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있는 풍경_눈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면
어릴 적 고사리 손으로
솜사탕 같은 눈뭉치를 만들며
홍시처럼 익어 터질 것 같은 두 볼을
쌓인 눈에 묻어두고 동동거리던 날을
눈 내리는 풍경에 그려야겠다
학창시절 검정 코트 깃 사이에
풋 사랑의 가슴 뛰는 설레임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다고 느끼며
고이고이 간직하며 지낸 날들을
오랜 날이 지난 다음에도 잊혀지지 않도록
눈길위에 살풋이 되새겨놓고

눈이 내리면
사라진 첫 사랑에 가슴 앓으며
그리움에 눈물 흘리던 밤도 기억하고
새벽하늘에 편지지를 그려
쓸쓸한 마음만 썼다가 지우며
사랑은 스쳐가는 우연일거라고
조심스레 아픈 마음 접어두었던
추억 속의 사랑처럼
눈이 내리면
그래도 사랑은
아름다운 거라고 웃음 지을 수 있게
긴 발자국도 찍어 놓아야겠다

 
                                    -고행숙-

순백의 고요가 밤새 지붕 위로 내렸다. 옛날, 할머니는 귀를 가만 기울이면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그리고 눈이 오는 밤에는 창호지가 밖에 쌓인 눈의 흰 빛을 받아 희미한 빛을 띠기도 한다 했다.
어쩐지 지난밤 꽁꽁 닫힌 창문 너머로 무언가 인기척 같은 게 느껴진다 했더니 새벽녘에 문을 열자 마당이 온통 백설기처럼 포근포근한 눈밭으로 변해 있었다. 장독대며 기와지붕, 마당에 어지럽게 벌여 놓은 잡동사니 모두가 다 눈코트 속에 가려 눈부시게 미화되었다.
“눈이다.”
이 단순한 미적 순간을 맞이할 때면 어른이든 아이든 늙은이든 별반 다른 감탄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몇 해를 살아도 물리지 않는 풍경. 두껍게 쌓인 눈을 보고 혀를 차는 사람은 어른과 노인이다. 더 이상 눈이 반갑지 않은 것은 밤새 내린 눈을 쓸어내야 하는 수고로움 때문일까. 앞으로 나가지 않는 도로로 답답할 것이다. 그래도 폭설 덕에 하루 정도 학교도 쉬고 회사도 쉬면 좋지 않을까…. 딱 하루만. 철없는 생각을 머리에 인 채 나와 툇마루 끝에 섰다.

 적당한 두께로 쌓인 눈 위에 첫발을 디뎠다. 사박,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이렇듯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맞닥뜨릴 때면 저 희고 눈부신 위에 가장 먼저 발도장을 찍고 싶은 마음이 욕심처럼 일렁인다. 그러다 그보다 조금 늦게, 성역을 침범하는 불순한 존재로서의 미안함 같은 것도 설핏 고개를 든다. 그래서 첫발은 언제나 가장 조심스럽다. 조심조심 도둑걸음으로 첫 길을 뚫는다. 그리고 그보다는 덜 조심스럽게 덜 미안하게 두 번째 길을 뚫는다. 그러다보면 마당은 어느새 요란한 발자국 천지가 되는 것이다.
눈은 바닥 두꺼운 운동화 밑에서 뽀드득뽀드득 건강한 소리를 냈다. 뽀드득. 이 소리를 들으면 거품세안을 한 얼굴을 비눗기 하나 남기지 않고 말끔히 닦아냈을 때처럼 왠지 기분이 좋다. 하지만 쌓인 눈을 밟았을 때 뽀드득 소리가 나는 것은 다가올 추위의 전조다. 날씨가 추워서 눈결정이 서로 엉겨 붙지 못하고 어긋날 때 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적당히 내린 눈은 포근하지만 그 양이 지나치면 폭설이 되고 만다. 예부터 물사태는 막아도  눈사태는 그냥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 있듯이 작심하고 내붓는 폭설 앞에서는 첨단시대고 뭐고 할 것 없이 인간은 무력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추워야 할 겨울이 더 이상 춥지 않다는 소식이 월드뉴스를 장식한다. 이상기온현상 탓에 한참 추워야 할 유럽과 미국 일대가 지금 봄날씨란다. TV로 반팔 옷을 입은 인파들이 공원에서 일광욕을 하는 워싱턴 풍경이 소개됐다. 북한의 위도와 비슷한 워싱턴의 한낮 최고 기온이 22도. 한 동물원에선 3월에야 볼 수 있는 벚꽃이 일찌감치 꽃망울을 터트렸다니, 계절을 망각하고 뛰쳐나온 벚꽃도 적잖이 당혹스럽지 않았을까. 바다 건너에서 벌어진 일에도 이렇게 연대불안을 느끼게 되니 지구촌시대가 맞긴 맞나보다.

소복이 쌓였던 눈도 시간이 지나면 영양이 빠져나가듯 푸석한 얼음덩이로 말라간다. 슬러시처럼 굵어진 얼음알갱이 사이로 제법 벌어진 틈새도 생긴다. 눈의 수명이 다 한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보니 눈에도 생명이 있는지 모르겠다. 일찍이 그것에 생명을 부여하고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고 말한 어느 시인은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고 노래했다. 진짜 의지체(意志體)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덮고, 흡수하고, 변화시키는 힘을 사사받은, 눈은 신비하고 오묘한 하늘의 전령사 같다. 

눈이 녹으면 저 눈부신 흰빛은 다 어디로 가는가.  셰익스피어가 그의 작품 속에서 남겼던 명대사이다. 과학적 호기심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이 한 문장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누구나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상의 면모에조차 원초적인 호기심을 들이대는 천재의 발상법이 눈부시다고나 할까.

그 흰빛의 증명까지는 아니지만, 누구나 한번쯤 ‘눈은 왜 흰색일까’ 동화 같은 의문은 가져보긴 한다. 눈은 왜 분홍이나 노란빛이 아니고, 연보라나 푸른빛이 아니고 흰빛이란 말인가.
눈이 하얀 이유는 빛이 작은 가루 속을 통과하지 못하고 표면에서 무질서하게 광선을 산란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흰 색소가 아니라 빛의 산란 그 자체다. 그렇기 때문에 저 눈의 결정은 녹아 없어지며 길바닥에 우유 같은 얼룩 하나 남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빛은 그냥 눈과 함께 ‘사라졌다’고 하면 될 일이다. 그것이 신비로운 눈의 본질에 더 가까운 표현이다.

 그친 줄 알았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이나마 눈이 세상을 하얗게 고쳐 덮는다.  천지가 눈으로 덮인 모습은 눈이 세상을 잠시 다독이며 위로하는 모양 같기도 하다. 새삼 눈이 없는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가 눈을 처음대한 그 순간의 충격을 잊어서 그렇지, 눈을 볼 수 있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축복이고 감동의 체험이다.
눈 위를 자박자박 걷는다. 이상기온 현상에도 불구하고 올겨울도 무사히 내려준 그 축복에 감사하며.

 

글/김혜경  사진/최경훈 기자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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