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으로

도시재개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피맛골

아련한 추억이 담겨있는 피맛골이 재개발의 풍랑속에서 역사 뒤안길로 사라진다.

해 질 무렵 고소한 생선구이, 도란도란 끊이지 않는 이야기와 술잔들. 냄새 나는 남녀 공용 화장실, 뒷자리 사람과 등을 맞대야 했던 식탁, 속옷까지 배는 음식 냄새, 피맛골하면 떠오르는 일상적인 모습이다.

피맛골, 아련한 추억에 잠기다

서울시는 지난 9월 서민적인 음식점·술집이 가득한 '피맛골'등 종로구 청진동 일대를 본격 재개발 한다고 말했다.

현재 서울시는 '도시환경정비사업'일환으로 옛 동네를 허무는 작업이 속속 진행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 피맛골도 지나간 추억을 뒤로 한 채 변화를 맞이하게 됐다.

이른바, 피맛골은 종로의 큰길을 두고 종로1가부터 6가까지, 큼직큼직한 건물 뒤로 이어져 있는 작고 좁은 골목을 말했다.

조선시대 종로는 양반들이 교자나 가마를 타고 지나던 큰길이었다. 그 당시 종로를 지나던 백성들은 양반들의 가마가 지나갈 때마다 길가에 엎드려 예의를 표해야 했는데 이를 번거롭게 여긴 사람들이 아예 큰길 양쪽 뒤편에 양반들을 피해 다닐 수 있는 작은 길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양반들이 탄 말을 피해 다니는 길’이라고 해서 ‘피마(避馬)길’이라고 불렀고 그 길 양쪽의 뒷골목 동네는 피맛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이 길에 목로술집, 모줏집, 장국밥집 등등 술집과 음식점 등이 하나 둘 씩 생겨나며 오늘의 피맛골을 형성하게 됐다.

네 구역으로 나뉘는 피맛골

빈대떡, 막걸리, 메추리구이와 동그랑땡 등 돈이 없어도 풍족하게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피맛골은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뉜다.

피맛골의 첫 번째 구간은 교보문고 종로 쪽 입구 ‘피맛골’이라고 쓰인 표지판부터다. 바로  동피맛골이다.

동피맛골은 좁지만 피맛골의 정취가 가장 많이 느끼는 곳이기도 하다. 생선구이, 꼬치, 빈대떡집 등을 30~40년 이상 오랜 된 집들이 많고 고객층도 젊은 사람들보다 장년층 많다.

동피맛골을 따라 종로2가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청진동 길과 제일은행 본점 건물 사이에 두 번째 골목길이 시작된다. 청진동 해장국 골목으로 들어가는 두 번째 구간이다.

높은 빌딩 대신 단층과 2층 건물들이 즐비한 이곳은 번화한 종로에서 가장 서민적인 골목이다. 40~50년대부터 자리를 지킨 ‘청진옥’과 ‘홍진옥’이 대표적인 전통 해장국 집으로 우명하다.

청진동과 인사동을 잇는 세 번째 골목의 초입인 현 삼성증권(종로타워)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인 화신백화점이 있던 자리다.

친일파 기업인 박흥식이 지은 건물로 1940년대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만큼 서울 구경의 명물이었지만 문화재 보존과 도시 개발 논쟁 속에서 1987년 건물이 철거되기도 했다.

이곳은 1백 년 된 ‘이문설렁탕’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으며, 김두환이 관리했다던 우미관도 이 골목에 있었다고 한다.

반면 80년대 종로 ‘국일관 나이트’등으로 대변되는 서피맛골은 가난한 대학생들의 약속 장소로 많이 활용되며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곳이다.

종로2가를 거쳐 인사동에서 시작되는 길로 인사동 방향 모퉁이에 위치한 금강제화 바로 뒤로 가거나 인사동 맞은편 세븐일레븐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된다.

호주머니가 가벼운 학생들을 상대해서인지 서피맛골의 가게들은 다른 골목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다.

특히 네 번째 골목으로 들어서면 서피맛골에서 유명한 ‘와사등’이 있다. 사람들에겐 ‘간판 없는 집’으로 더 잘 알려진 곳으로 46년째 영업 중인 곳이다.

서피맛골 끝 우측에 위치한 이곳은 ‘간판없는 집’ ‘막걸리집’ ‘종로대학’ ‘고갈비집’ 등으로 불리며 막걸리에 생선구이로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아 넣는다.

재개발을 맞이한 피맛골

이런 피맛골 중 일부구간이 오는 2009년 1월, 6백 년간 이어온 이야기를 마감한다.

따지고 보면 현재 피맛골 및 청진동 재개발은 30년 가까이 진행된 사업이었다. 종로1가·청진·공평동 일대(7만7931㎡)가 1979년 한꺼번에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됐고, 서에서 동으로 19개 구역으로 쪼개졌다. 이 중 가장 먼저 재개발 한곳이 공평동 SC제일은행 본점이었다.

재개발이 더뎠던 원인은 '사업성'이었다.

종로구 관계자는 "땅 주인들이 조합을 결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부동산 개발업자가 일괄적으로 사들여 개발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경기에 민감했다"며 "도심에 큰 건물을 지었다 재미를 보지 못한 선례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도심 건물의 공실률이 떨어지고 임대료가 오르자 재개발에 탄력을 받았다.

현재 사업이 진행 중이거나 서울시 심의를 통과한 곳은 1·2·3·5지구와 12~16지구로 이 중 2·3지구와 12~16지구는 한 지역으로 합쳐져 개발된다.

이 자리엔 100~106m 높이(지상 23~24층, 지하 6~7층)의 빌딩 6곳이 들어설 예정이다.

그외 4지구와 8~11지구, 17·18지구는 아직 사업추진 절차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 같은 재개발사업은 “피맛골 파괴, 서민의 애환이 깃든 유적지를 짓밟는다"는 비난 여론으로 개발에 변화를 줘, 피맛골의 추억을 살리기 위한 ‘피맛골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수립, 복원에 나서기로 했다.

재개발 2·3지구와 12~16지구에 들어설 고층 건물 중 종로 쪽으로 나온 부분의 높이를 3층 이하로 제한하고, 피맛골의 경우 현재 4m 정도인 가게 폭을 더 줄여 분위기를 연출토록 계획을 세웠다.

보행자들을 위한 길은 너비 5m 정도로 편하게 오가도록 할 방침이다. 12~16지구에는 예전 골목길을 재현하는 디자인도 도입하기로 했다.

한편 19개 지구로 나눠진 청진구역 재개발은 지난해 7월 입주를 시작한 6지구의 르 메이에르 종로타워를 비롯, 7지구 삼공빌딩이 이미 들어섰다.

이주를 시작한 1지구와 5지구에는 각각 메트로PFV와 동림도시개발이 지하 6층, 지상 23층의 오피스 빌딩을 짓는다.

또 국도개발과 G.L.PFV원은 ‘열차집´, ‘서린낙지´ 등이 있던 2∼3지구와 12∼16지구를 하나로 묶어 지하7층, 지상24층짜리 초대형 빌딩으로 개발한다. 반면 9∼11지구와 17∼18지구는 도시철도공사가 ‘지하철 통과에 따른 지상권보상권’ 을 50년간 갖고 있어 개발에서 제외됐다. 또 농민신문사가 있는 8지구와 건물주가 재개발에 반대한 4지구는 현재 모습대로 남는다.

종로구 도시계획관계자는 “건물주의 ‘동의’가 없는 2개 지구를 빼고는 이미 개발이 시작됐다.”면서 “1지구와 5지구는 관리처분인가를 마쳐 이르면 올해 말이면 공사를 시작하고 나머지도 조기 착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피맛골, 유명 맛집은 어디로

피맛골의 재개발에 따라 유서 깊은 맛 집들도 하나 둘 둥지를 옮겼다. 르메이에르 종로타운에는 선지해장국으로 유명한 '청진옥'과 순두부찌개로 이름난 '감촌', 메밀국수로 잘 알려진 '미진', 전통의 족발집 '장원집'이 새로 자리를 옮겼다.

70년 전통의 한일관도 강남구 신사동으로 자리를 옮겨 11월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홍어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목포집'은 두산위브 파빌리온으로, 생태찌개로 사랑받아 온 '안성 또순이집'은 대한축구협회 가는 골목으로 이전했다.

빈대떡집인 '열차집'과 이름난 '남도식당' 등의 맛 집들은 대부분 옛 모습을 그대로 영업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일대가 재개발 2·3구역에 포함돼 내년 이후에는 지금 분위기를 못 느낄 가능성이 높다.

청진옥의 최준용 사장은 “사실상 피맛골은 무늬만 있지 그 안에서 살아 숨쉬던 식당들은 모두 떠났다. 재개발도 좋지만 피맛골, 청진동 해장국골목 등을 보존하려는 정책적 배려가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비상이 걸린 곳은 음식점 많이 아니다. 바로 낙지골목으로 불리는 종로구청 길의 낙지집들이다. 한때 ‘무교동 낙지’로 불리며 서울의 대표 맛집으로 인기를 끌었던 낙지 집들은 청진동 재개발로 인해 수난을 겪게 됐다.

실제로 르메이에르로 이전을 확정한 낙지집 중 서린낙지를 제외하고는 낙지골목 가게 중 마땅한 가게 터를 구한 곳이 거의 없다.

이강순실비집 이강순 사장은 “낙지골목을 떠날 수가 없지만 임대료가 너무 비싸서 갈 곳이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라고 말을했다.

서린낙지를 경영하는 박범준씨도 “이번 재개발로 낙지집 중 상당수가 사라져 피맛골 맛집 전통은 끝이 나게 되었다”라고 아쉬워했다.

한 부동산 개발업자는 "유럽 국가들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옛 도시를 복원하겠다고 나서는데 우리는 멀쩡한 과거 유산을 재개발 명목으로 없애고 있다"면서 "옛 모습을 남겨두는 대신 용적률을 높여주는 등 보다 적극적인 보존방안을 마련해 전통 보존과 개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피맛골을 아끼는 한 시민들도 "계획대로 20층의 대형건물이 들어서면 주변의 피맛골 정서는 모두 사라지게 된다”며 “역사적으로도 귀중한 서민의 골목이 훼손되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글/이정직 기자

이정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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