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1

한때 도박의 늪에 빠져 직장을 잃고 노숙자로까지 전락했던 회사원 박진우(가명)씨.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에 다니며 결혼하자마자 집까지 마련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던 그는 30대 초반부터 우연히 슬롯머신에 빠져들었다. 거듭된 슬롯머신 출입에다 포커까지 빠져들며 2억 원이 넘는 빚을 지게 된 박씨. 결국 아파트를 처분하고 세 살배기 아들, 부인과 함께 지하 월세 방으로 거처를 옮기게 됐지만 도박의 유혹을 여전히 떨쳐 내지 못했다. 급기야 회삿돈 2천 만 원을 횡령해 도박에 탕진한 그는 경찰의 수배를 피해 노숙생활까지 하는 인생의 밑바닥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2년이 넘는 노숙생활에 지친 박씨는 도박에 다시 손을 대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고 자수한 뒤 재취업을 했다. 새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그가 처음 한 일은 주변에 자신의 처지를 알리는 것이었다.
박씨는 “도박은 무서운 병이라 스스로 억제할 수가 없어요. 용기를 내서 주변에 ‘내가 도박 환자니까 절대로 돈을 빌려주지 말라’고 커밍아웃을 했어요”라고 말했다.

#사례2

현재 도박중독 클리닉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임성훈(가명)씨는 ‘재미있다’는 거래처 사장의 말 한마디에 우연히 슬롯머신에 손을 댔다가 인생이 확 꼬였다.

일주일에 2~3시간 정도 심심풀이 수준으로 시작한 것이 한 달이 지나자 급속도로 중독 상태에 빠져들었다. 한 달에 보름을 오락실에서 밤샘 하는 생활을 10개월쯤 하면서 그동안 사업으로 모은 돈 2억 원을 모두 날리고 3천 만 원의 빚을 졌다. 결국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로부터 버림 받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모든 게 엉망이 된 뒤였다.
그 이후, 2년 동안 도박을 끊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가까스로 도박의 덫에서 탈출한 그는 ‘도박’이란 말만 들어도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든다.

#사례3

단도박 친목 모임 회원인 김상현(가명)씨는 도박 때문에 수십 억 원을 날렸다고 털어놨다. 고교시절 내기 당구에 발을 들인 것이 불행의 씨앗이었다. 용돈으로 조금씩 시작한 내기 당구는 대학에 들어간 뒤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댔을 정도로 판이 커졌다. 그러다 우연히 당구장에서 벌어진 포커판에 끼게 된 뒤 본격적으로 도박 중독의 늪에 빠지게 된 것.

이때부터 그는 도박판에 미쳐 대학도 중퇴했다. 포커로 시작한 도박은 성인오락실로 옮겨 슬롯머신, 파친코, 스크린 경마 등 안 해 본 것이 없었다고. 이런 식으로 2년을 보낸 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보니 날린 돈이 수십 억 원에 달했다. 가족들도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절대로 도박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썼다.

그러나 도박의 유혹을 쉽게 떨치기 힘들었다. 결국 며칠 못가 성인오락실을 기웃거렸고 도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심지어 주식에까지 손을 댔다. 이제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우연히 호기심에 시작한 도박이 한 개인의 파멸을 불러 온 것이다.

성인 9.3% 병적도박 증상 보여… ‘습관’ 아닌 ‘질병’

위 세가지 사례는 강북삼성병원 도박중독클리닉에서 상담 받은 도박중독자들의 이야기를 정리해 놓은 것이다. 이렇듯, 오락으로 포장된 무서운 불행이 도사리고 있는 사행성 도박이 온 나라를 도박공화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대박’을 꿈꾸다가 ‘쪽박’을 차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도박이 파놓은 함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국가가 나서 ‘인생역전’을 은연  중에 부추기며 국민들을 도박 광풍으로 내몬 셈이 된 것.

지난해 ‘바다이야기’파문으로 경마, 경정, 경륜, 카지노 등 각종 도박의 연간 매출액은 11조 5539억 원을 기록했다. 사회 곳곳에 우후죽순 퍼져있는 불법 도박장까지 감안하면 국내 도박 산업의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중 7.3~9.3%가 병적 도박 증상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기준이 달라 해외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수치다. 도박중독의 폐해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파산, 실직, 이혼은 물론이고 자살률도 20%가 넘는다. 나아가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다. 절도죄의 35%, 비폭력 범죄의 40%가 도박으로 인한 것이라는 보고가 있을 정도로 도박이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과 손실은 어마어마하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데도 대부분의 도박중독자들이 자신을 환자라고 보지 않는다. 단지 ‘재미로’ ‘습관삼아’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러나 도박 중독은 엄연한 질병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부천성가병원 정신과 김대진 교수는 “노름을 좋아한다고 다 도박 중독은 아니다. 도박 중독은 술, 마약처럼 한 번 중독되면 빠져나오기 힘든 정신적 질환”이라면서 “단순히 가끔 즐기는 도박과 도박 중독을 나누는 두 가지 잣대는 내성과 금단 증상으로 나눌 수 있다”고 정의했다.

습관성도박연구센터 정준용 소장은 “도박 중독은 나이, 성별 관계없이 누구든지 빠질 수 있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해 한 번쯤은 돈을 따는 재미를 알게 된다”면서 “내성이 생기면 더 큰돈을 걸게 되고 결국 돈을 잃게 돼 똑같은 기분을 맛보기 위해 거는 돈을 더 늘리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박은 충동조절장애의 일종으로 알코올, 마약 중독과 마찬가지로 인생을 파괴하는 심각한 정신질환이다. 전문가에 따르면 도박을 하면 뇌에서 기분을 좋게 하는 도파민이 발생한다고 한다. 언젠가 돈을 딸 수 있다는 기대감과 더 많은 돈을 따기 위해 많은 돈을 거는 모험심이 도파민 회로를 자극해 그 수치를 급증시킨다고.

알코올 중독이나 약물 중독의 경우 신체적 이상을 보이면서도 끊지 못해 당사자도 병으로 인식하는 반면, 도박 중독은 몸에는 이상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훨씬 심각해진 뒤에야 병원이나 전문치료센터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강북삼성병원 도박클리닉 신영철 교수는 “도박중독은 일종의 뇌기능 장애다. 뇌에는 충동을 조절하는 회로가 있는데 이 회로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술을 접하면 알코올 중독자가, 도박을 시작하면 도박중독자가 되기 쉽다”고 설명했다.

  도박 중독 상태에 빠지면 특징적인 증상이 나타난다. 바로 내성이 생겨 도박하는 시간과 돈이 점점 커지게 되는 것. 또한 금단증상이 나타나 일시적으로 도박을 끊었다가도 초조하고 불안해 다시 도박장을 찾게 된다. 도박꾼들은 잃으면 “이번에는 딸 것”이라고 생각하고, 따면 “이번에도 딸 것”이라고 확신한다. 오직 과거에 크게 딴 경험과 기분만 기억해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증상이 반복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끊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도박중독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일단 도박에 중독되면 자기 의지로 끊기는 불가능하다. 다른 중독증과 마찬가지로 도박을 끊으면 우울증, 불안감, 불면증 등의 금단 현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술기운이 떨어진 알코올 중독자가 다시 술을 찾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도박 중독을 고치려면 자신이 도박중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병원이나 전문치료센터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강북삼성병원이 운영하고 있는 ‘도박중독클리닉’은 주 1회, 총 8주의 치료 프로그램을 가지고 도박중독자를 치료하고 있다. 또 강원랜드의 경우에는 ‘한국도박중독예방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마사회는 ‘유캔센터’를 운영 중이므로 참여해 활용하면 좋다.

또한 단도박 친목모임의 도움을 받는 것도 효과적이다. 그중에서도 전국에서 47개가 운영되고 있는 ‘한국단도박친목모임’은 도박중독자들이 도박을 끊겠다는 의지를 다잡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의미 있는 모임이다.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경험담을 나누고 서로 겪려하며 도박중독을 치료해나가는 집단치료 방식이다. 한국 단도박 친목모임 관계자는 “단도박 친목모임에 참여하면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큰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도박중독자, 가족 모두 노력해야

도박중독은 한 번 끊었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끊었다 해도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강북삼성병원 신영철 교수는 “도박으로 인한 쾌락을 한 번 맛본 뇌가 다시 반응하는 건 시간문제다. 그러므로 도박중독자 가족이 함께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전문가들은 마약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 치료센터처럼 도박 중독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시설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또 정신병원에서 치료받을 때 의료보험 혜택도 필요하다. 도박 중독자의 경우 대부분 가산을 탕진하고 빚에 쪼들려 있는 상태라 비싼 의료비를 감당할 여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라고. 또 도박 중독자가 노숙자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쉼터 등의 장소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도박의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 누구를 원망할 일이 아니다. 모든 결정은 자신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도박 중독자들은 도박장이나 사회를 원망하며 자포자기하고 만다. 수시로 자살 충동을 느끼며 이를 억누르지 못해 결국 실행에 옮기는 안타까운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중독자 자신의 노력은 물론 사회적인 관심과 대책이 절실히 필요할 때이다.

글/박경미 사진/최경훈 기자

박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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