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지나간 유년의 기억이 오롯이~

인생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 한번쯤 다시 살아보고픈 시절이 있다. 가장 화려했거나 가장 건강했던 시절, 혹은 가장 낭만적이었던 시절…. 누구에겐 한창 생장하던 사춘기일 수도 혈기왕성했던 청년의 때일 수도 있겠지만, 지칠 줄 모르고 뛰놀던 유년시절이 어찌 보면 가장 싱싱하고 꿈같았던 인생의 황금기가 아닐까 싶다. 까닭 없이 하루하루가 모험처럼 즐거웠던, 생의 무료함 따위와는 거리가 멀던 시절. 무릎이 성할 날 없이 뛰어 다니던 그 때는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자고 일어나면 하루가 다르게 커 있던 키와 그 못지않게 빠르게 자라던 생각의 나이테는 지금 그 성장을 멈췄지만, 오래된 기억들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지나간 한때를 떠올리게 한다. 그 또래 아이에게 학교는 작은 사회를 경험케 해 주는 좋은 교육장이자 놀이터였다. 하루의 반나절을 지내는 그곳에서 아이들은 책을 읽고 친구를 만들고 싸움을 배우고 꿈을 쫒느라 분주하다. 지나온 지 오래인 교정을 밟으며 유년의 기억을 더듬었다.

복도와 실내화. 매일같이 하는 청소가 아이들의 일과인지라 학교는 반짝반짝 윤이 난다. 매끄러운 마루가 깔린 복도. 아이들이 수업중일 때의 복도는 요조숙녀처럼 조용하다. 얼마 후 종료벨이 울리고 선생님이 총총히 교무실로 사라지면 복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끌벅적 떠들고 울부짖는 아이들의 요란한 앞마당이 되어줄 것이다. 벽에 붙은 신발장에 신발주머니와 실내화가 가득하다. 푸른 실내화, 분홍 실내화, 개중에는 새침한 여자아이 것이 분명할 꽃무늬 실내화도 있다. 하지만 줄곧 그리운 눈으로 찾고 있던 건 때에 절어 회색이 되어버린 하얀 실내화. 요즘 아이들은 실내화도 깨끗하네, 푸념을 하려는데 다행히 구석에 옹그리고 있는 민무늬 실내화 한 쌍이 눈에 띄었다. 신발 주인은 노느라 정신이 팔려 실내화를 빨아오라는 선생님 말씀을 잊고 곧잘 핀잔을 듣는 사내아이일 것 같다.

아이들의 군것질. 운동장 한켠, 오후 수업이 없는 저학년 아이들이 일찌감치 가방을 벗어 던지고

삼삼오오 모였다. 손에는 저마다 색소가 첨가된 과일맛 음료가 들렸다. 선생님들이 불량식품이라 하여 사먹지 말 것을 당부하시던 여름철 단골 군것질거리. 파인애플 향이 짙은 음료를 깡깡 얼려 플라스틱 수저로 갉아 먹던 그 시절과 맛까지 똑같은데 가격만 250원, 다섯 배가 올랐다. 옛날에는 50원이었다는 얘기를 해주니 한 아이가 “그 때는 가난했으니까-”하고 너무 쉽게 말한다. 물가변동 따위 알 리가 없다. 그 돈이면 뽑기 두 판을 하고도 핫도그 하나에 별과자 두 봉지를 더 살 수 있었다고 했더니 별과자를 모른단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250원으로 하드 다섯 개를 살 수 있었다고.”
그랬더니 꼬마 왈, “그럼 지금보다 더 부자였네요?”

민지의 전성시대. 2학년 민지는 철봉 오르기를 잘한다. 같은 반 도영이에 따르면 자기네 반 통틀어 민지만큼 잘 타고 오르는 아이가 없단다. 맨발이 된 민지가 손을 척척 뻗어 어느새 어른 키의 세배는 될법한 철봉 끝까지 올랐다. 하늘을 등진 아이의 실루엣이 도심 속 어린 타잔마냥 멋지다. 거기서 철봉이 끝나지 않았다면 아마 하늘 끝까지라도 올라갔을 성 싶다.
“원숭이다 원숭이.”
사내아이 체면 때문인지 도영이의 말투에 엷은 시샘이 담겼다. 그러든 말든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는 사람이 여기선 왕. 남자와 여자 사이의 신체적 열세를 아직 이 나이는 모른다. 성별에 크게 좌우되지 않고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이 시기가 그리 길지 않다는 것도 아마 모를 테지. 민지가 철봉을 자주 오르다 생긴 물집 좀 보라며 손바닥을 내민다. 아이의 훈장과도 같은 물집은 언제 터져버렸는지 그 밑으로 새 살이 나고 있었다.

오후 늦게까지 야구부. 오후 두시 반.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익숙한 멜로디가 교정에 울리자 아

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제 몸통만한 가방을 맨 아이들이 부산히 쏟아져 나와 실내화를 갈아 신고는 집으로 학원으로 총총히 사라진다. 월드컵 열풍 탓인지 사내아이들의 태반은 축구에 여념이 없지만, 오후 늦게까지 운동장을 떠나지 않는 녀석들은 언제나 야구부다. 푸른색 유니폼을 맞춰 입고 구슬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장을 도는 사내아이들. 날아올 공을 뚫어지게 주시하는 빡빡머리 아이의 눈매는 어리지만 진지하다.
“커서 야구선수가 될 거야?”
질문은 단순한데, 대답은 구체적이다. 이승엽 같은 홈런왕, 박찬호 같은 메이저리그투수가 될 거란다. 세상 많은 직업들이 모두 성에 안차는 때. 과학자도 비행사도 탐탁치 않아 하루에 열두 번도 더 꿈을 뒤엎던 나이지만 야구부는 다르다. 입단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야구선수가 꿈이다. 반드시 야구선수가 되고야 말 작정인지 우렁차게 구호를 맞춰 운동장을 도는 아이들의 눈에 투지가 반짝인다.

3학년 1반. 늦게까지 남아 뒷정리에 분분한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 교실에 들어갔다. 반들반들 윤

이 나는 교실 안. 구조는 그다지 달라진 게 없지만, 책상 마다 하나씩 달린 개인 쓰레받기와 빗자루 세트가 재미나다. 교실 앞에 붙은 시간표. 목요일 6교시는 ‘재량’이다. 재량껏 책을 읽거나 전 시간에 채 못한 과제를 하면 되려나. 일주일에 한번 있는 ‘컴퓨터’시간은 예전엔 없던 과목이다.
창가에는 초파리가 담긴 투명한 병이 몇 개 놓였다. 팻말에는 삐뚤한 아이 글씨로 ‘과일 껍질 따위에 모여드는 초파리는 식초 같은 신 냄새가 나는 물질에 잘 모여들어 초파리라 부른다. 일단 초파리를 기를 수 있는 사육병에 과일껍질 등을 놓아두고, 날아오면 가둬 관찰한다. 한살이가 15일 정도로 매우 짧아 관찰하기 쉬우며 기르기도 쉽다’라고 적혀있다.
과학시간용 관찰일기 과제인가 본데 이것 말고도 부레옥잠이나 강낭콩 기르기, 올챙이 성장과정 관찰하기도 있었다. 수질정화능력이 탁월한 부레옥잠에 시험 삼아 쌀뜨물이며 커피우유 따위를 부었었는데. 개구리밥은 양지바른 창가에만 놓으면 스스로 잘 자라 따로 돌봐 줄 필요도 없었다.

텅 빈 교실. 아이들이 다 가고 없는 늦은 오후의 교실은 고즈넉하다. 책상 숫자는 훨씬 줄어서 30개를 겨우 넘지만 아이들은 예전보다 체격이 자라 책걸상 크기가 조금 커졌다. 예전 같았으면 풍금과 교탁이 있었을 앞자리가 휑하다. 풍금은 그야말로 구시대의 유물이니 이젠 찾아볼 수가 없을 테고, 컴퓨터 수업 시 스크린을 가리는 교탁은 더 이상 필요가 없는 모양이다.
이렇듯 조금씩 그 모양새를 바꿨지만 여전히 학교에는 어린 활기가 가득하다. 담벼락 곳곳에 적힌 어린 낙서들과 선생님의 호통소리로 학교가 꽉 찬다. 그렇게 하루하루 바삐 지내다보면 황금의 유년도 금세 가득 차버려서 아이들은 눈 깜짝할 새에 졸업을 맞는다.

글·사진/김혜경 기자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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