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렇듯 어려서부터 손끝에서 탄생하는 생산의 미학을 안 기자가 선택한 이달 주제는 공방체험이다. 취미생활도 할 겸 진작에 배우고 싶었건만 차일피일 미뤄 온 터라 내심 쾌재를 불렀다.
“손톱부터 자르시지요”
<사랑과 영혼>에 나오는 그럴듯한 물레 돌리기를 상상하며 찾아간 곳은 상도동에 위치한 조그마한 지하 공방. 이제 갓 시작한 공방이라 그런지 수강생이 많지 않았다. 들어서자마자 중앙에 놓인 넓은 작업대 위로 즐비하게 늘어선 굽기 직접의 토기들이 눈에 띠었다. 머그잔서부터 향꽂이, 사각접시, 호리병에 패션타일까지…. 토기 특유의 투박함과 서걱거림을 가진 작품들이 벌써부터 마음을 잡아끈다. 오, 내가 정말 이런 것들을 만든단 말이지?!
흐뭇한 얼굴로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도 잠깐, 앳된 얼굴의 공방 선생님이 웃는 얼굴에 초를 쳤다.
“거기 있는 것들은 작품전 준비하는 분들이 시범삼아 만든 것들이라 수준이 높아요. 일단 코일링부터 시작하죠.”
코일링? 그게 뭐람? 귀에 익은 단어이긴 한데 말이다…. 알고 보니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찰흙을 가래떡처럼 길게 뽑아 둘둘 말아 올리던, 그 찰흙빚기의 ‘기본’을 말한 거였다. 날 더러 코흘리개들이 하는 가래떡말기를 하라고요? 왜이래요, 이래 뵈도 미니어처 주둥이에서 물이 흘러 나왔다고요!! 조금 맥이 빠졌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것쯤 충분히 예상했던 일. 어찌됐던 막판에라도 우아하게 물레만 돌릴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거 하고 나면 물레 돌리게 시켜 주시는 거죠?
“물레요? 에이~ 물레는 지금 못 돌리죠, 초짜가 어딜 물레를 돌려요. 그건 6개월 남짓 배운 사람이 흙을 좀 안다 싶을 때 하는 건데….”
선생님 얼굴에 어이없음과 가소로움이 동시에 스쳤다. 에, 데미무어는 쉽게 하던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선생님 왈, “데미무어가 <사랑과 영혼> 찍을 때 그 영화 위해서 물레 돌리기만 몇 개월을 배웠데요. 그런데도 자세가 안 나와서 결국에는 대역을 썼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는데 뭐, 별 수 있나…. 앞치마를 걸치고 작업대 앞에 앉는데 차림새를 훑는 선생님의 시선이 어째 좀 그렇다. 그러더니 손톱깎이를 불쑥 내밀고는,
 |
그리 길지 않은 손톱이라 괜찮겠거니 했는데, 2mm 정도만 길어도 흙에 금세 자국이 찍힌단다. 뿐만 아니라 고개 숙이고 흙을 만지다 보면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쓸어 올리는 것도 일이고, 찰진 흙을 반죽하다보면 반지며 귀걸이가 빠져 들어갈 확률도 높다고. 시작부터 부주의해 보이다니. 안 되겠다, 실력으로 증명해야지.
흙, 말랑말랑하다고 물로 보면 다쳐!
일단 선생님이 먼저 시범을 보였다. 기계에서 뽑은 찰진 흙을 한 덩이 떼어 가래떡처럼 가지런한 굵기로 미는데, 쉽게 따라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달리 내 ‘떡’은 굵기가 울퉁불퉁 제멋대로다. 선생님 말씀인 즉, 손가락에 너무 힘이 들어가서 손마디 별로 굵기가 들쭉날쭉 한다는 것이다.
“부드러운 흙을 만지는 손이 그렇게 경직돼 있으면 어떡해요. 힘은 손에 싣는 게 아니라 몸에 실어야 해요. 흙을 상대하려면 잘 버텨야하거든요.”
“버텨요?”
흙과 씨름이라도 한단 말인가? 그건 좀 있으면 알게 될 거라는 선생님 말에 일단 코일부터 말았다. 둘둘 말아 맞닿은 이음새는 손가락 끄트머리로 꾹꾹 다져 빈틈을 메웠다. 그런 식으로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 벌어지게 쌓아갔더니 손자국 어설픈 종지 하나가 뚝딱 만들어졌다. 표면이 매끄럽지 않아 영 못마땅한데, 선생님은 오히려 그게 멋스럽단다.
“코일링은 도자기공예의 기본방식이지만 그만큼 응용방식이 많고 자주 쓰이는 방법이에요. 실력 있는 도공 중에는 물레가 아닌 이 방식만 고집하며 작품을 만들어내는 이도 여럿 있죠. 가마에서 구워지고 나면 투박하게 묻어나는 손자국이 오히려 더 멋있다는 걸 알 거예요.”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이참에 하나 더 만들지 뭐. 뭘 만들까나, 종지처럼 쬐그만 거 말구…. 내친김에 진열 돼 있는 멋들어진 화병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나 저거 만들래요!
“그건 좀 힘들 텐데…, 저래 뵈도 저 높이로 쌓아 올리려면 시간 꾀나 걸리거든요. 그래도 한번 해 볼래요?”
끽해야 소주병만한 사이즈인데 뭐가 고생일까 싶었다. 그런데 이거 아무리 말아올려도 좀체 높아지지가 않는다. 손가락 굵기로 길게 뽑아 놓은 흙줄기가 둘레를 빙 둘러가는 까닭에 금방 닳아버린다. 또 뽑고 또 뽑고…, 손으로 두께 조절까지 해 가며 쌓아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다. 거기에 찰지던 흙이 그새 말라 중간중간 금이 간 곳마다 물칠을 해대느라 정신이 없다.
“물을 너무 많이 발라버리면 나중에 잘 으깨지는 단점이 있어요. 손이 더운 체질이라 흙이 빨리 마르는 모양이니 중간중간 물에 적신 스펀지를 만져주세요.”
어찌어찌 다 만들고 나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게다가 처음 의도했던 모양은 소주병보양인데, 결과적으로 퉁퉁한 물결주둥이 화병이 탄생해버렸다(사진참조). 위로 갈수록 흙을 잘 모아가며 좁혀줬어야 하는데 쌓아 올리는 데만 정신이 팔려 사정없이 벌어지는지도 몰랐다. 결국 계획에 없던 풍만한 모양이 되고 만 것. 흙이 손에 익지 않아 모아주고 넓혀주는 기술이 부족했나보다.
어찌됐던 작품 하나를 완성하고 나니 진이 다 빠진다. 말랑말랑한 흙 조무르기가 이렇게 피곤할 줄이야….
“힘들다 그랬죠? 흙이란 물러보여도 제법 악력이 필요할 정도로 만만하지 않은 녀석이에요. 여자들이 이 직업 갖기 쉽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죠. 조금 쉬었다가 접시부터 다시 만들어 봐요.”
선생님이 직접 만든 찻잔에 녹차를 따랐다. 한 모금 후 불어 넘기는데, 멋스러운 그릇에 담긴 녹차라 그런지 향부터가 그윽한 것이 깊이가 있다. 그래 이맛이야~ 그런데 선생님 잔은 손잡이가 깨졌네요?
“설거지하다 부러졌어요.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깝고… 그냥 이렇게 쓰면 되죠. 쓰다 흠집 나고 깨져도 그 나름으로 쓸모가 있고 멋이 있으면 되잖아요. 혹 제 용도로 못쓰게 되더라도 깨진 접시는 비누받침대로 활용을 해도 되고, 손잡이 떨어진 머그잔에는 꽃을 꼽을 수도 있고요. 수강생 중에는 애써 만들었는데 깨질까봐 잘 꺼내 쓰지도 않는 분들이 있어요. 자기가 만든 작품에 애착을 갖는 것도 좋지만 생활에 활용하고자 만든 것들인데 너무 그럴 거 있나요.”
어쩜, 한마디 한마디에서 도공의 여유가 묻어난다.
가마에서 나와야만 비로소 알 수 있다오
도예과를 전공했지만 큰 돈벌이는 될 수 없어 다른 직업을 찾다 다시 되돌아왔다는 선생님은 이 일을 ‘배고픈 직업’이라 불렀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가볍고 튼튼한 그릇들이 많아 판로를 뚫기도 쉽지 않고 값싼 수입품이 많아 경쟁에서도 밀린다고. 그래도 한국 도자기의 멋과 우수성을 아는 이들이 있어 꾸준히 소비되고는 있지만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견고히 하지 않으면 언제 사장될지 모르는 위험도 있다. 요즘엔 식기보다 촛대나 향꽂이, 인형 등 멋스런 생활장식품을 선호해서 틈날 때마다 새로운 디자인을 고민하고 만들어보는 꾸준한 상품개발이 필수. 맘에 드는 하나의 완성품이 나오기까지 무수히 많은 실험작들이 깨어지는 과정을 겪는다. 흙을 빚고 말리고 굽는 일련의 과정 뒤에 이렇듯 많은 시련이 거름으로 쓰이고 있다니, 공예를 너무 만만히 본건 아닐까 내심 미안타.
차 한 잔을 비운 뒤, 세 번째로 뛰어든 작품은 사각촛대. 주사위 모양의 정육면체를 만들어 몇 시간 건조시킨 다음 반으로 잘라 속을 파고(너무 두꺼우면 가마 속에서 구워질 때 갈라질 공산이 크다) 다시 흙을 발라 이음새를 메웠다. 그 다음 촛대가 얹힐 면을 둥그렇게 파고 나머지 면들은 맘에 드는 문양으로 모양을 냈다. 문양을 내는 방법도 가지가지라 끌로 하나하나 팔수도 있지만 포크로 긁거나 칫솔로 문지르는 등 주위 물건을 요령껏 활용해도 무방하다. 길가에 버려진 흰 벽돌을 주어와 그대로 눌러 찍으니 벽돌 질감이 고스란히 찍힌 멋들어진 촛대 하나가 완성됐다.
작품 몇 개를 더 만들고 어서 마르기를 기다리는데, 선생님 왈, “작품이 다 마르려면 자연건조 상태에선 이틀 정도 걸려요. 상황에 따라 난로를 피워 건조시간을 앞당기거나 밀폐된 상자 안에 넣어 건조를 늦출 수도 있지만 오늘 안으로는 무리네요.”
아니, 선생님! 그럼 오늘은 이걸로 끝이란 말인가요?!!
다행히 이날은 완전 건조된 작품들을 염색액으로 장식하고 다 마른 작품들은 가마에 넣어 초벌구이를 하기로 특별히 잡아놓은 날. 한번 염색약을 묻히고 가마를 돌릴 때마다 드는 노동력이 장난이 아니라서 한달에 두 번씩 이렇게 몰아 작업한다고. 작업실 한켠, 커다란 고무대야 속에 붉은 액체가 가득 들었다. 잘 마른 작품들을 이 걸죽한 액체 속에 담갔다 꺼내거나 흩뿌리듯 바르면 그냥 구웠을 때와는 또 다른 멋이 난단다. 액체는 붉지만 구워진 후의 색은 붉지 않고 그늘처럼 얼룩을 남긴다. 또한 의도한 무늬 그대로의 얼룩을 남기지도 않는다.
“도자기는 구워 나와 봐야 비로소 그 모습을 알 수 있어요. 그 전에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막상 구워 나왔을 때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거든요. 뜨거운 가마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알겠어요.”
흙 속에는 철을 비롯한 수많은 광물질이 숨어있어서 그것이 열을 받는 동안 어떻게 반응해 어떤 문양을 만들어 낼지는 베테랑 도공도 알 수가 없단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계산할 수 없는 결과물을 받아 안았을 때의 느낌이 남다르고, 그 의도되지 않은 아름다움이 더 멋스럽고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이리라.
 |
흙을 알아야 흙을 주무르지, 일단 한번 느껴 봐!
어찌됐든 드디어 가마는 돌아가고. 삼일 후에는 따끈따끈한 내 작품을 만질 수 있다 이거다. 얼굴에 한껏 들어찬 기대를 읽었는지 선생님이 난감한 한마디를 했다.
“그렇게 기대 안하는 게 좋은데…. 처음에는 많이 깨져 나오거든요. 흙반죽 안에 든 기포가 빠져나가지 못했다면 구울 때 팽창해서 터져버려요. 그렇지 않더라도 옆에 놓인 작품이 터지면 그 파편에 맞아 애먼 작품이 깨질 수도 있고, 변수는 많아요. 또 굽고 나면 처음 모양보다 훨씬 줄어들 테니 그것도 감안해야 하구요.”
이런이런, 초짜에겐 가혹한 변수가 너무 많다. 그럼 죄다 깨져 나올 수도 있다는 거 아닌가? 금세 시무룩해져서는 “그래요…?” 했더니 좀 안된 모양인지 선생님이 기대하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물레 한번 차 볼래요?”
“에, 정말요?”
“그냥 한번 차보라는 거예요. 어짜피 처음부터 잘 하기는 어려우니까, 느낌이나 배우라구요.”
물레 역시 전기로 돌아가는 요즘 식이라 굳이 ‘찰’ 필요는 없지만, 예전 구식물레는 모두 발로 돌렸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물레는 ‘돌린다’ 하지 않고 ‘찬다’ 말한단다. 돌리든 차든 물레를 배울 수 있다니! 떨어진 줄 알았던 대학에 추가합격된 기분이다.
선생님이 먼저 물레 위에 흙덩이를 얹고 시범을 보였다. 뭉그러진 흙의 형태가 능숙한 손놀림에 따라 길죽하게도 넓적하게도 변한다. 눈 깜짝할 새에 찻잔이 됐다가 또 금세 형체를 바꿔 사발이 되고 호리병이 된다. 저거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저거야! 선생님, 어서 일어나요, 제 차례에요!
“물레는 돌아가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평소 보다 더 입자가 고운 흙을 써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칫 흙 속에 있는 이물질에 손을 베일 수도 있거든요.”
듣고 보니 흙이 더 부드럽다. 너무 부드러워서 끝도 없이 늘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느낌 같아선 한껏 늘이고 줄이는 게 가능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게 마음대로 안 된다. 흙이… 무겁다고나 할까? 부드럽지만 생각보다 물레판 위에 훨씬 단단하게 고정돼 있다. 급기야 형태를 주도해야 할 손이 되려 물레에 딸려가는 게 아닌가.
 |
| 물레를 돌리기 위해선 낮은 자세로 허리를 굽히고 안정적으로 손에 힘을 전달하기 위해 팔을 몸에 붙이거나 팔꿈치를 무릎에 대는 것이 좋다. |
물레를 차기 위해선 낮은 자세로 허리를 굽히고 안정적으로 손에 힘을 전달하기 위해 팔을 몸체에 붙이거나 팔꿈치를 무릎에 댄다. 그 상태로 버티듯 흙을 만져야 몸이 ‘덜’ 피곤하단다. 친절한 설명 감사하지만 듣고 알아도 몸이 제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람, 10분도 안돼 쓸데없는 힘이 들어간 손목은 부들부들 어깨는 뻐근뻐근 뭉쳐왔다. 온통 진을 빼놓는 게, 물레 위에서 벌이는 흙과의 한판 ‘씨름’이 따로 없다. 처음, 잘 버텨야 한다는 그 말이 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딴 거 필요 없어요. 그냥 흙을 느끼려 해 보세요. 흙을 만지다보면 흙의 감촉을 알고 성질을 알 수 있거든요. 그러다보면 어느새 흙이 손에 익게 되죠. 그 다음엔 자유자재로 물레를 찰 수 있을 거예요.”
흙과 친해져야 한다는 말씀.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욕심을 버리고 긴장을 풀었더니 손마디에 부드러운 흙의 입자가 느껴졌다. 흙의 근본을 알아야 흙의 원리를 알고 비로소 흙을 활용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의욕만 앞서 욕심 부린 말로가 조금 초라했지만 앞서 작품을 빚는 손놀림은 제법이었다는 칭찬을 챙기며 5일 후를 기약했다. 흙 묻은 손을 씻고 나니 바짝 말라버린 손이 드러났다. 손이 어느새 이렇게 늙어버렸담? 흙이 손의 수분을 바짝 흡수해버려 그렇다나. 팔뚝까지 핸드크림을 듬뿍 발라주며 생각했다. 흙, 이래저래 만만히 봐선 안 될 상대야….
흙과 물과 불의 완성체
오일 후 찾아갔을 땐 다행히 깨지거나 못쓰게 된 작품은 두개 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손자국 난 생김 그대로 자연스러움과 기품을 띤 모양새가 제법 그럴 듯 했다.
다 구워져 유약까지 발라 있는 완성품을 보니 그제야 도자기는 ‘가마에서 나온 뒤에야 알 수 있다’는 스승의 말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만드는 것도 만만치 않았지만, 받아 안았을 때의 감동도 만만치 않은 도자기 공예. 흙과 물과 불로서 완성되는 자연의 결정체가 이렇듯 오묘한 멋을 지녔다니, 탁월한 기자의 선택에 스스로 박수를 보낸다.
글/김혜경 사진/최경훈 기자
김혜경 기자
<저작권자 © 복지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민연금 노령연금, 월평균 남성 75만원·여성 39만원 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