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있는 풍경_봄

 

 
상춘곡

그것은 아주 은은하고 부드러운
생기가 느껴지는 빛이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머리맡 문살 창호지에
바늘 끝 같은 것이 타닥타닥 튀는 소리 같았습니다.
오래 그 소리에 귀를 던져두고 있다가
나는 슬그머니 눈을 뜨고 보았지요.
그 순간 나는 얼마나 놀랐던지요.
그것이 문살 창호지를 투과해 들어오는
연둣빛 봄 햇살 소리였다는 걸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윤대녕-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이장희, 봄은 고양이로다).

이웃집 지붕 위로 누런 줄무늬 고양이가 지나갔다. 겨울 같았으면 두꺼운 창문 너머로 비치는 녀석의 실루엣만을 보았겠지만 때마침 환기를 위해 수개월 닫혔던 창을 열어둔 터였다. 거칠게 밀리는 창을 열자 아직 차지만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들이마신 공기가 폐 속 깊이 가볍고 상쾌하게 흘렀다. 황금빛이 눈부신 양지에선 이제 막 생성된 대기의, 청결한 봄볕 냄새가 났다. 바람도 햇볕도 고양이도 모두 한 가지로 노래하고 있었다. 그래, 봄은 봄이로구나.

고양이는 지붕 위를 떠날 생각이 없는지 창문가에서 저만치 떨어져서는 초원의 사자처럼 여유롭게 배를 깔고 누웠다. 봄볕이 기와를 알맞게 데워둔 모양이었다. 어디선가 살랑거리는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면 한가로운 봄의 정취를 풍기는데 제격이리라. 분홍빛 살이 폭실하게 튀어나온 발바닥으로 연신 침을 묻혀 몸단장을 하던 녀석이 전신을 뻗어대며 기지개를 켰다. 전신에 나른함이 몰려 왔다. 입을 다문 채 갸르릉거리는 목 끓는 소리도 듣기 좋았다. 한 잠 청할 태세인가. 졸음을 불러오는 녀석에게 ‘아지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무계단의 틈새에는 풀꽃이 돋아 있었다. 바람 따라 휘청이는 여린 줄기에 붓으로 찍어놓은 듯한 흰 꽃잎을 머리에 단, 선녀 같은 꽃이었다. 보도블록이 만나는 틈새에서 기적처럼 핀 노란 꽃도 있었다. 봄의 생명력은 생각보다 훨씬 무궁무진해서, 씨앗 하나 건지지 못할 만큼 옹색한 땅, 메마른 시멘트 위에도 이렇듯 생명을 안착시키고 보란 듯이 키워낼 줄 안다. 일찍이 저 풍요와 지혜의 왕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이 꽃 하나가 입은 은혜만 못하다는 성경구절이 떠올랐다. 때에 따라 내려주는 비와 햇살, 적당한 바람은 지구의 모든 생명을 먹이고 입히고 키우며 다시 받아내는 양육의 손길. 그 손길을 타며 연둣빛 봄풀들이 하얀 수선화, 진보랏빛 제비꽃을 피워내고 있다. 본디 한 가지 색에서 비롯된 색색의 그 빛깔, 여리고도 강인한 풀잎의 생명력, 끝내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자연의 신비가 이 계절을 시작으로 쉴 새 없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꽃집에서 파는 화려한 꽃들도 어여쁘지만 봄의 생명력을 느끼기엔 아무렇게나 나고 자란 들꽃만한 게 없다. 꽃망울이 크지 않고 올망졸망 무리지어 피어난 풀꽃들이 그지없이 좋다. 얼었던 땅이 부드러워진 곳에 흐드러지게 핀 봄의 무성함, 그 속에 오묘하고도 단순한 만물의 섭리가 보이는 것 같다. 희한하다. 꽃은 해마다 같은 모양으로 피는데 어쩌면 이렇게 늘 새로운지, 금세 시들고 말 풀포기에 우리는 왜 새삼스레 얼굴을 붉히고 가슴을 설레는지…. 한 송이 들꽃에 천국을 보라는 시인의 노래처럼 어쩌면 그 속에서 우리가 작은 천국을 보는 모양이다.

청춘을 흔히 인생의 봄이라 말한다. 가장 화려하고, 여간해선 지칠 줄 모르고, 그만큼 쏜살같이 지나는 인생의 한 때이기 때문이다. 이미 내 것이기에, 청춘을 살고 있는 동안에는 굳이 청춘이라는 두 글자를 유념하지 않는다. 동날 줄 모르는 영원한 주머니를 꿰찬 얼굴로, 젊음의 욕조에 몸을 담고 기분 좋은 거품에 둘러싸여 나른한 단잠에 취하는 것이다. 욕조는 뜨겁게 데워진 물의 온도와 체온을 빌어 한동안 식지 않는다. 낮 동안의 저 기와지붕처럼 말이다. 그러다 어느새 싸늘해진 욕조 속에서 깜짝 놀라 눈을 뜨면, 악몽을 꾼 것도 아닌데 조금 겁에 질린 얼굴이 되어 버린다. 마치 졸다 턱을 떨군 아지랑이의 얼굴처럼.
청춘, 그것은 세상의 모든 꽃이 나를 위해 피어난다는 착각에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한다. 그것은 정녕 착각일까, 하고. 세상의 모든 꽃이 나를 위해 피어나고, 내가 죽으면 꽃도 지고 지구도 멈추고 웃음도 사라지는 그것이 진짜 정답은 아닐까.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착각 속에 살아야만 삶 전체가 봄이고 청춘일 텐데 말이다.
또 내내 봄이 아니면 어떠랴. 꽃은 봄에만 피는 것은 아니다. 봉선화, 수국, 장미, 능소화는 여름에 피어나고 구절초, 국화, 코스모스는 가을이 제 무대다. 동백과 수선화, 하얀 녹차꽃은 겨울에 피어나는 계절꽃이다. 수십 년을 살며 평생 단 한번만 꽃을 피운다는 ‘황변만년란’은 일생에 단 한번 7미터에 이르는 기다란 꽃줄기를 올려 개화하고 열매를 맺은 뒤 서서히 생을 마감하는 일회결실성 식물이다. 얼마 전 30년을 산 그 꽃이 나라 밖 어느 식물원에서 개화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서서히 시들고 있을 그 꽃은 청춘과 동시에 노년을 맞았을 테지만, 분명 어느 시기 어느 곳에서 어떠한 모습으로든 또 다시 피어나지 않겠는가.

아쉬워만 하기에 생은 터무니없이 짧다. 한차례 봄비가 오고 나면 찬란했던 벚꽃 잎들은 우수수 떨어져 바닥을 뒹굴 것이다. 그러나 괜찮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또 봄이라지 않는가. 수십 번 봄은 가고 또 올 테니 말이다. 앞으로 올 봄이 더 많고 더 아름다울 것이다. 이 봄이 다하기 전에 있는 힘껏 봄의 사치를 누리면 족하다. 갓 태어난 아이이자 모든 생명의 어머니가 지금 창밖에 서서 경쾌하게 문을 두드리고 있으니! 저것 봐라. 4월의 한가운데 봄의 여왕이 춤을 춘다. 봄 햇살이 충만한 지붕 위에서 고양이가 노닌다. 노란 볕이 따사롭다.  아지랑이가 쭈욱- 온몸으로 기지개를 켠다.

 

글·사진/김혜경 기자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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