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이룬 평화 우리가 지켜내자!”
“일본정부는 위안부 피해여성들에게 법적배상을 실시하라!”
지난 8월9일 광화문 일본대사관 앞. 여성의 해방을 상징하는 나비모양 피켓을 든 시위대의 목소리가 도심을 울렸다. 누군가가 구호를 선창하자 앞줄에 앉은 백발의 할머니들도 피켓을 들어올리며 따라 구호를 외쳤다. 초등학생에서부터 백발 지긋한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구분 없는 시위대 모습이 여느 집회와는 달랐다.

해방 61주년을 맞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의 주최로 열린 세계연대집회. 호주·캐나다·홍콩·네팔·미국·독일·덴마크·말레이시아·폴란드 등 국제앰네스티 산하 지부가 있는 총 27개 국가에서 공동 개최된 지구촌 단위의 연대였다. 세계 곳곳에서 보내오는 응원의 메시지가 힘이 됐는지, 대사관 일대는 한낮의 태양보다도 더 뜨거운 인파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지금도 계속되는 과거의 전쟁

‘Stop! 여성폭력!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정의를!’이라는 슬로건으로 열린 이날 집회는 지난 1992년 1월8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처음 수요시위를 시작한 이래 15년을 이어온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721회차 수요시위의 일환이기도 했다.

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는 1992년 미야자와 전(前) 일본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시작됐다. 그후 간헐적으로 이어지다 점차 일본군 위안부 관련활동을 알리는 장으로 활용되면서 정기시위로 자리 잡아 왔다.

이날 개회사에서 한국염 정대협 공동대표는 “우리에게 8월은 해방의 날로 기억되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들에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라며 “제국주의가 힘없는 나라와 여성의 몸에 가한 폭력에 대해 진정으로 사죄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세계평화도 없을 것”이라고 성토했다.

이어 발언대에 선 앰네스티 한국지부 김희진 사무국장도 “할머니들에게 잃었던 명예가 되돌려지지 않는 한 몇 십 년이 지나도 참된 해방은 없다”며 일본정부를 향해 피해자여성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확실한 사과와 배상을 촉구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의 여성 10만~20만 명을 국가제도 하에 조직적으로 강제연행·납치하여 일본군의 성노예로 만든, 역사 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잔악한 전쟁범죄로 알려져 있다. 한국, 대만, 중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네덜란드, 동티모르 등지의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1930년대부터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위안소에 갇혀 성노예의 삶을 살았는데,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이 기간 동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았고, 그 후유증으로 종전 이후로도 정상적인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문제는 아시아 피해국들의 소극적 대처와 고발 회피로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다. 힘없는 여성을 상대로 행해진 성적 착취와 폭력은 피해국 내부에서조차 무시되고 은폐되어, 일본정부의 전쟁범죄 은폐와 법적 책임 회피를 부추겼다. 그러다 1991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던 김학순 할머니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제사회에 알려지게 됐다.

이미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비인도적인 범죄라 정의하고, 일본정부에게 피해자들의 연령을 참작한 시급한 사죄와 법적 배상 이행을 권고한 바 있다. 세계 시민사회 역시 일본정부에게 국제기구의 권고를 준수할 것을 거듭 촉구해 왔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오히려 과거의 범죄에 대해 은폐와 망언을 일삼아 피해국들을 분노케 했을 뿐만 아니라 거듭되는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역사교과서 왜곡, 평화헌법 개악 등을 시도하며 또다시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국경과  인종 뛰어 넘는 ‘지구촌연대’

익히 알다시피 2차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나치전쟁범죄를 청산하기 위해 독일 주변국들이 범죄를 고발하고 범죄자를 색출해내는 등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더불어 2차대전의 원인제공자이자 일본과 같은 패전국이던 독일정부 역시 철저한 전후보상과 사죄를 통해 국제사회로부터 조금씩 신뢰를 회복해가며 자국의 오명을 지워왔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의 전후 태도는 독일정부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철저한 자기  반성 없이 ‘전범국’이라는 낙인에 수치와 모멸감을 지우지 못하며 납득하기 힘든 자기변호만 늘어놓고 있다.

한편, 일본정부가 뻔뻔하고도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는 동안에도 할머니가 되어버린 위안부 피해여성들의 전쟁은 계속되어 왔다. 2차대전이 끝난 지 6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 피해여성들의 삶은 기나긴 고통의 연속이다. 이들에게 전쟁은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하루에도 몇 번씩 몸과 마음을 찢어대는 광폭한 괴물이다. 오늘날까지 많은 수의 피해여성들이 이 괴물의 포악에 맞서 싸우다 늙고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

  일제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국제적인 민중법정에 서 증언하기를 마다 않던 북한의 대표적인 피해여성 박영심 할머니 역시 그렇게 스러져 간 우리들의 ‘누이’였다. 고인이 된 그는 1944년 연합군이 찍은 일본군 위안부 사진 속에서 만삭의 모습이 촬영돼 세상에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을 알린 산 증인이었으나, 시위가 있기 이틀 전인 8월7일, 84세의 일기로 북녘 땅에서 한 많은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집회 도중 고인의 죽음이 전해지자 주위엔 일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할머니들은 그렇게 매해 친구들을, 동지들을 잃어왔다. 늙고 죽는 것이 서러운 게 아니라 이루지 못한 염원이 서러워 편히 눈감지 못했을 여인들…. 세월 앞에 하나 둘 스러져간 동지들의 사진을 안고 있는 할머니의 얼굴 위로  슬픈 그늘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집회는 슬픔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의 싸움이 결코 외롭지 않음을 보여주는 지구촌 곳곳의 연대와 지지가 힘을 실어준 화합과 결집의 자리였다. 뜻을 함께 하는 전 세계 27개국 안에는 일본이라는 나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의 6개 도시에서 양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자국의 안팎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은 국경과 인종을 뛰어넘는 인류애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 정의에 대한 확신을 확인케 해주는 귀중한 희망이 되어주었다.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지구촌 곳곳에 알곡처럼 숨어있다는 사실은 15년을 한결같이 싸워 온 할머니들에게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자기반성 않는  일본의 위태로운 행보

집회 일주일 후인 8월 15일. 일본의 종전기념일인 이날 고이즈미 총리는 또다시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하며 주변국들의 비난을 샀다. 왜 하필 종전기념일에 참배를 강행했느냐는 질문에 총리는 “어차피 어떤 날에 하던지 비난을 받는 건 똑같다”며, “참배는 마음의 문제”라는 말로 ‘당당히’ 소견을 피력했다. 아마도 이 ‘마음의 문제’란 자국의 고유정서에 따른 개인적 신념의 문제로 해석되지만, 본디 ‘마음’이란 지난날 일본이 행했던 반성과 사과의 자세에 깃들어 있어야 했을 것이었다. 철저한 자기반성을 거치지 않은 일본의 행보가 오늘날 동북아와 세계의 안정을 위협하는 또 다른 불씨는 아닐까, 자못 염려스럽다.

글/김혜경 사진/최경훈 기자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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