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종단을 마친 시각장애인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생명줄’ 박탈하는 사회에 절규

한낮의 태양은 맹렬했다. 그늘도, 모자도 태양이 내뿜는 뜨거운 열기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촉즉발의 긴장감마저 감도는 국민일보 앞의 열기는 태양을 버금갔다. 이곳에는 오전 11시 대한안마사협회 회원 2천여 명이 관광버스를 대절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서로에게 몸을 의지하거나 케인으로 바닥을 디디며 일사분란하게 버스에서 내린 시각장애인들. 이들의 표정에는 한 치 앞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가 곳곳에서 묻어났다. 생계를 팽개치고 거리에 나선 이유가 무엇일까. 대한안마사협회 송근수 회장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이들의 절박한 입장을 호소했다.

“이 땅의 시각장애인들은 안마업이 아니면 도대체 어떤 직업을 가질 수 있습니까. 장애인들이야말로 원천적으로 직업 선택의 자유를 봉쇄당한 소수자들입니다. 안마업이 없다면 생계유지조차 불가능한 우리들에게 안마는 그 자체가 생존이요, 생명입니다. 일반인들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위해 장애인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시각장애인들이 대거 집회를 가졌던 지난 6월 26일은 이들에게 상징적인 날이었다. 헌법재판소 판결이 예정된 날인 동시에 합헌을 기원하며 국토종단을 감행한 29명의 시각장애인들이 무사히 서울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비록 판결은 미뤄졌지만 무려 620km를 15일간 도보 행진한 시각장애인들은 동료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등장했다. 이들의 도보 행진이 험난한 여정이었음을 이들의 초췌한 모습에서 가늠할 수 있었다. 2명의 시각장애인은 무릎 인대가 파열되고 발바닥에 심한 염증이 발생하는 등의 부상을 입었다. 휠체어 타고 먼 길을 돌아온 동료의 모습에 수많은 시각장애인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시커멓게 그을린 이들에게서 고달픈 모습이 역력했지만 눈빛만큼은 득의양양했다.

국토종단을 마친 경기지부 류명구 지도위원장은 “6월의 태양은 너무나도 뜨겁게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투쟁의식과 도전정신은 더욱더 타올랐습니다. 620km 국토종단하면서 누구도 봐주지 않은 외로운 싸움이었지만 지나가는 국민들이 ‘파이팅’ 외쳐줄 때는 힘이 솟았습니다. 우리를 지켜보는 국민들이 있기에 우리의 생존권이 거리로 내몰리지 않을 것을 확신합니다”라고 소감을 발표했다.

이어 2천여 명의 시각장애인들은 한 목소리로 “합헌 판결”, “기원 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결의를 다졌다. 참았던 분노가 폭발하고 국민적 공감을 호소하는 이들의 절규는 서울 한복판에 오랜 시간 잔흔을 남겼다. 구호를 마친 이들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종로 보신각까지 가두시위에 나섰다. 여럿이 허리에 줄을 동여 메고 시위에 동참한 시각장애인들의 모습은 절박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생의 몸부림이었다. 이들의 행렬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국민일보 정문에서 종로 보신각에서 가두 시위에 나선 대한안마사협회 회원들.

안마사 사수 위해 곳곳에서 절박한 시위

시각장애인들의 시위는 지난 5월부터 본격화됐다. 한강둔치를 비롯해 서울 시내 곳곳에서 30여 차례 집회를 가졌는가 하면, 대국민 홍보전단 1백만 부를 배표, 투쟁을 전개했다. 또한 지난 6일 9일부터 매일 서울과 전국 15개 시도에서 회원 1만여 명이 ‘합헌기원 가두행진’과 안마의료봉사활동도 벌였다. 안마사협회 인천지부 회원들은 지난 6월 9일부터 18일까지 한글 점자 창안자인 박두성 선생 묘지에서 ‘단식 투쟁’을 감행하기도 했다. 대한안마사협회의 전국 지부가 모인 이날에는 이들의 절규 집대성을 이룬 날이었다.

대한안마사협회 전북지부 정진우 지부장은 “일반인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수만 가지에 이르지만 시각장애인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오직 안마업뿐이다. 위헌 결정은 우리에게 곧 사형선고와 진배없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관심과 배려는 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이번 판결이 반드시 합헌으로 결정돼 우리 장애인들을 보호해줄 것으로 믿는다”고 단언했다.

사실 안마사를 둘러싼 법적 공방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처음 위기가 닥친 건 1990년대 후반, 각종 스포츠 마사지, 경락 마사지 등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부터다. 이미 파국을 예고했던 일은 2003년에 드디어 불거졌다. 대다수 불법 영업에 속했던 이들은 장애인들에게만 허용한 안마사 규칙에 대해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다행히 헌법재판소는 장애인들의 손을 들어줬다. 동시에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경우, ‘규칙’이 아닌 ‘법률’에 근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2006년이 지나도 규칙은 법률로 승격되지 않았고, 비장애인들은 또 다시 헌법재판소에 위헌 신청을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헌법재판소는 2003년 판결과 달리 현행규칙이 ‘위헌’이라고 판결했고, 그해 시각장애인들의 잇단 투신자살로 이어졌다. 당시 이들의 한강변 시위는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목숨을 담보한 이들의 극한투쟁은 위헌 판결 대신 ‘개정의료법’이라는 성과를 이뤘다. 개정 법 61조 1항과 82조 1항에 ‘장애인복지법에 따른 시각장애인’이라는 문구를 삽입함으로써 안마사를 시각장애인 유보직종으로 표시한 것이다.

대한안마사협회 송근수 회장은 “우리나라 장애인은 국력에 비해 상당히 낙후됐다. 그 중 시각장애인은 법과 제도, 사회적 인식의 제약으로 인해 타 장애인에 비해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안마업은 시각장애인 스스로 열악한 삶의 환경을 개선하고 스스로 재활·자립할 수 있는 제도이다.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은 연금제도도 없고 정부의 각종 복지혜택도 열악한 수준이다. 다만 정부가 유일하게 배려한 안마업을 통해 그나마 자신은 물론 가정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 안마사 제도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현재 수기협회, 스포츠마사지협회 등은 또다시 이 개정의료법이 위헌이라고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2006년 이후 해마다 반복되는 이번 사태는 그 어느 때보다 양측의 반발이 거셀 것으로 예상된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안마업은 유일한 생계 수단이다.

평생 ‘한우물’판 이들, 설자리 잃어

현재 안마업에 종사하는 시각장애인들은 약 7천여 명에 이른다. 1915년부터 장애인들에게만 안마사 자격을 허용한 이래로, 이들은 맹학교 고등부 3년과 안마사 양성과정 2년을 거쳐야 정식으로 안마사 자격증을 취득한다. 안마실습 동안에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학년 진급이 제한된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스포츠 마사지가 횡행하면서 이들의 설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강오봉 지도분과 부위원장은 “지난 100년간 안마는 우리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생존권이다. 시력 대신 숙련의 손 기술을 이용해 생계를 이어왔다. 평균 월급이 100~150만원 안팎이지만 그나마 출퇴근하지 않고 24시간 동료들과 합숙, 대기할 때 가능한 액수다. 하지만 스포츠 마사지나 불법 마사지업소들이 생기면서 50% 정도가 실직했다. 일반 회사들처럼 퇴직금도 없고 완전 수입이 차단된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촉각과 청각이 예민하다는 장점을 활용해 회계사, 속기사, 피아노 조율사 등 다른 직종도 있지만 비장애인과 경쟁하면 자연 도태되는 시각장애인들. 때문에 안마업은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생존 무기인 셈이다. 집회에 참여한 이관옥(서울·41)씨는 2006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무겁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조화롭게 안마업에 종사하면 좋겠다. 비장애인들 역시 하나의 직업인데 이들의 입장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안마가 아니면 끝이다. 어떤 유예기간도 없이 합헌과 위헌이라는 극과 극의 결론이 솔직히 두렵다. 비장애인들은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절박한 심정을 국민들이 이해해주길 바란다.”

이씨는 현재 안마사로 일하고 있다. 그의 바람은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당당히 사회 일원으로써 한몫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번번이 무력감을 탈피할 수 없다는 이씨. 사회에 커다란 벽을 느낀 것은 비단 그뿐 만이 아니다.

김봉진(전남․37)씨도 불안감과 위기의식을 떨칠 수가 없다. 자신이 심각한 약시임을 알았을 때,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졌던 김씨.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지금의 현실은 처음 그의 병명을 알았을 때의 막막한 감정과 비슷하다.

“약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세상에 이 눈을 해서 무엇을 할까 싶어서였다. 자살도 여러 번 시도했었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았고, 생을 포지 않고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고 부끄러웠다.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안마를 배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비록 잘 보이지 않지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존감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하나뿐인 맹인 안마 죽음으로 사수하자’ 구호를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2천여 명의 목소리에 섞여 커다란 울림을 낳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이들에게 비장감이 흘렀다. 시위는 숨 막히는 땡볕에도 계속 멈추지 않았다.

사회적 약자 위한 법 제정과 사회적 관심 절실

이렇듯 안마사 자격을 두고 스포츠마사지협회와 시각장애인들의 줄다리기가 치열하다. 이미 2003년부터 직업선택의 자유이냐, 생존권이냐의 논쟁이 시작됐지만, 양측의 강경한 태도는 헌법재판소 판결을 앞두고 더욱 반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2006년에 일어난 비극이 재현되지 않으려면 법에 근거해 양측의 이해득실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적 관심과 법의 보호가 없다면 이들을 죽음의 문턱으로 내모는 일이다. 시각장애인들의 무고한 희생이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글/이영아 사진/정현주 기자

이영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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