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한창 농익어 간다. 풍요의 계절답게 살갗에 와 닿는 바람과 햇살이 그 어느 때 보다 깊고 풍부하게 느껴진다. 진정한 가을의 풍요를 만끽하려면 가을걷이가 한창인 농촌 풍경만한 것도 없다. 지난 계절 동안 밭 갈고 씨 뿌리며 애지중지 돌봐 온 논밭에서 일 년 농사의 소출을 거둬들이는 숭고한 의식이 한창일 테니 말이다. 이 무렵의 분주함을 나타내는 속담으로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집안의 하찮은 수단까지 총동원하여 일손으로 나설 만큼 바쁘다는 뜻인데, 일손 하나가 귀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이달 기자체험 주제는 ‘농가 추수 도우미’였다. 산과 들을 오가며 탐스럽게 여문 소출을 털어내느라 바쁜 농가의 하루 일손이 되어보고자, 10월 중순 전남 순천으로 향했다. 고속버스로 네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그곳에선 마침 고단하고도 풍요로운 추수의 몸짓이 한창이었다.

김기자~ 경운기 한번 타봐~ 어~서~
순천에서도 지인이 농사를 짓고 있는 승주읍 월계리 마을은 전형적인 시골 내음이 물씬 풍기는 농촌마을이다. 사방 천지가 다 논밭인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공기부터가 새로웠다. 상쾌한 풀내음에 두엄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자극하고 지천에 널린 들꽃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싱싱함을 자랑했다. 한 줄로 이어진 길을 따라 얼마쯤 지나니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얼굴의 지인이 반갑게 마중을 나와 있었다. 오랜 안부를 나누고는 씩씩하게 “부담 갖지 마시고 실컷 부려주세요” 큰소리를 쳤지만, 헤설픈 웃음과 함께 돌아오는 것은 그냥 편히 쉬어 가란 말뿐이다. 고된 농사일을 맡기기가 미안한 표정이었다. 애써 고생하러 이 먼 곳까지 왔다며 너스레를 떨어보지만 지인은 나중에서야 “그럼 내일 산에 가 밤이나 줍던가….”하며 말끝을 흐렸다. 에? 뭘 주우라고요? 낫 들고 벼이삭을 밸 야심으로 고무신까지 챙겨온 기자에게 너무 지나친 배려가 아닌가.
“벼농사는 무신~ 애꿎은 넘(남)의 농사 망쳐먹을라꼬?”
기계가 다 알아서 하니 벼 베기는 포기하란다. 흙 한번 만져 본 적 없는 서울내기가 덤비기엔 벼농사는 너무 힘든 모양이었다. 쓸 만한 하루 일손이 되어줄 심산이었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이때에 걸리적거리며 괜한 민폐만 끼치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급선회. 그래요, 밤을 따든 별을 따든 어디 한번 시켜만 주시라니깐요~

주인아저씨 없을 때 경운기 위에서 한컷~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떠 아침상을 맞았다. 접시 가득 담은 나물에 고봉으로 뜬 밥을 후딱 해치우고 기세 좋게 이웃들과 경운기에 올랐다. 목적지는 근처 야산. 사방이 탁 트인 들녘을 드세게 질주하는 경운기의 승차감이 ‘오픈카 저리가라’였다. 속도도 제법 빠를뿐더러 비탈진 산길을 용감무쌍하게 오르내리는 무쇠자가용 아니던가. 차가운 산 공기를 마시며 10여분을 달렸을까? 저절로 떨어진 밤송이들이 성게마냥 즐비하게 드러누운 산비탈에 토착했다. 사방에 널린 게 밤송이니, 이거 그냥 주어 담으면 그만 아냐?

깔 때는 ‘아얏’ 까고 나선 ‘우와~’
일손들에게 구역이 할당되자 포대자루 하나와 낫 한자루, 면장갑이 주어졌다.
“누나, 밤송이 깔 때는 조심해야 돼요.”

 기자와 짝을 이룬 열아홉 살 남짓의 어린 조교가 숙련된 솜씨로 밤송이 까는 법을 가르쳐 줬다. 조교는 한창 공부하느라 바쁠텐데도 일손이 부족할 땐 자원해 일을 거드는 농부의 아들답게 고슴도치처럼 잔뜩 날이 선 밤송이를 능숙한 솜씨로 벗겼다. 저절로 벌어진 밤송이는 신발로 양쪽에서 붙잡듯이 벗겨내는 게 비법인데, 이 때 운동화는 필수다. 천이 얇은 스니커즈로는 역부족일 만큼 밤송이의 공격이 야무지기 때문에 밑창이 두꺼운 신발이 아니면 대략 난감해진다. 거기에 밤송이가 벌어져있지 않을 때는 조금 더 힘들다. 낫으로 가운데 부분을 겨냥 해 콕 찍어 억지로 벌려야 하는데, 그것도 다 요령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저 너머까지는 가지 마세요. 우리 밤나무가 아니거든요.”
‘누가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싶었지만 울타리 없이도 지켜지는 농부들의 불문율이라는 생각에 얄팍한 도둑심보를 내쫓았다. 자, 그럼 슬슬 밤이나 한가득 쓸어담아 볼까?
하지만 산 중턱에 심어진 밤나무를 찾아다니며 알밤을 줍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저 얻어지는 농사 하나 없다는 말처럼 하나의 알밤을 얻기까지 무수히 바늘에 찔려야만 하는 아픔이 있었으니…. 벼이삭이나 벨 줄 알고 달랑 스니커즈 차림으로 내려온지라 신발로 밤송이를 까는 일부터가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그래봤자 지가 식물인데’ 하며 솔잎처럼 조금 뻣뻣한 껍질 정도로 생각했던 밤송이. 그러나 대바늘 수백 개가 찌를 듯 날이 선 밤송이의 공격은 순간순간 눈물을 뽑아낼 만큼 ‘강적’이었다.
‘귀한 금덩이라도 속에 들었담? 뭘 지키겠다고 이리도 맹렬히 뻗친 거야? 앙?’
밤나무들이 경사가 심한 산비탈에 심어진 까닭에 기울어지는 몸을 균형 잡아가며 밤송이 까는 일은 정말 예삿일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저 대바늘 위로 구를 판이니 이거 살얼음판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모든 고생의 끝에는 일전의 설움을 날려버릴 만한 보답이 뒤따르는 법. ‘아얏!’ 소리를 연발하며 간신히 벌린 밤송이 안에서 윤기 좌르르 흐르는 알밤이 모습을 드러낼 때면 흡사 갈색 보석을 캐낸 듯 기분이 좋았으니 말이다. 흐흐~ 이게 니 보물이었구나? 밤송이가 그토록 공격적인 수비를 펼친 이유를 알만 했다. 보통 두 개에서 세 개 정도의 토실한 알밤이 앙증맞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그 모습이 이상하게 보기만 해도 입이 벌어질 정도로 흐뭇한 감동을 주는 게 아닌가. 이 재미에 찔리는 아픔도 참아가며 밤송이를 까지 싶었다.
그렇게 밤송이에 찔릴 때마다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가며 모은 것이 반 포대 분량. 두 시간 남짓 줍고 허리를 펴니 어느새 주위에는 껍질만 남은 밤송이들이 즐비했다. 경운기가 있는 곳까지 무거운 포대를 끌고 갈 때엔 밀려오는 뿌듯함이 포대만큼이나 묵직했다.

벌레 먹은 고추밭에서 몸서리치다 

 일 년 간 임대해 콩이며 고추며 갖가지 작물을 심었다는 그 산에서 밤줍기 다음으로 내려진 특명은 고추 따기였다. 감 나무 아래에서 경운기에 실어 온 점심을 먹은 후 산 아래 고추밭으로 향했다.
“이게 다에요?”
계단식 밭 구석에 얼마 안 되는 규모로 지어진 고추밭이 처음엔 그저 같잖아 보였더랬다.
“빨갛게 익은 것만 따는 거여, 말라버렸거나 병 걸려 비리한 건 따도 소용없어. 올해는 고추농사가 흉년이라 건질 것도 별루 없을 거다만….”
정말이지 얼마 안 되는 고추밭에는 시들하거나 벌레 먹은 고추들이 태반이었다. 어떤 것은 몸 전체에 하얗게 곰팡이가 앉아 있는가 하면 어떤 건 따기 무섭게 물 먹은 냥 썩어 문드러져버려서 포대에 담는 것보다 내버리는 게 더 많았다. 듣자 하니 탄저병(炭疽病 : 균의 기생으로 발생하는 식물의 병해로 잎이나 줄기, 과일 따위에 암갈색의 반점이 생기고 그 부위로부터 마르거나 썩기 시작한다)이 돌아 요 몇 년 고추농사는 재미를 못 봤단다. 몇 년 전에는 역병과 탄저병이 하도 심해 고추 대를 다 뽑아내고 고추밭을 아예 엎어버린 적도 있다고. 올해도 별 기대는 안했지만 그래도 남는 땅 놀면 뭐 해 싶어 또 다시 심었다는 말을 듣자니 새삼 ‘농부’라는 직업에 대한 측은함이 일었다. 자연을 대상으로 순수한 노동을 투자하는 정직하고도 낭만 어린 직업이지만, 자연의 변수 앞에 요령부득일 수밖에 없는 일면이 안타까운 건 어찌할 수가 없다. 뿌리가 썩고 잎이 하얗게 말라가는 고추밭을 보며 속 타는 그 심정을 누가 알까. 조금이라도 많이 따는 게 위로다 싶어 얼른 손을 놀렸다.
사철 언제나 풋고추 즐겼지만 직접 고추밭에 들어와 추수를 하니 초짜지만 진짜 농부가 된 기분이 들었다. 포대 채워지는 속도가 밤줍기보다 빨랐다. 고추 따는 일은 손 찔릴 일도 없어 제법 흥얼거리며 일을 하던 어느 순간이었다. 어? 저게 뭐야, 꿈틀 하는 저거. 으악~~ 송충이잖아!!!
놀란 손끝에서 푸른 몸통에 검은 얼룩이 있는 송충이가 느리게 몸을 꿈틀 거렸다. 송.충.이. 지구상에서 기자가 가장 싫어하는 생물 랭킹 2위가 아니던가(1위는 바퀴벌레다). 순간 빨랐던 손놀림이 속력을 잃고 말았다. 가만 다른 줄기들을 살펴보니 줄기며 잎 위에, 혹은 열매 위에 길다란 송충이가 붙어있었다. 이걸 그냥 지나치며 따고 있었다는 말? 위장색인 연두빛을 띄고 있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눈에 잘 안 띠였던 것이었다. 어떤 건 살이 올라 모르고 건들면 터질 것처럼 통통한 녀석도 보였다. 모르면 모를까, 일단 눈에 들어오니 전처럼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꺅~ 소리를 질렀더니 지인이 송충이 하나에 왜 그리 호들갑이냐는 듯 퉁을 줬다. 그러더니 아무렇지 않게 송충이를 짚어 근처 개울가로 휙 던져 버리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왈, 약을 치지 않아 벌레가 있으니 그냥 대충 털어버리란다. 대충 털어버리라니. 스치기도 싫은 기자로선 불가능한 일이라 왜 약을 치지 않았느냐며 볼멘소리로 물었다.
“약을 치면야 보기는 좋지. 근데 그게 다 사람 몸에는 안 좋은 거여. 조금 벌레 먹고 보기 흉해도 이런 게 더 몸에 좋고 맛있는 법인데…. 도시 사람들은 이상하당께? 기어이 독약을 쳐야 좋다고 사먹으니.”
생각해 보면 유기농 유기농 하며 몇 갑절이나 주고 사 먹는 채소들이 바로 이런 것들인데 정작 몸속에 들어가 영향을 끼치는 것에는 둔감하면서 겉으로 보이는 데만 연연하는 도시사람의 계산법이 도통 이해가 안 돼는 모양이었다. 할 수 없이 송충이가 발견될 때마다 흠칫흠칫 놀라며 고추를 땄지만 능률은 그전보다 몇 배나 떨어져버렸다. 거기에 종일 허리를 굽혀 일을 한 까닭에 나중에는 허리를 조금 돌리기만 해도 삐걱 삐걱 요통이 뒤따랐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았는데 마음도 몸도 벌써 넉 다운. 더 이상 못하겠다는 소리가 차마 입 밖에 나오지 않아 눈치만 보고 있는데 지인이 어떻게 알았는지 그만 저녁 먹으러 가자했다. 벌써 밥 때가 다 됐어? 어느새 해가 서산 너머로 빠르게 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고봉으로 채운 뱃속이 언제 이렇게 꺼져버렸담? 기대에 못 미치는 고추 포대를 경운기에 싣고 노을에 물든 들길을 되돌아갔다.

뿌리는 건 사람마음에 달려도 거두는 건 하늘이치에…
뿌린 만큼 거둬들인다는 옛말이 있지만 뿌리는 건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있어도 거두는 건 하늘이치에 달렸다는 말이 농사에는 더 제격인 것 같다. 그만큼 그 결과를 예측할 수도 없고 설혹 노동의 대가가 야박하다할지라도 하늘을 향해 한번 따져 물을 수도 없는 것이 농사일 터. 하지만 가을걷이의 기쁨이 있어 그 힘든 일 년 농사를 버텨올 수 있는 것이지 싶다. 땅의 고마움과 노동의 기쁨을 기억하기 위해 옥상에라도 작은 텃밭을 만들어야겠다. 텃밭을 돌보다 보면 식탁에 오르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오롯이 자랄 테니 말이다. 

글/김혜경 기자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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