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서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오세영-

겨울바다를 찾았다. 네 시간을 달려 마주한 속초 앞바다. 가능하면 찬란하게 빛나는 일출을 보고 싶었지만, 도착했을 땐 이미 아침이 밝아 있었다.

하늘이 온통 구름으로 덮였다. 그 뒤로 태양은 자취를 감췄고 잿빛 하늘을 인 바다만이 짙은 초록빛으로 출렁였다. 회색 트렌치코트를 걸친 중년의 바다. 잔뜩 분위기를 잡고 있는 바다를 보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심연으로 가라앉히는, 눈앞의 바다는 그런 바다다. 어쩌면 해를 쏘아 올리는 눈부신 바다가 아니라 이런 바다가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래 위에 중구난방으로 찍힌 발자국들이 어지럽다. 곧 있으면 다가올 새해를 기념하기 위해 이미 많은 인파들이 바다를 다녀갔다. 한해를 보내며 혹은 맞으며 그래도 한번 쯤 바다는 보아야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 땅과 바다의 경계에 서면 보이지 않던 해답이 두둥실 떠오를 것 같은 기대감의 발로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자녀를 하나씩 품에 안고 바다를 바라보는 부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부부가 바라보는 바다 너머 미래에는 분명 저 어린 자녀들이 있을 것이다. 혼자 온 듯 보이는 싱글들은 대체로 웃음이 없고, 처량하게도 낮부터 술병을 차고 앉아 넋두리를 하는 사람에게선 생기가 없다. 차가운 모래밭에 붙어 앉아 추운 줄도 모르고 웃통을 벗어재낀 연인은 분명 사랑의 열병에 빠졌으리라. 어떤이는 웃고 어떤이는 들떴고 어떤이는 지쳐보였다. 어떤이는 하염없이 넋 놓은 표정으로, 어떤이는 당장이라도 울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내는 얼굴로, 모두 하나 같이 바다를 보고 있다.

사람들이 바다 앞에 설 때의 모습에는 크게 차이가 없다. 요즘처럼 격정적인 계절에는, 대부분 그 동안 묵혀 두었던 감정의 항아리를 저 깊은 심연 어딘가에 묻어버리려는 심정으로 바다를 찾는다. 아마도 그 항아리의 뚜껑을 열면, 숱한 회한과 실패들이, 고통의 기억들이 바닷물보다 짠 눈물에 푹 재워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의 바람대로 바다가 모든 것을 삼킬 수는 없다. 그저 저 파도의 가고 오는 것처럼, 밀려오는 것이 있으면 쓸려 보내는 것이 있는 세상 이치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음미해보는 것이다. 어쩌면 땅 끝에 서 봄으로써 더 이상 후퇴할 길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삶터로 돌아가선 두고 온 바다를 생각하며 또 한 번 힘을 내 보는지도.

  파도가 젖은 모래 위에 그려놓은 아이들의 그림을 금세 지워버렸다. 훼방꾼의 장난에 외려 흥이 났는지 아이들은 맨발이 되어 파도의 전진과 후퇴를 따라하며 바다와의 놀이를 계속했다. 추위에 벌게 진 두 발 위로, 거센 파도가 요란하게 부서지며 포말을 터트렸다.

자디 잔 포말들은 이내 모래알 사이로 스며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곧이어 새로운 포말들이 생성되고 소멸하기를 반복했다. 눈보다 하얀 포말의 흰빛이 사라질 때는 방금 딴 탄산음료처럼 싸-한 소리를 냈다. 아이들을 따라 겨울바다에 발을 담갔다. 맥주거품 같은 포말이 부드럽게 시린 발을 감쌌다. 그 옛날 예수님이 씻겨준 발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바다가 베푼 세례 뒤에 작은 위안이 따라왔다.

바다 앞에 서면, 우리는 몸담을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는 설레임에 몸을 떤다. 너무도 크고 넓어서 옹색한 제 가슴엔 다 담을 수 없는 대양을 바라보며 우주 속 점과 같이 피어있는 자신의 존재를 숙연히 들여다본다. 들여다보면 저 숱한 모래알이 우리요, 소멸하는 포말 또한 우리라는 걸 알 수 있다.

땅 끝에서 바라보는 우리는 그렇게 작아지는 대신 훨씬 가벼워진다. 좀 더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현실과 미지의 경계가 들썩이는 그곳을 찾아가 애써 몸을 떨며 바다의 세례를 받는 것이다. 아이들이 모래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뛰어갔다. 파도가 첨벙거렸다. 그러자 온 바다가 출렁였다.

글·사진/김혜경 기자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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