자신과 처지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법도 배웠다고.

하지만 김씨는 여전히 시각장애인을 도와줄 봉사자가 부족하다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고 한다.

“봉사자가 겉보기엔 많은 것 같아도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보고 싶은 책을 당장 서점에 가서 볼 수 있지만 시각장애인이 신간을 읽으려면 빨리 녹음도서로 만들어져야 하잖아요. 하루에도 신간은 수천 권 쏟아져 나오는데 이에 비해서 녹음봉사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가장 안타까워요.”

낭독 봉사라고 해서 꼭 목소리가 좋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김씨는 거듭 강조한다. 표준어를 구사하는 성인남녀는 누구나 낭독봉사에 참여할 수 있지만 봉사활동에 앞서 꼭 갖추어야 할 것은 바로 성실성. 다른 봉사활동에 비해 시간활용을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자기가 맡은 책은 끝까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그이지만 낭독 봉사 외에도 전공을 살려 번역 일을 꾸준히 하고 있어 여느 직장인보다 바쁘다. 때문에 시각장애인들 앞에서 직접 책을 읽어주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시간을 조금씩 줄여서 그들에게 직접 책을 읽어주고 싶다는 계획을 얼마 전 세웠다.

“낭독 봉사를 하면서 ‘내가 녹음한 책을 직접 들려주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어요. 한번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만약 시작하면 꾸준히 할 생각이에요. 그것이 최근 들어 계획한 소박한 꿈이기도 해요.”

“제 인생과 결혼한 걸요”

타고난 끼와 넘치는 열정이 오히려 그를 평범하게 살지 못하게 한 것일까. 그는 아직 인생에서 해보지 못한 일이 있다. 바로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을 꾸리지 못한 것. 그는 흔히 말하는 독신 여성이다. 뛰어난 미모에 지성까지 겸비한 그가 굳이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서른 쯤 되었을 때부터 독신으로 살자고 결정한 것 같아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종교적인 이유도 포함되고요. 일에 대한 욕심도 너무 많았어요. 독신으로 사는 것을 지금까지 후회해 본적은 없어요. 저는 제 인생과 결혼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지금 삶에 만족하는 걸요.”

그는 힘닿는 한 낭독 봉사를 계속 할 계획이다. 또, 기회가 된다면 평소 메모한 글을 정리해 책을 한권 내고 싶다는 작은 소망도 내비췄다. 자신의 능력으로 소외된 이웃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오히려 행복하다는 김은수 씨. 그는 ‘따뜻하고 맑은’ 목소리 만큼이나 아름답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글/박경미 사진/최경훈 기자

박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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