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옳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둘러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의 ‘향수’-

 

 누렇게 익은 벼이삭들이 출렁이는 황금 들녘. 허름한 농부의 옷을 걸친 허수아비 하나가 파수를 서고 있다. 허수아비는 잠시 일손을 두고 돌아간 농부의 대리인처럼 바람 속에 들리는 벼이삭들의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알알이 들어찬 농부의 노고에 바람이 스치며 내는 소리다. 그 동안 돌봐주어 고마웠노라고, 자 이젠 때가 되었으니 거두어 가라고, 고고한 자태로 고개 숙인 벼이삭들이 바람결에 일사분란히 신호를 보낸다.

농촌은 천지가 다 풀밭이고 꽃밭이다. 덩굴풀로 도배된 돌담을 지나 조금만 걸어 나가면 개천 근처로 맑은 얼굴의 꽃들이 수북하게 피었다. 어느 하나 시들지 않고 탐스럽고 싱싱하게 제 미모를 뽐내지만, 이곳 사람들은 굳이 그것을 꺾어 화병에 담지 않는다. 가다 그저 말없이 보고 지날 뿐, 아, 참으로 예쁘구나, 수선떨며 감탄하지도 않는다. 지천에 널렸으니 대수로울 것이 없다. 그저 저것이 올해는 이짝에 피었구나, 실하게 피었구나, 속으로 말하고는 그 앞을 지나올 뿐이다.

몇 평 안 되는 배추밭에서 농부가 잎 사이를 뒤적이며 벌레를 찾는다. 하잘것없는 벌레 하나에 일년농사 몽땅 헛일이 된다며 벌레가 누고 간 검은 똥을 단서 삼아 사이사이를 헤친다. 얼마 전에 왔을 땐 멀쩡했다던데, 배춧잎 마다 담배자국처럼 구멍이 뚫렸다. 잡은 벌레를 농부는 근처 개울가로 휙 던져버린다. 농부도 벌레도 모두 먹고 살자고 바둥거리는 중이다. 배추 잎 위에 앉은 여치가 배추이파리 색을 닮았다. 집을 짓고 눌러앉지는 않아 그런가, 농부의 손이 여치에게는 관대하다. 등에 업은 것은 새끼일까 수컷일까.

 일손이랄 것은 모두 밖으로 나간 농가의 오후는 그야말로 물 고인듯 고요하다. 지붕 밑에 내달은 고추며 옥수수 따위가 바짝 말라 미미하게 몸을 흔들고, 고무신들이 볕 좋은 담벼락에 단정히 서서 외출을 기다리고 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호박이 기대앉은 마루는 농부의 아내가 새벽처럼 일어나 닦아내어 먼지 하나 없다. 농부가 매일처럼 쓸어내는 안마당 역시 지근지근 맨발로 밟으면 기분 좋을 정결한 흙밭이다. 빈 것 같아도 뜨락에 들어찬 가을햇살의 따사로움이 한 가득인 이곳에, 조금 있으면 농부의 아내가 잰 걸음으로 들어와 저녁을 짓느라 부산을 떨 것이다.

축사 안을 보면 농부네 집은 알곡처럼 부자다. 소 돼지 양에 닭과 개도 여럿이다. 축사 안 가장 보배는 단연 황소. 음머- 우는 저 소리를 시인은 ‘헤설피 들리는 금빛 게으른 울음’이라 했다. 어떤 새벽엔 닭보다 먼저 우는 저 울음에 식구들이 아침잠을 깨곤 할 만큼 소는 부지런하지만 말이다. 다 큰 소는 새끼를 한 마리씩만 낳아 손이 귀하다. 반면 이년에 세 번 꼴로 새끼를 낳는 암퇘지가 얼마 전 열두 마리의 새끼를 낳고 휴식중이다. 인공교배를 시켰는데, 늘 검은 것만 낳던 것이 이번엔 어찌 희고 얼룩인 녀석까지 낳았다고 농부의 아내가 말해주었다. 검은 것이 더 맛이 좋아 간간이 찾아 와 사가는 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는데. 그러나 저러나 값은 흰둥이 검은둥이 할 것 없이 똑같이 받아왔으니 손해될 건 없단다. 겨울을 넘기면 저 열두 마리도 토실토실 살이 오를 것이다. 그러면 재외는 지금까지처럼 새끼들을 팔아, 힘들고 귀하게 키워낸 자식 셋을 좀 더 뒷바라지 할 것이다.

글·사진/김혜경 기자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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