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있는 풍경_헌책방

 

 

헌책방의 지렁이

뒷전의 지혜들이
퀴퀴한 내음으로
청승맞게 썩어 가는
헌책방에는
도수 높은 안경들만
굶주린 좀벌레처럼
궁상맞게 헌책을 씹어댄다.

헌책마저 구입할 수 없는
남루한 궁상이
씨익 멋쩍은 웃음으로
구독료 지불하곤
지렁이처럼 꾸물대며
헌책방 나선다.

햇빛 따가운 낡은 지렁이
옆 책방으로 꿈틀 들어가면
매연 가득한 거리에는
햇빛에 바싹 마른 지렁이들 행렬!

죽는 줄 모르고 어딜 가는가?
 

-백재석-

 

부옇게 먼지 낀 유리문을 열고 헌책방에 들어섰다. 경첩께에 붙은 놋쇠종이 딸그락, 무뚝뚝한 소리를 냈다. 빽빽이 들어찬 책이 온통 벽과 기둥을 이루고 있는 실내. 천정 끄트머리에 켜진 백열전구로 간신히 어둠을 면한 그곳에는 묵은 종이 특유의 눅눅하고 쾌쾌한, 그러면서도 헌책방만의 향수를 자극하는 묘한 냄새가 가득했다.
“계세요?”
음악도 없이 정막한 게, 아무도 없는 걸까 싶을 즈음 허리가 휘도록 높이 쌓인 책기둥 사이에서 늙은 남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이상하게도 인사를 먼저 건넨 건 내쪽이었다. 그곳은 그의 특별한 작업장이었고 아무나 들어올 수는 없을 것 같은 독특한 권위가 느껴졌다. 이쪽은 헐값의 책을 구하러 온 아쉬운 사람이고 그가 그곳의 모든 걸 주관하는 터줏대감이었다. 그가 없으면 이곳에 설령 원하는 책이 있다한들 찾을 수 없고 찾았다 해도 그가 내켜하지 않으면 살 수도 없으니 말이다.

 

낡은 안경을 코끝에 걸친 남자의 모습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하루 종일 묵은 종이들이 뿜어내는 진한 향기 속에서 오래된 글자들을 들여다보고 배열하고 묶는 일을 해왔을 그의 피부도 종이처럼 누렇게 바래있었다. 추리소설을 찾는다고 했더니 후미진 한쪽구석을 가리켰다. 아쉽게도 원하던 책은 그곳에 없었지만 충분히 예상했던 터라 크게 상심되지는 않았다. 이미 몇 곳, 다른 가게들을 들렀다 온 참이었다. 오래된 책들을 찬찬히 둘러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침 한산한 때였고 주인은 손님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어느 먼지 쌓인 책장 사이에서 기대하지 않던 책 한 권 건질지 모르겠다는 야릇한 흥분이 일렁였다.

쓰러질듯 말듯 한 책탑 하나는 문학서적으로 쌓은 탑이었다. 한자가 많아 책 제목 조차 제대로 읽지 못할 게 태반이었지만 잘만 찾으면 유명한 문인의 걸출한 작품을 만날 수도 있었다. 거기에는 톨스토이도 조정래도 윤동주도 있었고 마광수도 있었다. 언젠가 서재를 갖게 되면, 좋은 작가의 좋은 책을 두루 꽂아 바라보기만 해도 든든한 철옹성을 쌓아야지 마음먹던 것이 생각났다. 바쁘다 바쁘다 푸념을 하며 책 한줄 읽기도 미루던 주제에 서재라니. 그저 이렇게 틈나는 대로 헌책방에 들러 남이 내놓은 헌책이나 얻어 보면 족할 줄을 모르고.
그래도, 이렇게 골동품처럼 묻혀있는 헌책들과 함께 헌책방에서 보내는 시간도 꽤 괜찮은 것이었다. 시간의 유람이 가능한 헌책방에는 조명 환한 대형서점의 새책에선 느낄 수 없는 묵은 재미들이 가득했다. 깔깔한 감촉의 책장을 넘기면 거기에선 손때가 아닌 시간의 때가가 묻어났다. 시간 속에 바래가는 문자들이 가로로 혹은 세로로 늘어서서 해묵은 잉크냄새를 폴폴 풍기며 시큼한 페로몬을 풍겨댔다. 어떤 책은 손자국 하나 나지 않은 새책과 같았고 어떤 책은 군데군데 주황색 김칫국물이나 커피자국 따위를 문양처럼 새긴 것도 있었다. 1979년판 안네의 일기가 눈에 들어왔다. 눈물 꽤나 흘리며 보았던. 죽은 듯 숨어 지내야 했던 아지트에서의 피난살이가 기억났다. 사진으로 인쇄된 안네의 동상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슬펐던지. 몇 해 전 생을 마감한 유명 작가의 이름도 눈에 띄었다. 저자소개에 태어난 해만 나와 있고 물결표시 다음은 공란인 것을 보니 저자가 살아생전 나온 책이었다. 이제 나오는 책들은 전부 작가가 삶을 마친 년대를 정확하게 찍어 나올 것이다. 세월은 쉽게 요약하자면 그런 것이다. 
옛 책은 외국어표기법이 지금과 달라서, 읽다보면 군데군데 예기치 않은 즐거움을 건질 수도 있었다. ‘th'를 ’ㄷ'로 읽고 표기했던 까닭에 추리소설의 등장인물이 “이것 참 드릴 만점”이란다. ‘스릴’이 ‘드릴’이 되니 짜릿한 긴장감을 느껴야할 대목에서 웃음이 나오고 만다.

헌책방의 모든 책이 다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팔려나가진 않는다. 아무도 사 가지 않는 책들은 구석에 따로 묶여 분리하기 마련. 그 곳에도 제 짝들을 잃고 급격히 위상을 실추한 씨리즈물이나 전집 일부가, 혹은 ‘원 세상에 어떻게 이런 사건이’ 따위의 제목부터 어딘가 의심스러운 신변잡기식 단행본이 해묵은 참고서들과 함께 폐기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쌓아 놓으면 책이 흐르지 않고 그렇게 되면 단순히 통로를 막는 애물단지에 불과한 것이다.

 개중에는 어쩐지 껄끄러운 책들도 있다. 헌책이야 싸고 상태 양호하면 그만이지만 그 두 조건을 충족하고도 왠지 구매하기 꺼려지는 책이 있으니, 첫 장에 짧은 인사말이라도 적혀있는 책이 그랬다. 성격까지 묻어날 것 같은 손글씨로 누구누구 이름을 불러가며 한 글자 한 글자에 또박또박 정감 있는 메시지까지 전하고, 마지막에 선물하는 이의 이름까지 정확히 적어놓은, 본디 누군가의 소유가 확실했던 흔적을 지닌 책 말이다. 그것이 아무리 욕심내던 책이라 할지라도 몇 천원의 알량한 값을 지불하고 내 것으로 삼기엔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주는 이가 이렇게 마음을 담아 선물한 책이 어떤 사연으로 이곳까지 흘러왔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괜스레 책을 판 이가 야속하다는 생각도 들고, 어쩌면 제 취향의 책이 아니거나 그다지 친한 이가 준 것이 아닐 수도, 책을 팔아야 했을 만큼 궁색했을 수도 혹 공간만 차지하는 애물단지였을 수도 있다고 쓸데없는 짐작을 해보기도 했다. 책은 소유하는 것이 아닌 나누는 것이라는데. 최종규라는 이는 모든 책은 본디 헌책이라고 했다. 헌것일수록 좋은 것, 술과 사람과 책이라지….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참고서 사시죠?” 봄이 왔다는데도 두툼한 패딩을 걸친 남자가 참고서 한 묶음을 들고 와 값을 흥정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와 헌책방. 어딘지 궁상스러운 게 적절히 짝이 맞는 풍경이었다. 비가 오면 눅눅한 종이냄새는 더욱 진득하게 사방에 흘렀다. 이런 날은 몇 시간이고 쭈그려 앉아 책을 뒤져도 좋으련만. 세월과 무관하게, 그냥 여기서 이렇게 책만 읽어도 좋으련만. 그러려면 헌책방 주인이 되는 수밖에.
값을 치르고 나온 손에는 정호승 시인의 시집 한권과 안네의 일기가 들려있다. 집에 돌아가 헌책방에서 건진 아름다운 시 한 구절을 노트에 베껴야지. 시 밑으로 주석처럼 이렇게 적어야겠다. ‘2007년 2월, 헌책방에서 보석처럼 건진 시집 중에서.’

 

글·사진/김혜경 기자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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