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건강한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정상적인 삶을 살기 힘든 상황에 부딪힌다면 어떨까. 아마 이내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 좌절하며 세상의 불공평함에 분노를 느끼고 절망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딛고 일어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이가 있다. 바로 한국절단장애인협회 회장이자 방송인 김진희 씨가 그 주인공. 그는 절단장애인들에게 재활의 길을 안내할 뿐 아니라, 이들의 수호천사 역할을 톡톡히 해주는 고민해결사로 통한다. 자신의 아픔을 ‘훌훌’ 털어버리고 장애인으로 살아갈 미래를 당당히 준비한 그.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북돋아주기 위해 장애인 카운슬러의 삶을 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아픔 딛고 일어선 ‘오뚝이 인생’

큰 키, 스커트 밑으로 쭉 뻗은 다리를 보고 사람들은 선뜻 그녀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오히려 그녀에게 풍기는 당당한 아름다움에서 전형적인 커리어 우먼의 인상이 풍길 뿐이다. 절단장애인이지만 비장애인 못지않게 역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그는 사람 만나기를 꺼리지 않는다. 하는 일도 많다. 인터넷 의수족 정보센터 ‘데코’(DECO)의 홈페이지(uk-ortho.co.kr)를 개설했고, 한국절단장애인협회 회장직을 맡아 절단장애인들의 삶속에 뛰어들어 희망을 전달하고 있다.

그는 홈페이지를 통해 그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기도 하는데, 상담 건수만 개인 메일을 포함해 하루 20~30여건에 이른다. 불의의 사고로 좌절에 빠진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이 사이트를 만든 것은 지난 99년. 장애등록 정보에서 최신 장애계 뉴스까지 수집해 회원들에게 꼼꼼히 알려주고 있다. 처음 개인 홈페이지로 시작해 불과 10여 명에 불과하던 회원은 꾸준히 입소문을 타 규모도 커졌다.
“하루에 25명꼴로 절단 장애인이 생긴다고 해요. 1년이면 무려 9천여 명에 달할 그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고자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죠.”

그녀는 타고난 말솜씨 덕에 얼마 전까지 KBS 제3라디오 ‘함께 하는 세상 만들기’에서 방송인으로도 맹활약 했으며, 장애인 신문 등에 글을 기고하는 칼럼니스트·객원기자로도 활동해 명성을 얻고 있다. 

이렇듯,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지만, 그 역시 처음 장애를 입었을 때 절망했다. 사고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도 온몸이 떨려온단다. 미대를 졸업한 뒤, 10년 전 경기도 의정부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던 그는 출근길에 중앙선을 침범한 5톤 트럭과 정면충돌, 왼쪽 다리가 잘려 나가고 왼쪽 팔과 얼굴 등을 심하게 다치는 중상을 입었다. 그 이후, 약 2년 동안의 험난한 치료 끝에 가까스로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다. 하지만 당시 그에게 살아있다는 안도감보다 한 순간에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아픔을 견디는 괴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고.

“고통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는 생각에 수도 없이 울었죠. 하지만 가족들의 눈물겨운 간병 속에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게 되었어요.”

나눔의 기쁨엔 장애 없어

사고 이후 의족을 하고 스키를 타는 김진희 씨.

장애인으로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은 김씨는 장애인이 사는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다. 그의 노력에 하늘도 감동한 것일까. 절망의 골목을 헤매던 그에게 한가닥 희망이 찾아왔다.
바로 지난 98년 미국 장애인 패션모델인 에이미 멀린스가 의족을 하고서도 아름답고 멋진 인생을 살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부터다. 이후 김씨는 자신에게 맞는 의족을 착용하기 위해 온갖 수소문 끝에 영국에 있는 의족전문병원을 찾아냈다.
“미국의 스물 한 살 아가씨가 두 다리에 의족을 착용하고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진을 보는 순간 나도 한 번 해보자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병원 측과 몇 번의 이메일을 주고받은 후에 영어공부를 시작하고 무작정 런던 행 비행기에 올랐어요.”

영국의 재활의학으로 유명한 영국 ‘도셋 병원’에서 그는 약 두 달 가량 재활교육을 받고 의족을 맞췄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제2의 삶을 시작했다.
재활교육을 받는 내내 그녀는 사고 이후 처음으로 살고 싶어졌다. 또한 의족을 맞추는 동안 자연스럽게 장애인 재활보조 기구나 한국의 의료기기가 외국에 비해 열악한 것도 알게 됐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 그는 사고 전 보다 훨씬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장애인 카운슬러로 자신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언제든지 대화를 나누고, 휠체어나 의수족 등 보장구를 모아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달해 준다. 또 유럽배낭여행을 다니기도 하는데, 이는 세계최고수준의 보장구를 만든다는 희망으로 세계 어디든 달려가기 위한 일환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직접 만든 보장구의 미비점을 알아보고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라고.

“우리나라 의수족은 외국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해요. 마치 구두방처럼 허술하게 만들어내 보장구를 지원받아도 쓸 수가 없죠. 아직도 절단장애인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우리나라 현실이 안타까워요.”

자신이 겪은 아픈 기억을 갖고 있어서 일까. 그는 얼마 전 해외에서도 선행을 펼쳤다. 바로 사회봉사에 참여하고 있는 유명 연예인을 섭외해 ‘캄보디아 희망원정대’팀을 꾸린 것이다.
“캄보디아에는 전쟁으로 팔, 다리를 잃은 절단장애인이 많아요. 희망을 잃은 그들에게 의수족 지원과 휠체어를 기증해 조금이나마 아픔을 공유하고 싶었어요.”
워낙 활동하는 일이 많아 그는 때론 “장애가 뭐 벼슬이라고 떠들고 다니냐”는 눈총을 받기도 한단다. 그가 체험한 의수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다 보니 ‘장사꾼’으로 몰아붙이고 오해를 받기 때문이라고.

“음지에 있는 장애인들이 용기를 얻고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감수해볼 작정입니다. 사람들 편견 따위 무시하면 그만이죠.”

“장애인 전문 MC 되고 싶어요”

아픔을 딛고 제법 성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욕심 많은 그에겐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다. 그 중 장애인 전문 MC가 되고 싶은 것이 첫 번째 꿈이란다. 장애인들의 삶과 결혼, 성, 고부간의 갈등 등을 대본 없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그동안의 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제 이름을 건 프로그램을 맡는 게 간절한 꿈이에요. 장애인 당사자로서 그 누구보다 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허물없이 끌어낼 수 있거든요. 무엇보다 프로그램을 통해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요.”

젊은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음에도 그녀는 삶에 누구보다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 늘 주저앉을 것 같지만 어느 틈엔가 조금씩 앞서나가는 사람. 그리고 그녀를 조금은 특별한 사람으로 만든 ‘당당함’까지. 분명 그녀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스스로 삶을 선택해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 더 나은 삶을 살자”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는 그의 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글/박경미 사진/최경훈 기자

박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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