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은 노란들판의 준말이다. 농부의 노동이 녹아난 들판에 넘실대는 결실들을 뜻하는 것이다. 93년 8월부터 약 15년간 ‘상호 협력과 연대’로 ‘인간 존엄성과 평등’이 넘쳐나는 노란들판을 꿈꾸며 희망을 일궈온 이들이 ‘노들인’이다. 그 노들인들이 지금, 가진 자들에게 다 빼앗겨 버리고 겨울바람만 부는 텅 빈 들판을 바라보고 있다.
노들야학은 얼마전까지 서울 광진구에 위치한 정립회관의 일부 공간을 빌려 공부해왔다. 그러나 정립회관 측이 운영공간 부족과 관리비·운영비 부족 등을 이유로 퇴거를 요청해 배울 공간을 잃게 되었다. 배움에 대한 목마름과 열정으로 공부를 포기할 수 없었던 그들은 지난 1월 2일부터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천막을 치고 수업을 지속했다. 바람이 불면 대화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음을 내는 비닐천막에 기름 난로 몇 개로 겨우 온기만 유지하는 차가운 교실. 이마저도 종로구에서 철거방침을 전해왔기에 천막야학 역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위기에 처해있다.

불법가건물? 생존 위한 공부방!
환하게 웃는 노들인들의 사진과 그들의 의지가 담긴 문구. 그리고 정립회관 교실에 걸어 두었던 문패가 걸린 천막. 춥고 어두운 천막 안에는 매일 밤늦도록 수업이 계속되고 있다. 거센 겨울바람에 천막이 내는 바스락 소리는 고사하고라도, 공원을 지나는 이들의 웃음소리도 천막 안에서는 확성기 마냥 울려 퍼진다. 또, 좁은 천막을 세 칸으로 나눠 수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옆 교실의 작은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 정상적인 수업을 진행하긴 무리다. 게다가 장애가 심한 학생들과 컴퓨터를 통해 수업을 진행하던 것도 이제는 불가능해 의사소통조차도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노들야학 천막교실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다. 누군가가 그들의 ‘공간’을 뺏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배움에 대한 ‘의지’는 꺾을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교사대표 심정구(37세)씨는 “이 수업은 단지 자신의 지식이나 학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무관심과 정부의 무책임을 알리고, 근본적인 대책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장애인 교육문제를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책임질 때까지 춥고 힘들어도 우리는 이곳에서 천막을 치고 수업을 계속 할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교육받을 공간이 절실히 필요하다. 단지 배우고 싶을 뿐이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종로구는 벌써 수차례 야학천막을 ‘불법가건물’이라며 퇴거 명령서를 보냈다. 공원에 천막을 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보지 않고, 단순히 ‘공원 환경에 위해가 되는’ 것에만 초점을 두었다.
초등반 국어 담당 조사랑(23세) 교사는 “매일 교사와 학생으로 이뤄진 2인 1팀이 천막을 지키며 밤을 보낸다. 언제 헐릴지 모르는 ‘불법가건물’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방치해 둔 장애성인들을 자처해서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데…. 그나마 우리도 버리려 하는 것”이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노들야학은 천막이 걷힌다 해도 다시 천막을 쳐야 하는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때문에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니며 서울시교육청과 교육인적자원부 등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장애인야학에 지원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대답뿐. 일반 야학은 문예교육사업으로 인정받아 정부지원을 받는다. 하지만 장애인 야학은 그렇지 못하다. 때문에 지난 수년간 교육청에 건의해서 겨우 지원받고 있는 ‘예비비용’도 언제 중단될지 몰라 조마조마하다.
심 교사는 “누군가에게 동정만 받고 은혜를 입으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함께 어울려 살기 위해 작은 손길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는 것은 알아 주었으면 한다. 지금 당장은 도움이 필요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당당히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에게 최소한의 교육여건은 필수 불가결하다”라고 말했다.
장애인들은 낯선 사람은 물론 낯선 공간에 대해서도 비장애인들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두려움을 느낀다. 정규 교육과정은 물론 친구를 사귄 경험도 적다. 그런 이들이 노들야학과 같은 공간을 통해 처음으로 사회를 경험하고 또 다른 시작의 용기를 얻게 된다.
지난 15년 동안 노들야학을 통해 글을 깨우친 장애인은 170여명. 노들야학은 장애로 인해 학령기에 교육을 받지 못했던 이들을 위해 문예교육과 초·중·고등과정, 검정고시 등의 교육과정을 진행하며, 매주 특별 활동 등의 시간을 마련해 장애인·비장애인 등과의 어울림을 이끌어 냈다. 그들에게 노들야학은 단지 글을 배우는 공간만이 아니라 세상을 접하는 곳인 것이다. 그래서 노들인들은 야학을 더욱 포기할 수 없다.
심 교사는 “교육 받아야 할 사람이 있는데, 그 교육에 대한 권리조차도 보장하지 않는 것이 현 제도이다. 권리가 없기 때문에 시설과 지원도 필요 없는 것이 돼 버린다. 장애인의 교육권을 인정하고, 그들을 교육하고자 하는 단체를 인정해 주길 바랄 뿐이다”라고 강조했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설움과 차별을 메우기 위해 존재하는 노들야학. 오늘 같은 내일을 남기지 않기 위해, 쉽지 않은 내일의 길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천막교실에서의 수업은 추위, 소음과의 싸움이다.

“장애인도 교육받고 싶다!”
지난 1월 26일 저녁, 노들야학교육공간 마련을 위한 모금공연이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렸다. 매년 노들야학을 거쳐 간 학생과 후원자들을 초청해 학예회 형식으로 열었던 ‘노들인의 밤’. 올해는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목소리를 내기 위한 모금공연으로 성격을 바꾸어 준비했다. 학생들이 오랜 시간 땀 흘려 준비해온 공연에는 그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노들야학의 학생회장 임은영(38세)씨는 벌써 10년째 노들과 함께 하고 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노들을 지켜보며 배움과 희망을 키워 온 그의 마음도 누구 못지않게 절실할 터였다.
“98년에 정립회관 소속 사회복지사를 통해 노들야학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정립회관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나도 꿈이 있었다. 하지만 공부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서 그 꿈을 입 밖에 내면 주제 넘는다고 할까봐 두려울 뿐이다. 우리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노들야학을 통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즐거워졌는데, 이렇게 포기하고 싶지 않다.”
말 한마디 하는 게 쉽지 않아 보이는 임씨였지만, 노들야학을 위하는 그 진심이 오롯이 전해져 보는 이의 마음을 찡하게 했다.
배덕민(노들야학생·44세)씨는 “노들학교를 통해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지금의 현실을 보면 답답한 마음뿐이지만, 다 같이 조금만 더 힘내면 반드시 잘 해결 될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배씨는 야학을 졸업한 뒤, 사이버대학에 진학해 사회복지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노들야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래서 그는 희망을 버릴 수 없다.
심 교사는 “공연을 통해 대중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가까이 다가가려 노력했다. 노들야학의 현재는 정립회관만의 문제가 아니다. 장애인교육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이다. 장애인들에게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고,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공부할 공간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복지관이나 교회에서 주최하는 지역 장애인들을 위한 공부방 등을 제외하면, 장애인을 위한 교육시설은 전국 14~20곳 정도가 고작. 하지만 이마저도 열악한 환경 탓에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노들야학 측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우러져 아무런 편견과 차별 없이 동등하게 교육 받으며 이 땅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관심과 지지를 부탁한다. 정부에서 장애성인의 교육문제를 적극적으로 책임질 때까지 춥고 힘들어도 천막을 치고 수업을 계속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노들인의 밤. 수화노래를 통해 노들인들의 간절함을 전했다.

장애인 교육보장 위한 의미 있는 삶 계속 될 것
「대학은 왕국처럼 현란하고, 하루아침에도 고층 빌딩이 섰다 사라지는 대한민국 아닙니까. 강당을, 운동장을 기대하진 않겠습니다. 걸음이 느린 정란이 너무 힘들지 않도록 지하철역에서 가까운, 우준의 거대한 전동휠체어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넉넉한, 수동휠체어를 탄 영애가 눈이 와도 올 수 있는 평지에, 쉬는 시간 우르르 몰려가도 모두 볼 일을 볼 수 있게 넓은 화장실과 혹시 불이 나면 대피할 수 있도록 경사로를 낀 그런 교실을, 더 많은 영애와 정란과 우준이 찾아올 수 있도록, 너무 외지지 않은 곳에 내어 주십시오.」
가르치던 교사도, 배우던 학생도 빠짐없이 다 남아 있지만, 책상 하나 제대로 놓을 교실은 사라져버린 ‘노들장애인야간학교’의 호소문 중 일부이다.
왜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배움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토록 힘든 일이 된 것일까.
하지만 “희망은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비록 현재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지만, 지금까지처럼 벗들과 의미 있는 삶을 산다면 힘들어도 견딜 수 있다”는 심 교사의 마지막 말에서 다시금 희망을 가져본다.
본인이 원해서 장애인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480만 장애인들. 이들은 최소한의 교육이라도 받길 간절히 원하고 있다. ‘인간대접’받으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길 원하는 장애인들에게 하루빨리 교육권이 주어지길 희망한다.
 글/명슬기 기자 사진제공/노들장애인야간학교

명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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