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 때 일까. 인터뷰를 위해 시각장애인 낭독 봉사자를 만난 적이 있다. 소설 ‘책 읽어주는 여자(La lectrice)’에서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주인공처럼 김은수(54)씨는 10년이란 세월동안 묵묵히 시각장애인의 눈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를 통해 우연히 낭독 봉사의 매력을 흠뻑 빠진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 때 결정했다. 기회가 된다면 꼭 기자체험으로 낭독봉사에 도전해보리라. 얼마 전 호시탐탐 노리던 기회가 찾아왔다. 취재 차 방문한 시각장애인 복지관으로부터 봉사 의뢰가 들어온 것이다. 간단한 교육 과정만 거치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사회복지사의 말을 너무 순진하게 믿었던 것일까. 하루 종인 두 평 남짓한 좁은 녹음실에서 혼자 작업하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난생 처음 봉사를 한다는 뿌듯함에 그 어떤 체험보다도 즐거웠다.

“시각장애인에게 사랑의 목소리 전해요”

  평소 봉사라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기자에게 이번 체험은 특별했다. 낭독 봉사라고 하면 목소리 좋은 성우나 아나운서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 아니었던가. 그런 일을 경험해 본다고 생각하니 시작 전부터 소풍가는 아이처럼 기대감에 부풀었다.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찾아간 곳은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 위치한 노원시각장애인복지관(관장 권인희). 미디어 접근센터 녹음실에 들어서니 기다렸다는 듯 신진숙 사회복지사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 온다.

“어서오세요. 오늘은 첫 날이니까 간단히 교육 받고 연습 삼아 녹음 할 거에요. 일단 음성 테스트부터 시작해 볼까요. 발성연습 정도니까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사회복지사는 이날의 일정을 간단히 알려주고 음성 테스트를 위해 녹음실로 안내했다.
낭독 봉사는 점자를 읽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책을 낭독해 컴퓨터 디지털 음성파일로 녹음하는 작업이다. 녹음된 음성파일은 MP3형식의 CD로 제작돼 시각장애인들이 도서관에서 쉽게 대출 할 수 있다.

자원봉사자들이 읽는 책 종류는 다양하다. 소설·시 같은 문학작품이나 무협지·잡지 등에서부터 부동산 관련 시험교재, 의학서적, 법률 서적이나 학습지 등 모든 장르가 포함된다.
신 사회복지사는 “소설 책 한권을 녹음하는 데는 적어도 3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해요. 그러기 위해선 일주일에 한번은 녹음 해야 시각장애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요”라고 설명했다.

  사회복지사의 설명을 듣는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사실 봉사하러 왔지만 취재를 위해 온 목적이 더 컸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체험은 왠지 특별하다는 느낌에 ‘이번 기회에 꾸준히 봉사활동을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 사회복지사에게 컴퓨터로 작업하는 방법을 전수받고 음성테스트를 시작했다.
테스트를 위해 주어진 자료는 복지관의 홍보자료가 적혀진 팜플랫. 평소 발음 나쁘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어 뭐 어려울 게 있나 싶었는데, 그래도 테스트라고 생각하니 녹음실 의자에 앉자마자 긴장감이 돌았다.

“띄어쓰기와 마이크의 위치 조절만 하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어요. 목소리 톤은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그럼 지금부터 시작해 볼까요.”

간단한 주의사항을 들은 후, 목소리를 가다듬고 신중하게 글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내려 갈 때마다 생각과는 다르게 발음이 계속 꼬여 문장을 이어 나가기가 힘들었다. 몇 번의 실수로 순간 무안함을 감추지 못하자 옆에 있던 사회복지사는 괜찮다는 듯, 웃으며 다시 한 번 주의사항을 환기시켜 준다.

“너무 빨리 읽으려고 하니까 마음이 급해서 안 되는 거에요. 빨리 읽는 것 보다는 천천히 하더라도 정확하게 읽어내려 가는 게 중요해요. 시각장애인들은 오로지 들을 수만 있기 때문에 발음이 정확하지 않으면 곤란해요.”

낭독 봉사, 단순히 읽어내려 간다는 생각에 너무 쉽게 생각한 탓일까. 마음과는 다르게 실수가 반복되니 처음 가졌던 자신감은 온데 간데 없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만 절실했다.

몇 번의 반복에 노하우 터득해

두 시간 남짓 흘렀을까. 실수를 연발해 몇 번이나 다시 반복하지만 마음먹은 데로 되지 않아 슬슬 속이 상하기 시작했다.

“목소리 톤은 아주 좋아요. 하지만 책을 낭독 할 때 자기감정을 오버해서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아요. ‘듣는 독자’가 스스로 느끼도록 해야 하거든요.”

의기소침해진 기자의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신 사회복지사는 칭찬과 섞어 다시 한 번 조언을 해주었다.
사회복지사의 조언을 참고하기 시작하니 조금씩 실수가 적어지고 드디어 가까스로 음성 테스트에 통과했다. 이제서야 연습이 끝났을 뿐인데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즐거움도 잠시, 신 사회복지사는 실전으로 녹음할 책을 가져왔다. 배당된 책은 다니 라페리에르의 ‘커피향기’라는 책이었다. 주인공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쓴 에세이 내용의 도서. 이제 정말 녹음을 시작한다니 잘하려는 부담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여지껏 연습한 기억을 최대한 살려 천천히 책을 낭독했다.

하지만 연습한 팜플랫과 다르게 소설은 외래어가 너무 많아 읽기 힘들었고, 잘해야겠다는 부담감에 실수를 연발하고야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따끔한 지적이 옆에서 곧장 날아든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낭독봉사를 하고 있는 박경미 기자.

   “침 삼키는 소리와 책 넘기는 소리는 절대로 내면 안돼요. 시각장애인들은 오로지 귀로만 듣기 때문에 각종 잡음에 예민하거든요. 또, 문장 하나가 끝나면 바로 들어가지 말고 1초 정도의 여유를 두세요. 그래야 훨씬 자연스러워져요.”

순간 ‘이러면 안되는데’ 하는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기분이 상해지려고 한다. 하지만 시작부터 상한 자존심을 회복해보고 싶어 특유의 오기가 발동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몇 번의 반복에 이력이 생긴 것일까. 잘해보려는 생각을 접고 마음을 비우고 시작하니 어느 순간 실수도 적어지고 제법 노하우도 터득했다.

신진숙 사회복지사는 “생각만큼 쉽지가 않죠? 겉보기엔 쉬워보여도 막상 해보면 쉬운 작업은 절대 아니에요.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이 녹음한 도서를 읽는다고 상상해보세요. 그럼 기분 좋게 작업할 수 있을거에요”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작은 녹음실에 앉아서 책을 낭독하면서 누군가 내목소리로 된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니 옅은 웃음이 베어나온다.  

힘든 만큼 ‘보람’ 따르는 소중한 나눔

  세 시간 남짓 흘렀을까. 오랫동안 좁은 녹음실에 앉아 있었더니 온몸이 아파오고, 목소리도 잠겨왔다. 낭독봉사라고 해서 육체적 노동은 없을 줄 알았는데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히 체험한 것 같다.

몇 시간에 걸쳐 작업이 끝나자 몸은 피곤했지만 왠지 모를 기분 좋은 떨림이 온몸을 엄습한다. 순간 자원봉사자를 인터뷰 할 때마다 익숙하게 들었던 ‘보람’이라는 단어가 기억이 났다. 취재가 목적인 봉사였지만 막상 끝나고 나니 어느 순간 낭독 봉사에 빠져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3개월 후에 녹음한 도서로 시각장애인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온다. 앞으로 3개월 동안은 목소리 관리도 잘해야겠고, 책의 대화 부분에서 조금은 실감나도록 감성도 열심히 키워야지…. 

 글/박경미 사진/최경훈 기자

박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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