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
쉽게 만들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물컹물컹한 말씀이다
수천 수만 년 밤낮으로
조금 무쉬 한물 두물 사리
소금물 다시 잡으며
반죽을 개고 또 개는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
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

-함민복-

 

5월답지 않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강화도 갯벌을 찾은 날은 오후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아침부터 하늘이 꾸물하던 게 강화도에 닿기도 전에 버스 차창 위로 빗방울이 튀기 시작했다. 가방에 이것저것 짐이 많아 우산을 챙기지 않았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강화도는 그날 오후 내내 비가 내렸다.
갯벌을 밟고 싶은 충동이 인 것은 강화도에서 10년을 가난과 더불어 산 함민복의 『말랑말랑한 힘』이라는 시집을 스쳐 읽은 후였다. 찢어지도록 곤핍한 삶을 고집스러울 만치 바보처럼 지키며 사는 시인. 그가 서울을 떠나 강화도에서 뻘과 바다로 배를 채우며 지은 시들이었다.

달의 소리 들으러
서해바다에 가면

말렸다 풀리는
달이 짠 비단 자락

밀물 소리 썰물 소리
갯벌 위에 가득

수만년 여인의 자궁에
아이의 심장을 조각한

수 만년 동안의 퇴적이 만들어 낸 갯벌의 경이로움을 시인은 ‘달의 소리’라는 시에서 짤막하게 노래했다. 황량한 흙무덤인 듯 보이지만 정작 그 안에 수많은 생물들을 품고 있는 갯벌의 생명력을 여인의 모태에 비유한 것도 좋았거니와, 달이 밀고 당기며 짠 갯벌의 문양을 비단 자락의 부드러움에 빗댄 것도 마음에 울렸다. 시인이 말한 갯벌의 말랑말랑한 힘. 그 힘을 발끝으로 전해받기 위한 하루짜리 여행길이었다.

해안가에 펼쳐진 갯벌은 그야말로 잿빛 천지였다. 비 온 하늘도 잿빛이기는 마찬가지여서 지평선인지 수평선인지 알 수 없는 경계를 흩뜨리며 진흙뻘과 맞닿아 있었다. 비가 와서 일까, 갯벌 근처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고, 자욱하게 낀 안개가 물기를 더하며 묘한 광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피유-. 먹이를 찾는 건지 짝을 찾는 건지 뻘 어디에선가 맑은 새 울음소리가 메아리를 타고  울렸다. 광활한 뻘밭에서 메아리라니, 신기했다. 사방에 움직이는 거라곤 진흙 위를 낮게 나는 몇몇 새들이 전부다. 새들은 저마다 제 색을 갖고 있건만 신기하게도 뻘밭에선 모두 잿빛으로 물들어 보였다. 그 역시 뻘밭의 흡인력일까, 삭막하지만 묘한 절경이었다.

갯바위에 서서 누군가 뻘밭으로 들어가는 이 없나 기다려 봐도 아무도 없다. 드러난 갯벌은 끝이 보이지 않았건만 금세 밀물이 들어차면 어쩌나 조바심에 사방만 두리번댔다. 찰싹 발바닥에 밀착해 오는 뻘의 흡입력에서 살아있는 듯 묘한 위압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딱히 사람을 만나러 온 것은 아닌데도 아무도 없는 뻘밭에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 않았다. 몇 걸음 못 가 푹푹 발목을 채우는 뻘의 위력에 앞으로 나아가는 것조차 어려웠다. 무엇에든 흡착하고 보는 문어의 빨판처럼 드센 힘에 이내 걸음이 흐트러지고 균형을 잃었다. 옷이고 얼굴이고 진흙이 튀어 먹물 같은 점을 뒤집어썼다. 애초 버려도 좋을 옷을 챙겨 입었는데도 마음에 조바심이 일었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어도 발이 잘 빠지지 않으니, 이러다 발이 묶인 채로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되덜 않는 겁부터 집어먹은 탓이다. 때마침 멀찍이 안착해 먹이를 찾는 갈매기를 보고야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았다.
희한했다. 몸뚱이도 큰 녀석이 한발 한발 진흙을 디디면서도 흰 몸 어디 한 구석 진흙을 묻히지 않고 뻘 속에 빠지지도 않으니, 요령만 있으면 사람이라고 못 할까. 뻘은 뻘일 뿐 늪이 아닌 게다. 긴장을 풀고 발을 뽑으니 좀 전 보다 힘이 덜 들었다. 멋도 모르는 세계에 쉬이 발을 들였다며 갯벌이 걸어온 장난질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발 한발 무겁게 발도장을 찍으며 갯벌을 거닐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진흙 위로 크고 작은 새 발자국이 여기저기 찍혀 있었다. 이곳 강화 남단 갯벌 지역이 철새들의 서식지라는데, 5월에 자주 목격되는 물떼새나 도요새일까. 참새보다도 작은 새 한 마리가 뾰로롱 울음을 울더니 하늘로 솟구쳐 사라졌다.
 갯벌에서 가장 흔한 것이 삿갓모양의 석회껍질을 뒤집어 쓴 서해비단고둥이다. 손톱만한 것이 어두운 자개빛깔로 반짝이는데 녀석들이 그려놓은 뻘 자국을 보면 손끝으로 음악 선율을 그려 넣은 듯 부드러운 곡선을 이룬다. 자연이 온 몸으로 그려 넣은 바디페인팅을 보는 기분이다. 게였을까, 그 옆으로 동작이 빠른 무엇인가가 움찔하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거품이 올라오는 뻘을 파보면 하나같이 고른 굵기의 구멍만 남고 실체는 없었다. 그런데도 뭔가 무수한 생명들이 구멍 마다마다에서 날숨을 토해내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뻘 속에는 갯지렁이나 갯가재, 칠게 따위가 가득할 것이었다. 만조 때는 볼 수 없는 숨겨진 세계가 죽은 듯 보이던 뻘 밑에서 조용히 활개를 치고 있었다.
걷어 올린 두 발을 뻘 속에 단단히 심고는 균형 잡힌 자세로 눈을 감은 채 주위를 묵상하니 뽀로로 뻘 속에서 올라오는 물방울 소리와 무언가 물 위를 총총 튀어 가는 가볍고 날쌘 소리, 진흙 속에도 개구리가 사는지 꾸륵꾸륵 볼주머니 부풀리는 소리 따위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것은 뻘밭이 내는 하나의 거대한 숨소리였다. 좀 전의 두려움은 간데없이, 자연이 거대한 치맛자락을 들추고 드러내준 부드러운 자궁에 비로소 한발 들여놓은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달의 주기에 따라 물과 흙, 두 가지 세계가 공존하는 연안생태계. 수천 년의 세월을 흘러 쌓이고 쌓인 모래입자가 양쪽 모두의 생명을 아우르는 완충작용을 하고 있었다. 갯벌의 미세한 정수기능을 거친 강물은 깨끗한 상태로 화해 큰 바다로 스며들 것이다. 그 바다는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며 갯벌에 영양을 공급할 것이다. 얼핏 보면 볼품없는 불모의 땅이지만, 그 속에는 수 없이 많은 생명체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숨 쉬며 살아 꿈틀대는 천해의 환경. 이것이 바다도 아닌 뭍도 아닌 갯벌, 그 절묘한 세계의 ‘말랑말랑한 힘’의 근원이 아닐까. 시인이 말하던 ‘쉽게 만들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물컹물컹한 말씀’을 뻘밭에서 배운다.

어느새 세겹 옷이 가랑비에 모두 젖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지평선, 혹은 수평선 저 끝에서부터 작은 점 하나가 움직였다. 점은 조금씩 뭍으로 다가오며 처벅처벅 발자국 소리를 내더니 나무지게를 진 늙은 어부의 모습이 되었다. 어부는 보이지도 않는 저 끝에서 그물 낚시를 하고 오는 길이라 했다. 날이 궂어 뻘에 나온 어부가 자기 혼자라며 곧 물이 들어차니 해안가에서만 놀다 나오라며 귓뜸도 해 주었다. 어부가 걸어 들어온 길로 긴 발자국이 줄을 이었다. 붉은 낙조가 그 길을 물들이며 찬찬히 뭍을 향해 걸어 나왔다.

 

글·사진/김혜경 기자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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