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공간도 ‘인격’ 있는데…

<사례1>

 ‘A는 여자 인기가수와 변태적인 성관계를 가졌다.’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오른 글 때문에 초등학생 A군은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고 친구들의 놀림 때문에 한동안 학교에 갈 수 없었다. 경찰 수사 결과 문제의 글은 같은 반 B양이 작성한 것이었다. B양은 인터넷에 떠도는 글을 퍼와 이름만 A군으로 바꿨다. 이유는 “그냥 A군이 생각나서”였다고. 사건을 일으킨 B양은 조금의 죄의식도 없어 보여 주변을 당황시켰다.

<사례2>

초등학생 C양은 얼마 전 포털 사이트에 자신의 사진을 무심코 올렸다가 수 백 건의 악성 댓글에 시달렸다. ‘얼굴이 xx하다’ ‘xx같은 얼굴’ ‘그렇게 생겼으니 나가 죽어라’등 네티즌에게 입에 담기도 힘든 언어폭력을 당했다. C양은 이제 인터넷을 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사례3>

인터넷 게임으로 캐릭터를 키우는 중학생 A군은 얼마 전 즐겨하던 온라인 게임을 그만뒀다. 게임에 접속할 때마다 귓속말로 날아오는 욕설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발신인은 한 달 전 같이 게임에 접속해 ‘파티’를 맺고 지하 동굴에 들어갔던 사냥꾼. A군이 귀한 아이템 하나를 먼저 가져갔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욕설을 하더니 나중에는 해킹 프로그램으로 캐릭터를 지워 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심지어 집을 찾아와 복수하겠다는 말에 A군은 게임중단을 결심했다. 

위의 사례가 증명해주듯 청소년들 사이에서 익명을 이용한 사이버상의 폭력이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허위사실 유포, 비난 댓글, 채팅언어 폭력 등 사이버폭력은 청소년들의 일상에 침투한지 이미 오래다.
얼마 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주최로 열린 ‘사이버폭력과 학교공동체 붕괴’ 토론회장은 이를 우려하는 교사와 교육전문가, 학생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이들은 학교마다 개설된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이 위험 수위에 달한 학생들의 욕설로 도배되고 있다며 하루 빨리 ‘네티켓(사이버공간을 지칭하는 네트워크와 예절이라는 뜻의 에티켓의 합성어)’ 교육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가장 큰 문제는 교사에 대한 학생들의 원색적인 욕설.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린다든가 비속어를 동반한 비아냥거림으로 교사들을 매도하지만 교사들은 속수무책에다 무기력증을 느낀다. 수원정보산업고 안익철 교사는 “학교 홈페이지는 교사에게 ‘망할 놈아…’ 등 욕설이 난무하고 있다”며 “이를 본 교사들은 학생을 지적하기 보다는 또 문제를 만들면 어쩌나 전전긍긍할 뿐”이라고 한탄했다.

음란사이트 접속뿐 아니라 음란물을 직접 유통하는 장본인이 바로 청소년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인터넷뉴스 방송국 ‘데일리 클릭’의 이성진 보도국장은 “유료음란사이트, 사이버매춘 사이트를 통해 철저한 단속이 이뤄지지 않으면 이 같은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이버폭력 당한 청소년 87.9%달해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 따르면 ‘불법 청소년 유해정보 신고센터’에 접수된 사이버폭력 상담 건수는 올 들어 3970건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연예인 X파일’이나 ‘개똥녀’사건 등으로 사이버 폭력이 급증했던 지난 한해 8406건의 절반에 달하는 것으로 올 들어서도 사이버폭력이 여전한 모습이다.

사이버폭력 상담건수는 2003년 4217건에서 2004년에는 3913건으로 줄어든 뒤 지난 해에는 8406건으로 급증했고 지금 추세라면 올해도 8000건을 넘어설 것으로 보이는 등 사이버 공간에서 폭력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익명을 이용한 사이버상의 폭력이 위험수위를 넘어섰다.허위사실 유포,비난 댓글,채팅언어 폭력 등 사이버폭력은 청소년들의 일상에 침투하진 이미 오래다.

KT문화재단이 중앙대에 의뢰, 초대 도시 청소년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청소년의 사이버폭력과 인터넷 윤리실태’ 조사 결과에서도 청소년 중 모욕이나 스토킹, 명예훼손, 신상정보 유출 등 사이버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는 응답이 87.9%에 달했다. 또, 인터넷을 통한 음란물 접촉 경험에 대한 질문에는 초등학생 14.4%, 중학생30.0%, 고등학생 49.0%가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 초등학생 7.6%, 중학생 13.1%, 고등학생 13.1%가 스스로인터넷에 중독되어 있다고 답했다.

특히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인터넷 게임 중독의 심각성은 대부분 알고 있으나 자녀가 인터넷을 통해 채팅 및 음란물을 접촉하는 것은 각각 53.0%, 18.2%만 알고 있다고 응답해 학부모들이 자녀들의 인터넷 이용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런데 청소년들은 인터넷 중독, 사이버폭력을 그다지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어 문제의 심각성이 더 크다. 청소년들이 알게 모르게 인터넷 중독이나 사이버폭력으로 병들고 있어도 우리 사회의 분위기 역시 한때 빠질 수 있는 단순한 유희 정도로 이해하고 적극적인 개선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정신과 전문의들은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들고 자신과 주위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이버폭력이 마약이나 도박 중독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인터넷 중독은 수면부족, 체력저하, 우울한 기분, 대인기피증 등의 비교적 가벼운 증상에서부터 우울증, 강박증, 충동조절 장애, 사회공포증 등의 심한 정신질환까지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학교 측, 피해자와 함께 예방교육 해줘야

최근 인터넷 메신저에서 채팅을 하다 시비가 붙어 끝내 ‘현피’(실제로 만나 싸우는 행위)가 발생해 중학생 28명이 폭력 혐의로 불구속 된 사건도 사이버폭력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전문가들은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게 하는 가정교육과 폭력을 양산하고 미화시켜 온 매스컴이 폭력성을 부추겼다고 지적한다.
연세대 소아정신과 신의진 교수는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 형제 없이 커 이기적인데다 부모들도 ‘쟤랑 놀지 말라’는 말을 자녀들에게 별 생각 없이 하면서 아이들의 배타성을 키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김현옥 회장은 “인터넷, TV, 영화 등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이 묘사되고 있다”라며 “입시에 밀려 학교에서도 제대로 된 인성교육을 실시하지 못하다보니 폭력성이 아이들에게 내면화돼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시민단체와 피해를 겪은 학부모들은 학교폭력을 줄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일선학교의 철저한 예방교육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일선 학교는 이러한 예방교육에 무관심하기만 하다.

학교폭력피해자 가족협의회 봉혜정 사무국장은 “피해자 가족들이 직접 나서 학생들에게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전국 모든 학교에 공문을 보냈지만 한군데서도 연락을 받지 못했다”라며 “학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 피해 당사자들과 함께 철저한 예방교육을 해줬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인터넷 실명제 약인가 독인가

청소년들은 인터넷 중독,사이버폭력을 그다지 심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문제의 심각성이 더 크다.

  이렇듯 사이버폭력의 증가와 함께 인터넷 실명제 도입 여부에 대한 논란도 커지고 있다. 특히 정부가 사이버폭력 예방을 위해 실명제 도입을 결정함에 따라 이에 대한 찬반 여론도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무엇보다 그동안 실명제 도입을 반대해왔던 업계, 시민단체의 반발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 실명제는 인터넷 게시판에 의견을 올릴 때 게시자의 성명과 주민등록번호의 일치 여부를 확인한 후 일치하는 경우에만 허용하는 기술적 조치를 말한다. 사이버 공간에서 인신공격과 사생활 침해가 잇따르자 광범위한 인터넷 실명제 도입 필요성이 계속 제기돼 왔고, 결국 정부가 칼을 빼든 것이다.

사이버폭력이 날로 기승을 부리고 그 피해가 막심하다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대책을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하지만 문제는 실명제가 궁극적인 대책이 될 수 있는가 여부다.
업계, 시민단체는 인터넷 실명제가 사이버폭력의 현실적 대안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현 제도안에서 사이버폭력을 근절할 수 있는 대책을 충분히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김경달 다음 미래전략본부장은 “고의, 악의적인 네티즌은 실명제를 도입해도 명의 도용을 통해 충분히 단속의 눈길을 피해갈 수 있다”며 “가해자 검거는 현재로도 IP추적을 통해서도 검거율이 80%가 넘을 정도로 충분할 뿐 아니라 오히려 열악한 사이버 수사대 인력, 재정, 등을 보강하는 것이 더 현실적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청소년에 대한 보호와 관심 기울어야

이제 우리사회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상의 법과 도덕 윤리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어느 틈엔가 온라인 세상도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스팸 메일 발송과 음란물 유통이 그대로 횡행하고 있다. 모니터링 활동을 강화해 음란물 유통행위를 처벌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오프라인 이상으로 온라인상에서도 청소년에 대한 보호와 관심을 기울여나가는 공동체 모두의 노력이 우선시 돼야 한다.

  글·사진/박경미 기자

박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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